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1 - 611화. 범인은 이호연이었습니다. (20)
"게임. 게임. 이호연과 단둘이 게임."
내 허벅지에 앉은 릴리아나는 발을 구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참고로 릴리아나가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가 눌려서 다리가 저렸다.
릴리아나의 몸 때문에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이런 불공정한 경기도 없었다.
그리고 약 1시간 뒤.
헤헤 웃던 릴리아나가 볼을 부풀렸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컨트롤러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어이없어. 다시 해. 이건 사기야."
"릴리아나. 1시간이나 지났잖아. 슬슬 다리가 저려."
아무리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해도 1시간이나 앉아있으면 다리가 아프다.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내 허벅지 위에서 쿵쿵 뛰는데 안 아픈 게 이상한 거겠지.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가 다 질 수가 있어!"
"네가 못하니까 그렇지."
"아니야! 반칙했잖아! 내 몸을 막 더듬었어! 마법도 썼지!"
"사람을 변태로 몰아가지 마."
누가 보면 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겠네.
난 한숨을 쉬며 릴리아나에게 대답했다.
"네가 상체로 내 시야를 가려서 그런 거잖아. 나중엔 어쩔 수 없이 마법으로 시야를 확보한 거고."
"그게 치사한 거지! 마법으로 보는 게 어딨어! 내가 몸으로 가렸으면 그냥 안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게임을 어떻게 하라고."
"게다가 중간에 발기하면서 내 집중력까지 흐트러트렸지! 그게 다 전략이었구나! 으으."
릴리아나는 목을 뒤로 튕기며 뒤통수로 이호연의 가슴을 팍팍 때렸다.
이건 다리가 저린 것보다 더 아팠다.
"아니, 발기한 건 미안해. 근데 네가 몸을 비벼대서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응? 아하. 하긴. 서큐버스의 몸을 견디는 건 힘들었겠지. 정상 참작해줄게."
릴리아나는 갑자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까지 화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 이런 또라이 서큐버스가 있나.
"릴리아나. 알겠으니까 이제 내려와. 다리 아프거든."
"게임은 이호연의 반칙패로 내가 이긴 거야. 공식 기록에 남길게. 이제 드라마 보자. 도박장? 이거 재밌어 보이지 않아? 요즘 이게 유행이래."
"…."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마력을 일으켜 릴리아나의 몸을 허벅지에서 살짝 띄웠다.
다리가 아파서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릴리아나의 피부를 직접 느끼다가 아무것도 안 느껴지니까 또 아쉬웠다.
난 마력을 세밀하게 움직였다.
릴리아나의 엉덩이 감촉이 느껴지면서도 허벅지가 저리지 않도록 적절한 힘을 더했다.
"이 정도면 만족."
"뭐가?"
"아니야."
"그럼 도박장 1화 시작했으니까 조용히 해."
겨우 허벅지 위에 앉는 거지만, 그 행위에 얼마나 어려운 마력 술식이 들어갔는 지 이 서큐버스는 모르겠지.
나는 릴리아나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몇 분 정도 집중하던 릴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쟤는 뭣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까부는 거야? 빚 못 갚아서 머리통에 총 맞으면 죽잖아."
"드라마잖아."
드라마의 내용은 평범했다.
도박으로 망한 남자가 다시 도박으로 성공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저런 드라마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난 드라마보다 릴리아나의 가슴을 만지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도 현실이랑 너무 다르잖아! 재미없어. 마법도 안 쓰고."
"일반인들은 그게 현실이야."
게이트가 나오고 헌터가 나오는 세상이라도, 그 비율은 0.1% 미만이다.정확한 수는 몰라도 훨씬 적겠지.
그렇기에 일반인들에겐 마법이나 몬스터는 꽤 먼 세상의 이야기다.
'그래도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판데믹의 테러도 많아졌고, 지옥의 문 때문에 민심도 흉흉하다.
특히 지옥의 괴수들이 습격하는 날엔 그런 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전부 무서움을 알게 되겠지.
… 쯧.
또 기분 나빠지는 생각을 했다.
"재미없엉. 이거 말고 게임이나 할까?
하지만,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내 기분을 환기시켰다.
"또 게임을 하자고? 안 질려?"
"그치만 아무도 없어서 심심하단 말이야. 다은이는 다희랑 데이트하러 갔고, 레베카랑 스카웃은 아래에서 훈련하고 있고."
"알겠어. 그럼 딱 1시간만 더 해. 나도 훈련장에 갈 거거든."
"흥. 대신 나한테 질 때마다 5분 추가야."
1시간이 지나고, 릴리아나는 울면서 부엌으로 도망쳤다.
쟤는 왜 맨날 게임만 하면서 나보다 못하는 거야?
"훈련장이나 내려가야지. 근데 게임은 진 사람이 치우는 게 국룰아닌가? 매너도 한 번 가르쳐야되나."
나는 릴리아나가 널브러뜨려놓고 간 게임기나 리모컨을 마력으로 정리했다.
귀찮긴 했지만, 한 편으로 고마웠다.
그래도 이런 멍청, 아니 순수한 릴리아나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게임하고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매일같이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 가운데에 이런 힐링도 필요한 법이지.
물론 다른 히로인들을 만나는 것도 힐링이지만, 릴리아나를 만날 때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다.
적당히 주변을 정리하고 훈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어느새 우는 걸 멈추고 코코아 한 잔을 타온 릴리아나가 내 옆에 섰다.
"좋아. 내려가자!"
"너 뭐야. 방송하러 간 거 아니었어?"
"오늘 방송은 미녀 게스트 레베카가 도와주기로 했거든. 직접 데리러 가지 뭐!"
