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8화 > 악마교 소탕 (6)
마에스트로는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이호연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것인지.
복부에서 느껴지는 불타오르는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신의 몸이 왜 벽에 박혀있는 것인지.
'… 이것 또한 운명이구나.'
마에스트로는 결국 자신이 본 현실을 인정했다.
자신은 패배했다.
이호연이라는 남자는 처음부터 그랬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세뇌를 무시했고, 판데믹의 계획을 전부 방해했다.
어쩌면 이렇게 패배하는 것 또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은 이렇게 퇴장할 운명인 것이다.
마왕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남은 미련이 죽음을 유예했다.
'나는 마왕님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마에스트로는 생각했다.
자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이 세계에 나타난 검은 기둥은 지구의 환경을 바꾸었고, 지옥의 문에서 나오는 괴수들과 악마는 인간 사회를 마비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판데믹을 만들어 마왕님을 위한 제물을 모았지만, 과연 마왕님께선 그것이 필요했을까.
자신이 모은 제물이 마왕 강림에 도움이 되었다면 어째서 자신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는 것일까.
마에스트로의 가슴에 억울함이 피어올랐다.
자신은 마왕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왕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마에스트로가 없었더라도 마왕이 강림하는 운명이었다면.
자신의 삶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가.
"크, 흐하…."
마에스트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아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은 당신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
마왕님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자신은 전혀 아프지 않다.
자신의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는 강한 자기 세뇌.
마에스트로는 고통을 잊은 채 정면을 바라봤다.
'저건 또 뭐야?'
이호연은 마에스트로를 바라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이레이저를 사용해 방벽을 없애고 놈의 명치에 구멍을 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사용했으니 아껴놨던 보람이 있었다.
사실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자신의 공격에 담긴 힘은 이호연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몸을 감싼 룬의 결계와 마천궁, 그리고 공간 가속으로 엄청난 속도의 물리력을 때려박았다.
실제로 놈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런데 그 상태의 마에스트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몸이 천천히 복구되고 있었다.
'치유의 마력이 없는데 상처가 낫고 있어?'
개안, 심(心)으로 읽어낸 광경은 놀라웠다.
마에스트로의 몸에 가득 찬 세뇌의 마력이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현월의 전당으로 신의 영역에 도달해 본 이호연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마에스트로는 잠시나마 신의 영역에 발을 걸쳤다.
"끝까지 곱게 뒤지는 새끼가 없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왕님의 강림까지, 저는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합니다!"
쿠웅-!
마에스트로는 핏대를 세우며 마력을 움직였다.
사실 자신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생명체에게 세뇌의 마력을 심는 것과 다르게 생명이 아닌 것에게 세뇌를 사용하는 것은 효율이 안 좋았으니까.
그것이 지금까지 마에스트로가 직접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몸마저 속여버린 세뇌는 마에스트로의 몸을 끝까지 쥐어짜냈다.
쾅. 쾅. 쾅.
마에스트로의 주변에 수많은 건물 잔해가 떨어졌다.
하나하나가 이호연의 움직임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호연은 혀를 차며 마에스트로를 바라봤다.
"버티겠다는 거구나?"
공세를 취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움직임.
목적은 뻔했다.
아몬과 말피스가 토벌대를 이긴 후 합공하겠다는 거겠지.
'내가 뚫어내야 해.'
뒤로 돌아 토벌대에게 합류하는 방법도 있지만, 마에스트로와 다른 인간의 상성은 최악이다.
저놈이 자신에게 집착해 주는 지금이 차라리 낫다.
하나. 둘. 셋. 넷….
미래 예지와 개안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방해물 사이의 틈을 찾는다.
'찾았다.'
가속.
이호연의 몸을 감싼 룬의 결계와 마천궁의 조합은 가속의 효율을 더욱 높였다.
소리보다 빠르게 도달한 이호연의 육체가 다시 마에스트로의 몸뚱아리를 노렸다.
쿠웅-!
하지만 이번엔 이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마에스트로의 몸은 강한 자기 세뇌로 훨씬 빠르게 반응했고, 수많은 방벽이 눈앞에 세워졌다.
이레이저로 지울 수 없도록 작은 크기의 방벽이 수십 개나 만들어져 있었다.
'…귀찮게 됐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이 싸움의 승자는 이호연이라고 정해져 있다.
