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76화 (576/648)

< 576화 > 밤의 황제 아이작 (4)

어라.

어째서 이런 흐름이 된 거지.

이호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비난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엘리스의 눈에 가득 차 있는 걱정하는 마음이 이호연을 겸연쩍게 만들었다.

'불편해.'

너무 불편하다.

정장까지 입어서 그런가 더 불편하다.

나한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나도 모르는 새에 감정 증폭을 사용했나?

… 그럴 리가 없는데.

"엘리스, 음. 잠시만."

어느새 엘리스는 내 손등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걱정되는 마음인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호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슨 정보를 알아온 거야. 엘리스."

짐작이라기엔 엘리스의 태도가 너무나 확고했다.

그녀는 정보 수집을 위한 출장에서 방금 돌아왔다.

무려 일주일이나 연락을 받지않은 출장.

거기서 이호연과 판데믹에 정보를 얻어온 게 분명했다.

"말해주면 너도 네가 아는 걸 말해줄 거야?"

쩝.

이호연은 손등에 올려져 있는 엘리스의 손을 잡았다.

감을 잡았다면 부정할 순 없다.

"… 말해줄 수 있는 건 모두 말해줄게."

이 세계가 게임이다. 같은 건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판데믹에 대한 정보는 전부 공유할 수 있겠지.

그리고 자신의 목표도 말해줄 수 있다.

"아빠와 함께 간 베이징에서 마에스트로의 비서가 기록한 일기를 찾았어."

"마에스트로의 비서?"

엘리스는 자신이 본 것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에스트로가 이호연을 견제하는 행동. 불길한 검은 성배, 그리고 마에스트로가 이호연을 '운명의 대척자'라고 부른다는 것.

'운명의 대척자…?'

마에스트로가 자신을 신경 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호연인 이 게임의 주인공이고, 판데믹의 계획을 엄청나게 방해했으니까.

근데 운명의 대척자는 뭐야?

'… 마에스트로가 날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다고?'

솔직히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단순히 계획을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운명의 대척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밤의 황제도 운명의 대척자고, 문수린이나 임솔도 운명의 대척자겠지.

마에스트로. 그는 이호연에게 특별한 걸 본 게 분명하다.

"…."

좀 더 고민을 해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엘리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무언가 말해주기 전 까진 손을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엘리스. 네 생각대로 난 판데믹을 꼭 찾아야 해. 네가 항상 말하던 저주, 그 저주를 없애기 위해선 마왕을 죽여야 하거든."

"판데믹이 소환하는 마왕을 죽여야 한다…. 마왕이 이 세계에 강림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겠지?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거고."

"그렇긴 한데, 마왕은 무조건 강림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판데믹의 계획은 성공하고 마왕은 지구에 강림해. 그게 마에스트로가 말하던 '운명'이야."

원작의 스토리가 그렇기 때문은 아니다.

지금 마왕의 몸에는 '이 세계의 신'이 빙의한 상태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마왕은 지구에 강림하겠지.

"… 그럼 어째서 판데믹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거야? 네가 막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까. 혹시나 이렇게 뛰어서 마왕의 힘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이 정도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리고 분명히 얘기했잖아. 난 정의감이 투철하다니까."

엘리스는 이호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 세계가 판데믹의 테러에 고통받고 있을 때도 이권다툼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

그 사이에서 이권을 무시하고 앞장설 사람이 있다면….

"좋아. 호연아. 할 말은 다 했어? 그럼 내가 말 할게."

"음, 사실 더 있긴 한데…. 엘리스 네가 먼저 해도 괜찮아."

"아니. 네가 먼저 해."

엘리스가 오면 이야기해 줄 게 있었다.

바로 루시퍼에 대한 정보.

솔직히 지금 이야기할 분위기가 맞나 싶긴 하지만… 모든 히로인에게 말했으니 엘리스에게도 고백해야 한다.

"… 크흠."

이호연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야. 그, 던전에 대한 것도 있고."

*

이호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스는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알고 있어?"