릴리아나는 으스대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미녀 게스트?
레베카가 그걸 허락했다니. 대체 얼마나 귀찮게 한 거야.
"반칙패로 내가 이겼으니, 오늘은 너도 방송에 참여해줘야겠어."
"헛소리하지말고 내려가자."
"흥. 서큐버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정신이 나갔구나. 한 번만 용서해줄게."
"… 그래."
"그래도 명심해야 해. 방송할 때 방에 침입해서 미녀 게스트와 3p를 요구한다거나. 화장실에 있을 때 갑자기 들어와서 이상한 걸 요구하면 안 돼."
"…."
저 개소리를 받아줬다간 끝도 없다.
이호연은 주절거리는 릴리아나를 데리고 지하 훈련장으로 향했다.
*
"물론 너 정도면 인간 중에서도 얼굴이 잘생긴 편이잖아. 시청자들도 이해할 거야."
"응응."
"아닌가? 우리 시청자들은 남자들을 싫어하던데. 가끔 남자랑 엮일 때마다 질색하거든."
"… 그냥 레베카 씨랑 열심히 해라."
괜히 릴리아나의 방송에 출연했다가 방송이 망하기라도 하면 또 울면서 매달리겠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으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저번에 어떤 놈이 후원을 환불해달라고…."
귀에 딱지가 생길 것 같다.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방송 연대기를 들으며 지하 훈련장에 도착했다.
한두 번 들은 게 아닌데, 들려줄 때마다 너무 자랑스러워하는 바람에 끊기가 힘들다.
콰앙-
다행히 훈련장에 오자마자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큰 굉음이 들려왔다.
이호연은 내심 안도하며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하아, 하아… 흡, 흐읏…."
"후우."
훈련장 내부엔 거친 숨을 내뱉는 스칼렛이 보였다.
스칼렛과 마주 보고 있는 레베카도 지쳐 보였지만, 스칼렛만큼은 아니었다.
마법사와 암살자의 차이가 아니다.
단순히 스칼렛이 밀리고 있었다.
릴리아나도 그걸 눈치챈 듯 말했다.
"스카웃이 엄청나게 맞고 있네."
"레베카 씨도 강하니까."
"근데 지금 레베카가 쓰는 거 지옥의 마력 아니야?"
"응, 나도 보고 있었어. 이제 좀 익숙해졌나 보네."
완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구색을 갖추었냐고 물어보면, 맞다.
저 정도면 검은 기둥을 부수는 데 무리가 없겠지.
훈련장으로 다가가자, 레베카가 이쪽을 눈치채고 손을 흔들었다.
땀 흘리며 해맑게 미소 짓는 모습에 이호연도 미소로 화답했다.
"애기 아빠! 나 보러 온 거야?"
"그럼요. 근데 전 무시하고 계속 대련하지 그랬어요."
이호연은 지쳐있는 레베카의 붉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다.
확실히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평소보다 매력 있어 보인다.
"아니야. 마침 끝났거든. 뜨겁게 키스라도 할까?"
우-
입술을 내밀며 섹시한 포즈를 취했는데, 옆에 있던 릴리아나가 소리를 높였다.
"레베카. 옆에 내가 있잖아! 인지상정을 지키라고."
"응? 인지상정? 근데 릴리아나도 내려왔구나? 웬일이야?"
"오늘 내 방송에 미녀 게스트로 나오기로 했잖아. 빨리 샤워하고 와. 조금 있으면 방송 켜야 해."
"… 그거 진짜 나가는 거였어?"
레베카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평소처럼 릴리아나의 헛소리를 대충 알았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어떡해.
"에잇. 이미 다 약속해놨어. 빨리 가자!"
"잠시만. 애기 아빠. 도와줘!"
"레베카 씨가 한 번 도와줘요. 얼마나 하고 싶으면 그러겠어요."
"아직 스칼렛 양과 훈련이 남았단 말이야."
"그건 제가 할게요. 레베카 씨는 좀 쉬고 오세요."
"쉬는 게 아니잖아! 애기 아빠. 애기 아빠!"
잘 가요. 레베카 씨.
레베카가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호연은 릴리아나에게 끌려가는 레베카를 보며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오늘 릴리아나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었으니 레베카가 방송을 도와주는 것으로 보답하자.
이호연이 도움을 받았으니 직접 도와주는 게 맞겠지만, 자신이 방송에 나가도 좋은 반응이 올 것 같진 않거든.
이호연은 조용해진 훈련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칼렛?"
스윽-
허공을 보던 스칼렛의 단도가 이호연의 앞을 가른다.
다칠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검풍이 불어오는 게 왠지 섬뜩했다.
"스칼렛. 왜 그래. 괜찮아?"
"… 베어지지 않습니다."
"뭐?"
상태가 안 좋았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일단 내버려 뒀는데, 오늘 보니까 그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꽤 큰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지옥의 마력이 베어지지 않아요."
"지옥의 마력?"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의 고민을 알 수 있었다.
스칼렛은 레베카와 대련이 끝나고 훈련장에 남아있던 지옥의 마력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즘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더니, 그게 고민이었어?"
"… 지옥의 마력을 익히지 못하면 당신을 도와주지 못할 테니까요."
스칼렛은 한숨을 내뱉었다.
같이 훈련한 레베카와 남다은은 지옥의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자신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창피한 말이었지만, 스칼렛은 재능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으음…."
표정을 보니 스칼렛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매일 훈련장에 내려간 이유가 있었구나.
'이렇게까지 부담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스칼렛이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억지로 시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
그녀의 분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스칼렛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음?'
그때, 이호연의 머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