마에스트로의 유일한 무기인 세뇌를 막을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이 곳에는 단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버티기에만 집중한다면 악마가 먼저 토벌대를 전멸시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싸움의 패배자는 이호연이 된다.
"운명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의 패배가 짙어진 것이 보이십니까?"
"운명이니 마왕이니. 멍청한 소리만 골라 하네. 마왕은 너한테 관심도 없어."
"당신은 이곳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왕님의 강림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제 존재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마에스트로의 외침에 세뇌의 마력이 묻어나온다.
지금의 대화마저 자기 세뇌의 일부였다.
놈은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세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놈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커.'
격앙된 표정과 커지는 목소리.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활로를 찾은 것 같았다.
'감정 증폭.'
마에스트로가 가진 마음의 틈.
그것을 파고든다.
"너. 마왕에게 버림받은 걸 알았구나?"
"…."
증폭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불안감과 두려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로 눈치챌 수 있었다.
마에스트로는 마왕에게 버림받았다.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마에스트로는 자신을 희생하며 마지막 제물 삼아 마왕을 강림시킨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작에 없던 검은 기둥과 시기가 빠른 지옥의 문은 지구와 지옥의 동화를 앞당겼다.
지구가 지옥과 동화하며 악마들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곧 마왕도 자력으로 강림하겠지.
원래 일어날 시기보다 훨씬 빠른 지옥의 동화 현상은 마에스트로의 활동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마왕의 몸에 깃든 이 세계의 신의 목적은 나, 이호연을 죽이는 것이다.
이 세계의 신은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며 최대한 빨리 지구에 강림하려 하고 있다.
그런 놈이 마에스트로를 신경 쓸 리가 없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 입을 여는 겁니까. 제가 짊어진 운명의 무게는 누구보다 무겁습니다."
"지랄해라. 버림받은 앞잡이 주제에."
이호연은 눈을 꿈틀거리는 마에스트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마왕의 강림을 위해 만들어진 이 세계의 '악역'은 삶의 목적을 잃었다.
놈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존재의 인정을 강렬하게 바라기에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칠 정도로 각성했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원하기에 약점이 된다.
그 부분을 자극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 속셈은 뻔해. 버티기만 하다가 토벌대와 악마와 같이 공격할 생각이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죠? 당신이 그걸 막을 수 있습니까?"
"글쎄. 하지만 그렇게 날 죽인다고 해도… 마왕이 널 계속 필요로할까?"
마에스트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호연의 말이 맞았다.
악마는 결국 마왕의 수하였다.
그들의 힘을 빌려 이호연을 죽인다고 해서 마왕님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줄 리가 없다.
물론 이호연을 죽이는 것이 무조건 인정받는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감이 증폭된 마에스트로는 혼란에 빠졌다.
'나의 존재는 마왕님의 강림을 위한 것. 그러나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은 마왕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
마왕의 강림을 위해 움직이는 자신 혼자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인정해준다는 것인가.
스윽-
마에스트로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덤빌 생각은 없었다.
사방에 깔려있는 건물의 잔해는 대부분 유지한다.
다만 이호연을 죽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뿐.
단지 그 정도의 생각 전환이었다.
'눈빛이 달라졌어.'
이호연은 개안으로 주변의 마력을 확인했다.
자신의 접근을 막는 방벽은 여전했지만, 사방에 퍼져있던 세뇌의 마력은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즉 그만큼의 마력이 마에스트로에게 돌아갔다는 뜻.
쿠웅-
움직임을 막는 방벽 사이로 마력의 폭풍이 쇄도했다.
이호연은 몸을 가속하며 마에스트로의 공격을 흘려내고 마에스트로를 향해 돌진했다.
파아아앙-!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바람에 잠시 주춤하자, 그와 동시에 무거운 압력이 팔을 강타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놈이네 이거."
이호연은 마에스트로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방금 놈은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해왔다.
'자기 자신을 세뇌하는 것으로 신체 능력이 한계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 말이 안 돼.'
순수한 어린아이는 자신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물리 법칙을 극복할 수 없다.
'생명체의 영역을 뛰어넘었어.'
현월의 전당을 직접 만들었던 이호연은 알 수 있다.
마에스트로의 자기 세뇌는 이미 인간이나 마인의 영역을 초월했다.