"루시퍼와 같이 싸운 사람들에게만 말했어."

"일반인들은 모른다는 거네. 하긴, 나도 들어본 적 없으니 당연하겠지."

엘리스는 내심 놀랐다.

이호연이 그런 던전을 계획했다가 철회한 것도.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사실을 고백한 것도.

평소 보이던 이호연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 응. 엘리스 넌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따를게."

이호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걸로 엘리스가 만족한다면, 쌓아온 것을 버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천재 마법사라는 이미지가 아깝긴 해도 엘리스와 바꿀 순 없다.

"아니. 그럴 순 없어. 넌 천재 마법사 이호연이잖아. 아이리스 길드에 데릴사위로 올 때 그런 오점이 있으면 불편하거든."

"데릴사위…."

"게다가 반성하고 없애려고 했다면서. 루시퍼가 나쁜 놈이네. 넌 잘못 없어."

"…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더 양심에 찔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차라리 욕해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반응하면 나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성했으니 괜찮다. 혹은 가짜 던전을 만든 것 자체가 잘못이다.

뭐가 맞는지는 이호연도 모른다.

이호연이 히로인들에게 가짜 던전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

마음에 남은 감정을 털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호연. 아니, 호연아. 넌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해."

"… 정의의 사도?"

갑자기 무슨 소리지?

반장난으로 정의의 사도라는 말을 자주 쓰긴 하는데, 저게 엘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어색했다.

"판데믹의 테러 때문에 전 세계가 피해를 호소하고 있어. 개발도상국은 정부가 마비되었고, 강대국이라고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지."

"응."

"그 와중에도 기득권들은 각자의 이득만 챙기고 있거든. 아무리 대중들이 멍청해도 테러나 마인의 위험은 숨길 수 없는데도 말이야. 실제 자신들의 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불만이 엄청나게 많을 거야. 그때 영웅처럼 네가 나타나는 거지. 공익을 위해 싸우는 꿈 꾸는 천재 마법사 이호연. 그림이 좋잖아."

"… 갑자기? 그리고 그런 게 돼?"

방금까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던 자리 아니었나?

"걱정 마. 언론작업은 아이리스 길드에서 다 처리할 거야. 아이리스 길드의 힘은 전 세계에 퍼져있거든."

엘리스 혼자 말하는데도 대화가 진행된다.

아니, 이미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 같다.

"영웅이 된 상태로 아이리스 길드에 데릴사위로 오면, 아이리스 길드가 세계 최고의 길드 자리라는 걸 전 세계에 각인할 수 있을 거야."

"잠시만. 엘리스. 왜 그게 확정적인 것처럼 말하는 거야."

"아이리스 길드의 도움을 받으러 온 거잖아. 아니야?"

"맞긴한데…."

이호연은 잠시 고민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도움을 받고, 자신이 판데믹 척결과 검은 기둥에 대한 연구를 앞장선다.

'… 그대로 아니야?'

어차피 판데믹은 자신이 막아야 하고, 검은 기둥에 대한 연구도 앞장설 생각이었다.

물론 데릴사위는 조금 힘들긴 하지만.

"알겠어. 엘리스. 네 말대로 할게. 내 이름을 마음대로 팔아먹어."

"대신 너도 그만큼 열정적으로 나선다는 가정 하에 말하는 거야. 그렇게 할 거지?"

"당연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그럼 바로 검은 기둥에 대한 연구를 도와주는 거야?"

"길드장 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부탁할 거야."

아버지를 보며 이를 악 물고 애교를 한 번 하기만 하면 된다.

엘리스는 이호연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검은 기둥을 중심으로 판데믹의 계략을 밝혀내는 데에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판데믹의 테러를 막아내는 얼굴은 이호연이 맡는다.

그리고 아이리스 길드는 그의 뒤에서 이권을 챙긴다.

결국 아이리스 길드가 다른 기득권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거지만, 위선도 선이다.

이호연을 앞장세우는 게 아이리스 길드였으니 이 정도 이득은 챙겨야지.

