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2화 > 마인 조직 (3)
게이트와 던전이 생긴 뒤로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괴수들이 튀어나왔고 헌터의 자질을 가진 이가 나타나 괴수들을 사냥했다.
인간을 손짓 한 번으로 찢어버리는 괴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인간은 결국 게이트와 던전에 적응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 던전과 게이트는 사회에 완벽히 녹아들었고, 인간의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마법과 함께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지구에 없던 소재와 이능력들.
세상은 격변을 맞이했다.
하지만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누리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수가 나타나기 전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지옥의 문과 악마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을 때도 일반인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 또 새로운 괴수가 나타났구나.
그게 일반인이 느끼는 지옥의 문에 대한 감정이었다.
태평양을 덮은 어둠은 확실히 비정상적이었고, 이상 현상도 많았지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위기때문에 사회가 마비되지는 않았다.
즉 사회는 아직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학생은 학원에 간다.
아침에 출근한 직장인들은 저녁에 퇴근하고, 주부들은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 중 일부가 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르마 데 마에스트로."
"들어가시오."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들어온 사람들은 녹슨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갈수록 초점을 잃고 멍하니 발을 옮겼다.
"마에스트로님. 집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아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부하를 내보낸 뒤 주변을 살폈다.
피곤한 듯 쳐져 있는 눈과 퀭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
그는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교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신자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 지도 모른 채 집회에 나와 있었다.
악마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마에스트로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악마교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어느새부터 신도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지금 마에스트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생각이구나…."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마왕을 강림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다.
지옥의 문이 열리며 마왕의 강림은 확정되었고, 이 세계는 이미 멸망의 길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기도는 마왕에게 닿지 않았다.
지옥의 문이 열린 뒤에도 똑같았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악마들은 마에스트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옥의 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마왕님의 강림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악마교를 만들었지만, 마에스트로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가져 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행동할 뿐이다.
또각또각.
그때, 다가오는 발소리가 마에스트로의 상념을 깨트렸다.
이곳은 마에스트로의 허락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발소리가 들리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은...."
다가오는 여성을 본 마에스트로는 눈가를 좁혔다.
지옥의 문 근처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만났던 지옥의 생명체.
마왕의 대리인이라고 불리며 악마들을 조종하던 서큐버스 퀸이었다.
"이사벨라 님. 이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네 마음대로 해. 인간."
자연스럽게 걸어온 이사벨라는 마에스트로의 앞에 섰다.
서큐버스 퀸도 눈앞의 인간에게 큰 관심은 없다.
"카르쿠스를 죽인 인간. 알고 있지?"
다만 이 남자가 인간세계를 잘 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사벨라는 아직 이 세상을 잘 몰랐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럴 거 같더라. 그 인간에 대한 정보를 넘겨줘."
그 인간 곁에 있는 릴리아나를 찾아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 마력을 뿌리고 있었지만, 확실한 정보가 있다면 찾아가기 편하겠지.
"… 그것은 마왕님의 명령입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마왕님의 강림에 방해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큭."
이사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렸다.
이 인간의 마왕을 향한 비정상적인 충성은 이사벨라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마왕은 그가 아는 마왕이 아닐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네가 알던 마왕이 아니야."
지옥을 지배하는 마왕.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다른 존재가 되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지만, 이사벨라는 그 이질감을 느꼈다.
이사벨라의 말을 들은 마에스트로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왕은 한 명 뿐이다.
"… 그래도 제가 할 일은 똑같습니다."
마에스트로는 이미 돌아갈 길이 없었다.
*
최강의 결계 마법, 룬의 결계.
룬의 일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룬의 결계는 이론상 무엇이든 가능한 마법이다.
실제로 레베카는 룬의 결계만으로 모든 전투를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공간 장악이나 방어 용도로만 사용했다.
공격 마법은 충분했고, 룬의 결계를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결국 방어였기 때문이다.
콰앙-!
공간참.
남다은의 공간을 베는 검이 룬의 결계를 두드렸다.
"큽…!"
이호연은 깜짝 놀라며 마력을 집중했다.
남다은의 참격은 날카롭고 단단했지만, 카르쿠스의 공격과는 달랐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공간에 간섭하는 검.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막아낼 수 없다.
"애기 아빠.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다은 양 검이 너무 무거웠어."
"그 말이 맞네요. 저도 방어만 하라고 하면 힘들 거 같은데요…!"
정면에 시선을 집중하며 레베카의 말에 대답했다.
블러드 비트와 미래 예지까지 사용한다면 모를까.
마천궁과 룬의 결계만으로는 남다은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호연이 방어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역공을 가한다면 공간참의 틈에 파고들 수 있다.
"그래도 애기 아빠의 결계를 보니까 뭔가 느껴지는 게 생겼어."
"겨우 이 정도로요? 근데 제 결계는 마천궁 때문에 더욱 단단하긴 해요."
"아니야. 결국 근간은 같은걸. 그리고 난 룬의 일족이야. 마천궁이 없다고 해서 애기 아빠보다 결계를 못 쓰는 건 말이 안 되지."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네요. 그럼 전 조금 쉬고 있을게요."
"응. 고마워 애기 아빠. 다은 양! 다시 대련이야!"
