〈 104화 〉 104 살아있는 새해.
* * *
“잠깐 여기들 모여 봐.”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설거지가 끝난 뒤로 은지가 애들을 모이게 했다.
“뭐야?”
“은지 언니 왜요?”
“잠깐만 이것만 하고!”
은지의 부름에 모두 자리에 모였다.
김준은 소파에 앉아서 거실에서 애들을 모은 은지가 뭘 하나 지켜봤다.
“다들 한 번씩 입어 봐. 상황이 안돼서 일단 두 벌만 만들었거든?”
“어머, 이게 뭐야?”
“와~ 스웨터!”
은지가 그동안 뜨개질을 해서 완성한 옷이었다.
저걸 보니 김준은 지난번 인아가 떠준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가 칼 맞아서 찢긴 게 생각났다.
“어우, 쉣! 이거 뭐야? 왤케 무거워?”
에밀리가 먼저 나와 웃옷을 벗고 입은 순간, 푹신한 스웨터 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지 칼라를 쭉 잡아당겼다.
“당연히 무겁겠지.”
은지는 다른 스웨터를 들었다가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허공을 나르던 스웨터가 떨어지면서 쿵! 소리를 냈다.
“…이게 옷에서 나는 소리?”
에밀리 다음으로 입어보려고 했던 가야가 머뭇거리다가 조심히 걸쳤고 생각 이상으로 두툼한 두께에 일단 움직여서 팔을 흔들었다.
“진짜 무겁긴 하네?”
“움직이는건 어때?”
“그럭저럭… 패딩 두겹 껴 입은거 같다.”
가야와 에밀리는 입은 스웨터를 바로 벗어 다른 애들에게 건네줬고, 도경, 라나, 나니카, 마리 등등 다른 아이들도 한 번씩 입어보며 좀 무겁다고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김준 또한 그것에 흥미를 가졌다.
“뭐야? 방검복이라도 만들었어.”
“네.”
김준은 은지가 건네준 스웨터를 받자 바로 입어봤다.
확실히 무게감이 꽤 느껴지긴 했지만, 김준에게는 그럭저럭 적응할만했다.
“휘유~ 잠깐만.”
그걸 입고 조용히 TV 선반으로 다가가서 팔굽혀펴기를 몇 번 한 다음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는데, 조금 까끌거리는 거 빼고는 괜찮았다.
“뭘로 만든거야?”
김준이 스웨터를 벗어 건네주자 은지는 내용물에 대해 말했다.
“스웨터로 짜면서 안에 이것저것 넣었어요.”
“뭐 넣었는데?”
“플라스틱판이랑 가죽을 본드로 붙여서 그걸 천으로 덮어 덩어리를 만들고 털실로 쨔낸거에요.”
“완전 갑옷이네?”
김준은 은지가 만든 옷에 감탄하면서 다른 여자애들에게 말했다.
“야, 잘 됐다. 안 그래도 나 프로텍트끼는거 빼고 너희들 보호구 생각했는데, 이거 입으면 되겠다.”
“그러게요. 은지 진짜 대단하다!”
가야는 같은 방을 쓰면서 뭘 계속 꼼지락거리며 뜨개질을 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연신 칭찬해줬다.
“나는 은지 언니가 왜 멀쩡한 옷 잘라다가 쑤셔 넣는지 궁금했는데….”
“아~ 뜨개질할 때 안에 뭐 집어넣던 게 추울 때 따뜻하라고 한계 아니구나?”
다른 아이들도 은지가 매일같이 뜨개질하는 건 봤지만, 그게 방호복이라는 것은 처음 안 것 같았다.
지난번 신릉면에서 가져온 방검복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두꺼운데다가 사이즈도 성인 남셩용이어서 아이돌들이 입으면 그 위에 겉옷을 입는 순간 팔을 못 움직일 정도로 뚱뚱해져서 실제 상황에 쓰긴 여러모로 애매한 물건이었는데, 그래서 은지가 따로 여성용을 만든것 같았다.