전 세계에 보내는 공문과 증거 자료. 그것도 다 돈이다.

'… 나쁘지 않은 거래네.'

엘리스는 잠시 넘겨뒀던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루시퍼.

루시퍼의 던전을 그가 설계했다는 건 솔직히 조금 놀랐다.

미친 바람둥이인 건 알았어도 그 정도로 미친 놈인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뭔가 달라졌단 말이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호연의 옆에서 그를 지켜보면 무언가 보일 것 같았다.

"하아… 힘드네. 그 말을 들으려고 일주일이나 기다렸어.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겠다."

이호연은 생각에 빠진 엘리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이제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도 받았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연구를 이어가면 된다.

"무슨 소리야. 돌아가다니?"

엘리스가 이호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나도 최대한 힘을 써야지."

"일주일 묵고 가야지."

"어?"

"일주일 우리 집에서 묵고 가기. 잊어버리진 않았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지금 쓰겠다고?"

"문제라도 있어?"

기억은 하고 있다.

근데 그걸 왜 지금 써.

"하지만 지금은 좀… 음, 너도 알다시피 판데믹에 관련된 일을 처리해야 하거든. 한국에 가서 할 일이 엄청 많아서…."

"뭘 해야 하는데? 전면적으로 도와준다니까. 넌 우리 집에서 쉬기만 해."

"빅토리아 아카데미를…."

"무기한 휴교잖아. 애초에 넌 영웅 취급이니까 더 쉬어도 될 거고. 협력 요청은 아이리스 길드가 전 세계에 공문을 보낼 거니까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돼."

… 반박할 수가 없네.

자신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보단 엘리스가 훨씬 빠를 거다.

"그, 맞아. 길드장 님도 계시잖아."

"아빠는 괜찮아. 내가 설득하면 되거든."

"… 으음."

무슨 말을 해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국에 가서 히로인들 얼굴을 봐야 하는데.

곤란하다는 이호연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자마자, 엘리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거절할 거야? 그럼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

후계자 수업을 받고 성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 성숙해진 게 맞나? 우리 엘리스가 더 똑똑해진 것 같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네.'

어쩔 수 없다.

아이리스 길드의 협력을 받았으니 일주일 정도는 더 써도 되겠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리스랑 같이 있는거다.

이호연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야. 아이리스 길드에서 일주일만 더 신세 질게."

"걱정하지 마. 우리 가족이 지내는 숙소로 대접할 테니까."

"그러다 길드장 님한테 죽을 거 같은데."

장인어른과 오랜만에 만나는데 칼을 맞고 싶진 않다.

'… 뭐 어떻게든 되겠지. 다들 어른이야.'

사실 이런 게 처음은 아니다.

저번에도 프랑스에 온 적이 있고, 방학 때 마법사 학회에 간 적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검은 기둥을 처리해야 하니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히로인들도 이해해 주겠지.

'생각해 보면 케이론한테 기억의 구슬을 받아야 하기도 하고.'

마법 연구에 빠져있다 보니 상황 전달을 못 받았다.

내일은 꼭 찾아가 봐야지.

"다 정해졌으니까 나는 먼저 갈게."

"자러 가는 거야?"

"아니, 급한 공문은 먼저 보내야지. 그래야 내일부터 곧바로 조사에 들어갈 거 아니야."

"괜찮겠어?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엘리스는 그 말만 남기고 하품을 하면서 응접실을 나갔다.

확실히, 이호연의 컨디션도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당장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엘리스보단 나았을 텐데.

그녀는 아이리스 길드 후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택했다.

"역시 능력 있는 여자가 멋있긴 해."

꼬르륵-

집중력을 풀자마자 배가 고파온다.

며칠간 굶고 먹은 거라곤 스칼렛이 챙겨준 초코바와 우유 밖에 없었다.

엘리스의 말대로 이호연도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 나도 뭐라도 먹으러 가야겠다."

이호연은 손가락을 튕겨 응접실을 정리한 뒤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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