"저, 저도 조금 쉬고 싶은데… 아, 스칼렛 씨랑 하는 건 어때요?"
"… 그럴까? 스칼렛 양!"
"잠시, 레베카 님!"
레베카는 몸을 돌려 스칼렛에게 달려들었고, 남다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호연은 남다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됐네. 같이 쉬러 가자."
"응. 호연아."
이호연은 훈련장에서 나오자마자 벤치에 몸을 눕혔다.
틈만 나면 누워있는 게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힘든 걸 어떡해.
"잠깐 마법만 봐주려고 했는데 마천궁까지 써버렸네. 다들 왜 그리 실전을 좋아하는 거야."
약한 두통이 머리를 감싼다.
잠깐 대련을 봐달라고 해서 내려왔다가 마천궁까지 써버렸다.
마천궁을 처음 썼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아직도 두통이 느껴지긴 했다.
"호연아. …땀 닦아줄게."
"클린이 있어서 괜찮아."
"그, 그래…?"
슬쩍 고개를 돌리니 손수건을 잡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남다은이 보였다.
이호연은 그제서야 말을 다시 꺼냈다.
"… 생각해보니 클린을 써도 몸이 뜨거워서 계속 땀이 나긴 해. 미안한데 부탁해도 될까?"
"당연하지…."
결국 남다은의 무릎배게를 받으며 땀을 식히기로 했다.
이마를 쓸어주는 손수건의 감촉이 나쁘지는 않았다.
'… 뭔가 되게 한심한 남자 같네.'
여자친구의 허벅지에 누워 케어를 받는 건 상남자 이호연과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으니 굳이 막지는 않았다.
"호연아. 오늘 오후에는 뭐해?"
"엘리스가 돌아온다고 해서 옆집에 갈 거야. 아이리스 길드에서 할 말이 있대."
"아하…."
"다희랑 놀려고? 요즘 바빠서 미안하네."
"아니야. 다희도 호연이가 악마랑 싸우다가 다쳤다고 하니까 엄청 놀랐거든.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거야. 그래도 이럴 때 호연이랑 둘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
"…."
"나는 엘리스처럼 호연이한테 도움을 못 주니까… 이런 거라도 열심히 해야지."
땀을 닦아주는 남다은의 손길에 애정이 깃든다.
최대한 히로인들에게 시간을 많이 쏟고 있는데도 다들 아쉬워한다.
자는 시간을 좀 더 줄여야 하나.
"다은아. 그런 말 하지 말고 신경 쓰지도 마. 아이리스 길드는 나 때문에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빚을 갚는 거야."
"하지만 빚은 나도 많이 졌는 걸? "
"… 그건 뭐 천천히 갚으면 되고."
남다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꽉 안아주고 싶다.
사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몸으로 보상하라며 덮쳐버리고 싶지만, 같이 사는 남다은과는 오늘 밤에 시간을 내면 된다.
한 번 하면 몇 시간은 해버리는데, 몇 시간이면 괴수를 100마리는 잡는 시간이다.
그리고 굳이 괴수를 잡지 않더라도 해야할 일은 많다.
"다은 양! 스칼렛 양 다음 상대는 너야!"
"저요? 호연아. 잠깐 가볼게."
"응. 편하게 하고 와."
누워서 훈련장을 바라보자, 남다은과 스칼렛이 교대하듯 자리를 바꿨다.
이호연은 땀에 젖은 스칼렛이 다가오는 걸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레베카에게 꽤나 시달렸는 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스칼렛.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호연 님."
스칼렛에게 클린 마법을 써주고 수건을 건넸다.
"레베카 씨가 오늘따라 의욕이 넘치네."
"릴리아나 님과 다은 양의 성장이 생각보다 빨라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레베카 씨도 이 집에서 가장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요."
"하긴. 레베카 씨도 나름 자존심이 있더라고. 릴리아나랑 다희는 위에서 노는 중이지?"
"예. 다희양을 하늘로 띄우는 장난은 안하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음. 근데 스칼렛. 너 왜 계속 서 있어? 내 옆에 앉아."
그녀는 땀을 닦은 뒤에도 이호연의 옆에 서 있었다.
스칼렛은 이호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어릴 적부터 계속 서 있었으니까요."
아이리스 길드의 암살자는 쉴 때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항상 서서 휴식하다 보니 그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다.
"그렇다면야."
앉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이호연은 옆에 서 있는 스칼렛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댔다.
검은 스타킹의 감촉이 볼에 느껴졌다.
부드럽진 않았지만,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 뭐하시는 거죠?"
"앉으면 무릎 배게를 받으려고 했는데 네가 계속 서 있잖아."
"그거랑 제 허벅지에 볼을 대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요?"
"요즘 바빠서 손도 못 잡아줬으니까?"
"손은 원래도 잘 안 잡으셨습니다."
"스읍. 말이 그렇다는 거지. 스킨십이야 스킨십. 싫으면 안 할게."
"싫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휴식이 아니라 스킨십이 목적이면 앉을 테니 자리를 내주시죠."
"좋으면서 그러네."
피식 웃은 이호연은 살짝 엉덩이를 비켰고, 스칼렛은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