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화 > 마인 조직
[이곳은 악마 카르쿠스와 이호연 마법사간의 전투가 일어난 장소입니다. 바닷물에 쓸려나가긴 했어도 전투의 흔적은 여전한데요….]
뉴스 속에서 앵커는 출입 금지된 모래사장의 앞에 서있었다.
악마 카르쿠스와 이호연의 전투가 일어난 미국 서부 연안.
그곳에는 아직도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었다.
카르쿠스의 시체는 사진으로만 공개되었을 뿐 마법사 학회에서 연구하는 중이었고, 새로 나타난 위협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하아…… 뭐 어쩌라는 거야."
카르쿠스와 이호연에 대한 뉴스를 보던 엘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실.
언니인 아이린이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아이리스 길드.
압도적인 정보량과 유능한 인재들을 바탕으로 점점 힘을 키워나간 아이리스 길드는 이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자타공인 세계 1위의 길드가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밤을 지배하는 아이리스 길드장의 존재감이 컸지만, 엘리스가 생각하기엔 다른 이유도 컸다.
길드 내부에서 아이린과 엘리스로 후계자 구도가 나뉘지도 않았고, 한국 지부가 커지며 빅토리아 아카데미와 쉽게 협업했으며, 판데믹의 테러와 지옥의 괴수들에 대한 정보로 전 세계에 입지를 구축했다.
전부 이호연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
[이호연 마법사의 인터뷰에서는 카르쿠스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악마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는데요….]
"그래서 대체 악마가 뭐냐고…."
사람들은 악마라는 새로운 위협에 겁을 먹었다.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엘리스는 두려워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리스 길드의 후계자로서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악마에 대해 조사했다.
카르쿠스와 이호연의 전투 영상을 확인했고, 그 생명체를 '악마'라고 칭하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서, 대체 악마가 뭔데?
엘리스는 답답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호연이 말해준 정보는 있지만 확실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리스 길드는 정보 길드로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순 없었다.
"언니. 새로운 악마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지?"
엘리스는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깔끔한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꼬며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때마침 악마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기에,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서류를 꺼내 엘리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응. 하지만 지옥의 문 주변에서 정체 모를 존재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긴 해."
아이린은 엘리스가 앉아있는 책상에 사진을 늘어놓았다.
몇백 몇 천대의 드론을 보내야 쓸만한 사진 한 두 장이 나오기에 이 사진들은 굉장히 귀중했다.
"… 이게 악마들인가?"
엘리스는 멍하니 사진들을 바라봤다.
머리에 솟은 뿔과 공포감이 드는 외형.
어떤 개체는 날개가 달려있기도 했고, 어떤 개체는 인간이 아니라 동그란 구 처럼 생기기도 했다.
사실 사진만으로는 이게 악마인지 발견되지 않은 괴수인지 알 수가 없다.
악마를 직접 본 안젤라 길드장이 말한 걸 듣긴 했지만….
'맹수를 마주한 초식동물이 된 것 같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존재에 대해 의심이 든다.'
'괴수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뭐 이런 말을 들어봤자 제대로 체감이 되어야 말이지.
이럴 때 이호연이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우리 엘리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아이린은 엘리스를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동생의 표정만 봐도 느껴지는 불쾌함을 공감해줄 수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래. 다 나았으면 프랑스에 와서 우리 일도 좀 도와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길드장 님말이야?"
아이린은 지옥의 문 주변의 사진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아빠 말고 이호연. 내가 연락 많이 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일이 있거나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언니 말대로 우리를 너무 편하게 보고 있어."
"그런가? 으음. 그래도 매일 안부는 묻잖아. 나중에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기도 했고….."
아이린의 마지막 말은 목소리를 줄이며 중얼거렸지만, 바로 옆에 있던 엘리스는 당연히 들을 수 있었다.
"하아아… 으, 으으…."
언니의 저런 모습을 보는 건 머리가 아프다.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약하긴했지만, 길드의 일에서는 똑 부러지던 언니가 어째서 저렇게 된 걸까.
이것도 이호연의 작품인가?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악마의 존재. 대중들은 마법사들의 연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악마교라는 종교가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그 뒤에 마인이 있다는….]
그때 뉴스 앵커가 또 다른 소식을 전해왔다.
조용하던 마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엘리스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 언니. 저 마인들에 대한 정보도 있었지?"
"최근 다시 결집하기 시작한 마인들에 대한 정보라면 3팀장이 보고했던 것 같아. 언니가 찾아볼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줄래?"
이호연이 마인들에 대한 정보는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던 것을, 엘리스는 기억하고 있다.
'네가 공적으로만 연락하면 내가 일을 들고 가면 되겠지.'
마인에 대한 정보가 다가 아니다.
최근 들어 발생하는 이상 현상과 신소재들.
이것도 이호연에게 들려주면 좋아할 거다.
이걸 가지고 한국으로 가서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하냐고 갈구면 표정이 꽤나 볼만하겠지.
아이린과 같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엘리스는 후후 미소를 지었다.
*
인생은 자기 싫은 밤과 자고 싶은 아침의 연속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대로, 오늘도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레베카에게 남편의 능력을 보여주고 가정을 바로 세웠으니 이제 바깥일을 할 시간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이호연은 점심 시간 즈음에 임솔의 연구실로 향했다.
원래 임솔은 미국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만나질 못했다.
"아카데미는 진짜 조용하네."
조용한 아카데미를 걷는 게 이상하게 익숙했다.