“암튼 정말 잘 했어.”
김준이 기분 좋게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은지는 순간적으로 피했다.
“….”
“…아, 미안!”
“아니에요.”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다가, 상대가 은지라는 것을 알고 사과하는 김준.
그 어색한 상황에서 은지는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가, 인아한테도 갑옷 스웨터 한번 입어 보라고 건네줬다.
***
딱 딱
창고에 남은 합판으로 우드박스를 만든 김준은 거기에다가 캠핑카에서 나를 수 있는 생존장비를 분류하고 있었다.
“구급약, 비누, 건전지, 라이트, 톱, 무전기, 몽키스패너, 멀티툴, 라이타, 양초, 식칼, 토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차 안에서도 중장기 생존에 대비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담을 박스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때 뒤에서 에밀리가 다가왔다.
“준! 니스 가지고 왔어.”
금발의 소녀가 바니쉬(Varnish)라는 원래 이름 대신, 공장용어 니스라고 말하니 뭔가 웃겼지만, 그게 다 김준한테 배워서였다.
“아, 그래 니스.”
마스크를 끼고, 헤드캡을 쓴 다음 니스를 뿌린 다음 말리고 있을 때, 에밀리는 슬며시 김준의 어깨에 기댔다.
“나 아까 봤지.”
“뭘?”
“은지 머리 쓰다듬으려다가 그 언니가 피한 거.”
“….”
“나는 마음껏 만져도 되는데?”
김준은 그 말에 장갑을 벗고서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가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은지랑은 아직 안 했지?”
“뭐 그런 걸 물어?”
“흐응~ 유일한 버진인가?”
‘유이’라고 대답하기도 귀찮았고, 그런 걸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드박스를 만들고 생존 물품을 채운 뒤로 김준은 그날 저녁에 새해 루팅 계획을 말했다.
“시골집 물물 교환하러 갈거야.”
“쥐 파먹은 쌀 챙겨야죠?”
“어, 그거하고 기본적으로 거기 고기랑 채소는 있어도 생필품이 부족해 보이니 좀 챙겨두자. 그리고 이번엔 딴 사람은 몰라도 마리는 간다.”
“네?”
그동안의 순번이 아니라 김준이 직접 픽을 하자 마리는 놀라다가도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오빠랑 같이 가야 하는 거군요?”
“거기 산모 있잖아?”
“아, 그렇지.”
지난번에 명국이 부인의 몸 상태를 알고 싶다고 해서 일단 마리를 데려가기로 했고, 그녀 또한 기본적인 의료도구는 따로 챙겨가기로 했다.
“그리고 한 명이 또 누가 가야 하나?”
인아랑 가야는 지난번 황 여사 일행으로 고생을 한지라 이번엔 쉬고, 명국의 집에 다녀왔던게 에밀리랑 나니카, 라나였다.
마침 마리와 라나가 같이 갔다가 처음 명국 내외를 만났으니 똑같은 라인으로 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할 때…
“제가 가죠.”
“응?”
은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사람 안 만난 지 좀 됐어요.”
“…어머, 진짜!”
“그러네~ 은지 언니만 누구 만난 적 없죠?”
“그게… 어떨지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정토사, 명국 부부, 신릉면 등으로 생존자들을 만났을 때 은지는 그 자리에 언제나 없었다.
그 이전에도 생존자가 있었지만, 그건 마리와 약속해서 머릿속에 지워버린 존재이니 언급하지도 않았다.
“흐으음.”
“그 계란 받는 집은 애 엄마도 있다고 했고, 다른 애들도 많이 다녀왔다고 하니 안전하죠?”
“그렇긴 한데….”
은지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이번에 루팅은 정해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내일은 은지와 마리가 같이 가자.”
“오케이! 그러죠.”
“잘 부탁해.”