'신의 영역.'
마에스트로는 잠시 발을 걸쳤던 신의 영역에 완전히 올라섰다.
그 사실에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 큭."
이호연의 미소를 본 마에스트로는 미간을 좁혔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는 거죠? 악마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혼자 당신을 끝내버릴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새끼야."
푸른 마력이 이호연의 몸을 감싼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이 섬광이 되어 돌진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마에스트로는 엄청난 신체 능력과 압도적인 마력으로 이호연을 막아냈다.
세뇌의 마력이 없어도 이호연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간 뒤.
뒤로 물러난 이호연은 왼손을 털어내며 눈을 찌푸렸다.
공간 가속까지 사용하며 한 방 먹이려했지만 결국 폭풍에 스쳐버렸다.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주먹의 뼈가 개박살이 나 버렸다.
"이제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쪽의 싸움도 이제 곧 끝납니다. 당신도 운명에 순응하고…."
"이 세상엔 세계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종의 한계를 뛰어넘으면 이 세상이 그걸 막아. 그게 세계의 법칙이야."
이호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개안으로 보이는 마에스트로의 마력이 완전히 희미해졌다.
자신이 확인한 대로였다.
"네가 밟고 있는 곳은 신의 영역이야. 너 따위가 함부로 밟을 수 없어."
"그게 무슨……?"
투둑-
몸의 관절이 억지로 끊어지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에스트로의 몸이 우뚝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팔다리가 뇌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크, 크읍…?"
"그러니까 방어만 하고 있지 그랬냐."
이호연은 석상처럼 굳은 마에스트로를 보며 미래 예지를 종료했다.
마에스트로가 공격 태세를 갖춘 순간부터, 이호연의 눈에는 한 가지 미래만이 보였다.
준비되지 않은 채 돌입한 신의 영역에 마에스트로의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한 것이다.
차라리 단단하게 방어만 치중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격 태세를 취하며 마에스트로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막지 못했다.
"이, 이건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마에스트로의 얼굴에 당황이 피어났다.
"억지로 몸을 사용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자기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겠지만, 운 좋게 도달한 신의 영역은 결국 한계가 찾아온다.
마에스트로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저 꼴을 보니 문득 생각이 든다.
내기의 신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호연도 저런 꼴이 되었을까.
'그렇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근거는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마에스트로와 다르게 이호연은 확실한 준비가 있었다.
툭- 툭-
공중에 뜬 채 방벽 역할을 하던 건물 잔해가 천천히 떨어져 이호연의 어깨를 스쳤다.
마에스트로의 마력이 힘을 잃은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휘이잉-
마에스트로가 완전히 무력화된 걸 확인한 이호연은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손바닥 위에 피어나는 나선형의 마력 폭풍.
스파이럴이었다.
"이럴 순 없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버텨왔는데…!"
저벅. 저벅.
마에스트로는 다가오는 이호연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나도 당신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면……!"
마에스트로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세계의 멸망을 도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은 마에스트로의 정신이 망가질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결국 마에스트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음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를 남기고 싶은 지금은 다르다.
운명의 대척자에게 죽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분했다.
"혹시 살고 싶어?"
"…."
"네가 살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결국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네 운명은 반복될 거고, 난 또 널 막아야 하겠지."
이호연은 마에스트로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설득 대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그 개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줄게. 잠깐이면 될 거야."
"하, 하하… 그렇군요.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어째서 운명에 굴복한 것일까요."
마에스트로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이호연은 손에 있던 스파이럴을 내리꽂았다.
인간의 멸망과 마왕의 강림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의 마지막은 신기할 정도로 허무했다.
"… 쯧."
왠지 뒷맛이 쓰다.
원래의 이호연이었다면 어쩌라고 새끼야. 라며 죽여버렸을 텐데.
운명이라는 말 때문에 감상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이클립스."
허공에 퍼진 마에스트로의 마력을 모아 작은 태양을 만들어 낸다.
이호연은 아무 말 없이 세상에 남은 마에스트로의 흔적을 전부 불태웠다.
미래 예지와 개안, 심 (心)을 동시에 발동한 후유증으로 두통이 있었지만, 아직은 버틸만했다.
"머리는 아픈데… 이 정도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이호연은 고개를 돌렸다.
마에스트로가 죽어도 악마교 소탕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