요즘은 시끌시끌한 아카데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 대부분의 생도들은 현장에서 괴수들과 싸우고 있겠지.
괴수를 잡는 것 자체가 시험이 되었으니까.
멍하니 발을 옮기며 마도관 2층에 있는 임솔의 연구실에 들어왔다.
임솔은 오늘도 마법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색하며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마침 잘 왔어. 미국에서 못 했던 대련을 하려고 했거든."
"오늘은 카르쿠스의 연구를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실전에서만 얻어지는 연구도 있는 거야."
"그게 무슨…."
그리고 임솔을 만나자마자 대련장으로 끌려갔다.
환자라고 아무리 우겨봐도 임솔은 백아영처럼 봐주지 않았다.
"아니, 솔아. 이제 그만하자…."
"그럼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
대련 자체는 억지로 시작했지만, 다행히 이호연이 퇴원한 지 얼마 안됐다는 걸 감안해 준 모양이다.
곧바로 미래 예지나 개안 심(心)을 쓰기는 힘들었는데, 임솔도 진심을 다하진 않았다.
갑작스러운 대련이 끝나고는 곧바로 복기에 들어갔다.
참으로 임솔다운 진행이었다.
"조금 전에 마력을 흐트러트리는 건 어떻게 쓴 거야? 분명 내 마법이 완성되어 있었는데… 역산이 아니라 아예 사라지는 느낌?"
"얼마 전부터 생각하던 마법이에요. 지옥의 마력은 역산하는 것보다 없애버리는 게 대처하기 쉬울 것 같아서요."
"확실히… 지옥의 마력은 역산하는 게 오래 걸리니까. 나중에 인간형 악마들이 마법을 사용한다면…."
임솔은 혼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재에겐 이 정도만 설명해도 알아서 이해하니까 대화가 참 편했다.
이호연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마법 이름도 정해놨어요."
"정말?"
"네. '이레이저.'라고, 마력을 지우는 거예요."
"이레이저…."
이름을 들은 임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들어본 적 있어. 자기는 멋있다고 생각하는 데 주변에서는 이상하게 보는 거. 중2병이라고 하던가? 빅토리아 아카데미 중등부에서 큰일이라고 하던데."
"…."
"농담이야. 우리 제자가 중2병일 리가 없지."
임솔은 곧바로 웃으며 핫초코를 내밀었지만, 다른 분야면 몰라도 마법으로는 농담을 안 하는 게 임솔이다.
'… 그렇게 구린가?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이호연은 임솔이 준 핫초코를 홀짝거렸다.
다행히 진짜 농담이었는지 바로 다른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카르쿠스의 몸을 연구하는 게 다른 악마를 상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까?"
"당연하죠. 종은 달라도 악마는 지옥의 마력에 특화된 생명체니까요."
"그럼 악마와 괴수랑 다른 점이 뭐야? 카르쿠스는 지능도 거의 없다면서."
"… 혹시 철학적인 질문은 아니죠?"
악마와 지옥의 마력에 관한 토론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사실 악마라는 존재는 이호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게임에서 악마들을 많이 죽여보긴 했지만, 보통 야겜에서 적의 시체를 분석하지는 않으니까.
이호연이 아는 건 그놈들을 편하게 상대하는 방법뿐이다.
'그렇다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도 않은 악마들의 상대법을 알려줄 수도 없고.'
홀짝-
거의 다 마신 핫초코를 입에 털어 넣었다.
달그락거리며 날아온 주전자가 컵에 핫초코를 채워 넣는 걸 보다 보니 임솔의 말이 이어졌다.
"카르쿠스의 심장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지옥의 마력을 몸으로 퍼트리는 방식에 있어서…."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함과 함께 임솔의 말을 듣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몇 시간이나 떠들고 있었다.
스마트 워치를 확인한 이호연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봐야겠네요. 학생회장님하고 만나서 할 얘기가 있거든요."
오늘 일정은 임솔과 문수린이었다.
루시루미 쌍둥이도 만나려고 했는데, 둘은 지옥의 괴수를 사냥하러 외국에 나가 있다고 한다.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 금방 돌아오겠지.
"… 벌써 가려고?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잖아."
임솔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당 보충을 해달라는 거구나.'
하지만 아련한 눈빛을 보내봐도 소용없다.
이제부터 문수린을 만나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야 한다.
수린 누나가 최근 마인들의 동향을 알려준다고 했거든.
조용한 마에스트로가 뭘 하고 있을 지 불안했다.
"교수님. 지금은 카르쿠스 연구에 집중하셔야죠."
"이럴 때만 교수님이야?"
"솔아. 다음에 또 올게. 지금은 할 일이 있잖아."
"후우…. 알겠어. 우리 제자 약속이니까 믿어야지."
임솔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쿠스의 연구는 학회를 뒤집어 놓을 큰 주제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게 무엇인 지는 임솔도 알고 있겠지.
"큭. 진짜 금방 온다니까요."
이호연은 입술을 내미는 임솔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고양이를 다루는 것처럼 턱 아래를 간질이자 질색하며 얼굴을 빼내는데, 그게 또 귀여웠다.
"… 뭐 하는 거야. 기분 나빠."
"반응이 재밌네. 역시 좀만 더 놀다 갈까?"
"그냥 나가!"
임솔이 눈을 찌푸림과 동시에 핫초코를 끓이던 주전자가 하늘로 떠올랐다.
저거에 맞으면 얼마나 뜨거울까.
이호연은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