은지가 손을 내밀자 마리가 웃으면서 악수했고, 내일의 루트를 위해서 지도를 하나 가져와 길을 설명해줬다.
“일단 여기 가면서 털은 곳이 금은방, 마트, 옷가게, 지물포거든? 명국이네는 오토바이 타면서 따로 루팅을 하니까 웬만한건 다 털렸을거야.”
“음~ 그렇겠네요?”
“여기서 방법이 두 개 있어. 하나는 다 털었어도 중요한 건 물물교환이니까 그냥 가던 길로 간다.”
“두번째는요?”
“다른 길이 있다는 거겠지.”
은지의 말에 김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천가의 샛길을 가리켰다.
“여기는 지난번에 가야랑 은지랑 같이 간 곳이야.”
“아~ 오리 사냥했던 곳.”
“맞아. 거기야.”
아파트 짓는다고 싹 밀어버린 땅에 잡초만 무성한 샛길.
예전에 가족을 그리워하며 우울모드에 빠진 애들 고기라도 먹여 달래주려고 꿩이랑 오리를 잡으러 갔던 곳이었다.
“여기가 원래 함바집하고, 구멍가게 몇 개 있는데, 그거라도 털어볼까?”
“네, 그러죠.”
“좀비 위험할텐데….”
은지가 당당하게 나섰지만, 같이 파트너로 갈 마리는 할 일이 배로 늘어난 것 같아서 불안한 기색이었다.
“일단 포지션부터 정하자. 조수석하고, 후방 보조 누가 맡을래?”
“제가 무기 쓸게요.”
은지가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손을 들자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후방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애들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아, 그러면 저기 그… 매직….”
“뭐?”
나니카가 우물쭈물 거리며 매직을 말할 때, 에밀리가 답답한 듯 먼저 나섰다.
“탐폰하고 패드! 잔뜩 필요해.”
생리대라는 존재는 아무리 박스 단위로 챙겨도 부족했다.
하기야 8명의 20대 여성이 살고 있으니 사용하는 양만 하더라도 장난 아니었고, 그거 처리할 때마다 구덩이에 놓고 태우는 것도 고역이었다.
“생리대는 일단 체크했어. 그다음은?”
“비타민이 좀 있으면 좋겠네요. 생야채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분말형이나 포도당 캔디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오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 찾아볼게.”
에밀리와 나니카가 말한 생리대, 마리가 말한 비타민. 그 사람 다음은 또 뭐가 필요한지 또 물었다.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휴지가 슬슬 떨어져 가요. 키친타올이나 물티슈는 있는데, 그걸 변기에 넣을 수도 없고요.”
“그래, 휴지도 챙기고.”
“섬유유연제 다 썼어요.”
진짜 소모용품은 아무리 마트와 편의점을 털어도 금방 동이 난다.
지나치게 호사를 누리는 거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비타민과 휴지, 생리대는 꼭 필요했다.
“일단 다 챙겨볼게.”
“고마워요. 오빠!”
김준은 회의를 끝내고 내일 출발할 도구들을 챙겼다.
지난번 제일파 놈들과 싸우다 망가진 공기총은 전부 분해해서 못쓰는 상태였다.
그래도 이전부터 총포상에서 망가진 부품들 있는 곳에 놨으니 어떻게 남은 부품으로 재조립을 해서 언제 한 번 날 잡고 만들어봐야겠다.
대신 이번에 챙긴 것은 권총 종류였다.
양 허리에 리볼버 두 자루, 공기총대신 공기권총에 엽총까지 모두 손질을 마쳤다.
“후우”
내일을 위해 김준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조용히 잠들었다.
***
따캉
공기권총이 멀리서 있는 좀비 하나를 쓰러트렸다.
“캬아아아악!!!”
“뛰는 좀비!”
뒤에서 외치는 마리를 보고 백미러를 확인하자 정말로 두 놈이 달려오고 있었다.
김준은 바로 팔을 집어넣고 파워윈도우를 올렸다.
“캬아아악!”
“크악! 크아아아!!!”
“어머 어떡해!?”
쾅 쾅쾅!!
좀비 둘이 마리가 있는 뒷좌석을 두들겨 대면서 피거품을 뿜어댔다.
김준은 그 상황에서 바로 두 여자에게 말했다.
“꽉 잡아!”
부우우웅!!
김준은 R기어로 변환하고, 바로 후진해서 달려드는 좀비들을 밀어냈다.
으드드득
미쳐 날뛰는 좀비 둘의 발을 아작내고, 그대로 밀어가자 차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좀비였다.
우우우우웅
가가가각
“캬아악! 캬그르르르….”
김준이 좀비 둘을 깔아뭉개고 앞뒤로 두세번 흔들었을 때 바닥에 새카만 피가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순간 차 내부 청소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김준이 차를 뺀 순간 뒤에 있던 마리는 멘탈을 추스르고 뒷문을 통해 두 좀비를 확인했다.
“오빠! 아직 움직여요!!!”
바닥에 깔아져 로드킬된 짐승처럼 꿈틀거리는 좀비들이었다.
다리와 상반신이 터져 내장이 흘러나오고 튀어나온 뼈가 날카롭게 번득였다.
“됐어. 이대로 간다.”
“전방 확인할게요!”
은지가 대쉬보드에서 망원경을 꺼내 한 번 봤을 때, 그녀의 땋은 머리 안으로 땀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뭐야? 왜 그래?”
“너무 많은데요? 수가 열 명이에요.”
“뭐?!”
김준이 바로 엽총 스코프로 확인했을 때, 방치된 불도저와 시멘트 트럭 주변으로 공사장 복장 차림의 좀비들이 득실거렸다.
“오빠! 뒤에도!!!”
“?!”
김준이 백미러로 보자 달려온 두 마리의 좀비를 처리했는데도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수 마리의 좀비가 있었다.
“…포위됐네요.”
은지의 말대로 1차선 샛길 하나에 앞뒤로 좀비들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으어어 으어으어]
[우우우우 우우우우]
[구오오 그오오오오오오]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면서 캠핑카를 쌈싸먹을 기세로 서서히 다가오는 좀비들.
저것들이 모두 걷는 좀비인데도 그 수가 엄청나서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후우, 지금부터 잡아야 하는데 다들 준비해!”
철컥
김준이 엽총을 장전할 때, 은지 역시도 새총을 당기면서 말했다.
“오빠, 차 옆으로 돌려야 하나요?”
“가만 있어 봐.”
은지는 그 말에 조용히 수긍하고 김준의 판단을 기다렸다.
그렇지 않아도 루팅이후에 ‘김준 앞에서 혼자 나서지 말라.’고 가야에게 몇 번 들은 터러 반 박자씩 천천히 행동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김준은 앞의 좀비와 뒤에서 오는 좀비들의 거리, 그리고 그들의 수를 보고는 결심한 듯 우회전을 했다.
아무래도 앞에 오는쪽이 더 많은 수고 위험하다!
“내가 앞에 맡을테니까 은지랑 마리가 뒤에 좀비 상대해!”
“네!”
“네, 오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묻지말고 바로 문 닫아!”
김준의 말에 마리가 캠핑카 침대칸에 엎드려 슬며시 창문을 열고 석궁을 겨눴다.
불과 며칠전만 해도 사랑의 장소가 이제는 좀비를 잡아야 하는 참호가 되었다.
거기에 맞춰 은지 역시도 대쉬보드에 굴러다니는 너트 몇 개를 집어서 그대로 새총에 장전하고 힘껏 당겼다.
빠캉 쩍!!!
타앙 콰직
슈우우웅 파악!!!
샷건, 석궁, 새총의 각기 다른 무기의 소리와 함께 세 마리의 좀비가 쓰러지는 것으로 차 안에서 공방전이 시작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