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75화 (575/648)

< 575화 > 밤의 황제 아이작 (3)

"생각보다 앉을 때가 불편하구나. 마법사 학회에서 입던 건 이것보다 더 편했었는데. 맞춤이 아니라 그런가? 어으. 불편해."

이호연은 정장의 깃을 당기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더니. 멋진 옷은 몸이 불편하다.

나 같은 사람은 운동복이나 입어야지. 쩝.

홀짝-

이호연은 아이린이 대접해 준 커피를 홀짝이며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엘리스와 길드장이 돌아왔다길래 정장을 입고 달려왔는데, 자신을 맞이한 건 죽은 눈의 아이린이었다.

'… 아이린 씨. 괜찮아요? 낯빛이 안 좋은데."

'신경 쓰지 마. … 난 길드장 님하고 할 말이 있어서 가볼게. 기다리면 엘리스가 올 거야.'

비틀거리며 응접실 바깥으로 나가던 아이린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분명히 기분 나빠보였는데… 길드장 님이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런 걸까?

"하긴. 연락도 없이 일주일 넘게 잠수 타버리면 화날만하지. 그 아저씨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딸바보 캐릭터면 딸한테 연락 한 통 정도는 줄 만 했잖아.

덕분에 이호연도 프랑스에서 일주일이나 살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카데미의 휴교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일까.

사망자가 없어서 사람들의 회복은 빠를지 몰라도 건물과 시설에 피해가 많았던 모양이다.

'내가 만들 때는 괜찮았는데.'

루시퍼가 마법진을 빼앗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건 지, 아니면 그 이후에 생긴 건 지는 잘 모른다.

확실한 건 루시퍼와 엮여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기억의 구슬은 잘 되고 있는 건가."

저번에 케이론을 봤을 때는 영 힘들다고 하던데.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건가 보다.

띡. 띡. 띡. 띡.

조용한 응접실 내부에 벽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엘리스가 오면 해줄 이야기가 참 많은데. 생각보다 늦네.

'일단은 검은 기둥에 대한 걸 먼저 말해야겠지.'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내 요구사항을 먼저 말한 뒤 아이리스 길드에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게 받아들이기 쉽겠지.

똑똑.

[들어가도 돼?]

"응. 들어와. 엘리스."

때마침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날 오래 기다렸다고 하던데."

찰랑거리는 금발과 눈같이 새하얀 피부.

오랜만에 보는 엘리스는 왠지 전보다 성숙해 보였다.

다만 눈을 거의 반 정도 감고 있는 상태라는 게 문제다.

"아니야. 여기서 할 일도 좀 있었거든."

"응. 대충은 들었어. 나랑 길드장 님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맞은 편에 앉은 엘리스는 딱 보기에도 피곤해 보였다.

클린 마법을 사용한 것 같은데, 습기가 조금 남아있는 걸 보면 방금 씻고 온 모양이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난 내일 봐도 돼. 시간은 많거든."

"됐어. 지금 처리하는 게 마음이 편해. …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리스는 엄청나게 피곤한 상태였다.

아이작과 함께 베이징에 침투한 뒤로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까.

그러다 보니 응접실에 들어온 뒤에도 제대로 이호연의 모습을 눈에 담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뒤에 확인한 이호연의 모습은 꽤나 눈길이 갔다.

'… 정장? 이런 걸 입는 건 처음 보는데.'

꽤 잘 어울리네.

저런 것까지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걸 보면 가끔씩 내 취향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엘리스. 엘리스?"

"아, 안. 아니. 응. 미안. 피곤하긴 한 모양이네."

엘리스는 멍하니 이호연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피로가 싹 사라진 걸 깨달았다.

그래. 이호연의 앞에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지. 이호연도 자신을 보기 위해 차려입은 것 같으니까.

"후우… 일단 대충 자료를 훑어보긴 했는데, 네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얘기해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이호연은 엘리스의 말투에 내심 놀랐다.

태도가 좀 부드러워졌네.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더니 진짜 어른이 된 건가? 아니면 지금은 공적인 위치에서 자신을 대한다는 걸까.

아무튼 도움을 받으러 온 입장이니, 이호연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

엘리스는 외모에 자신이 있었지만, 오늘 이호연의 정장 차림을 보니 그 마음이 조금 꺾였다.

생도복도 잘 어울렸는데, 정장 차림을 보니 저 남자에게 조금 더 빠질 것만 같다.

'피곤하니까 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엘리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정면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호연이 있었다.

"미안. 피곤해서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지옥의 마력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검은 기둥과 관련이 있다는 거지? 그 검은 기둥을 조사하기 위해 아이리스 길드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날 찾아온 거고."

"맞아. 갑작스럽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었어."

"'지옥의 마력'은 어떻게 증명하는 건데? 검은 기둥은 판데믹하고 관련이 있다고 했잖아. 증거는 확실한 거지? 너도 알겠지만 판데믹과 검은 기둥의 연관성은 이미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조사를 끝낸 거야."

엘리스의 말대로, 판데믹과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다.

처음에는 판데믹이 설치했다는 게 정설이었지만, 조사가 이어질수록 연관성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때마침 그 당시 판데믹이 와해되던 시기였으니까.

검은 기둥은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정체불명의 구조물'.

던전이나 마력처럼 이 세상에 있는 이상현상 중 하나라고 판명 났다.

하지만 이호연은 증거를 만들어냈다.

"지옥의 마력은 아이리스 길드에 넘긴 루시퍼의 시체를 확인해 보면 될 거야. 지옥에서 온 루시퍼와 검은 기둥은 똑같은 마력을 내뿜고 있어."

이호연은 루시퍼의 시체를 넘기기 전, 지옥의 마력을 듬뿍 담았다.

자신이 뛰어다니면서 지옥의 마력을 증명하는 것보다 루시퍼의 시체에서 나왔다는 게 설득력도 높고 의심당하지도 않을 테니까.

"으음… 네 말이 맞다면 앞뒤는 맞겠네."

"응. 도와줄 수 있을까?"

판데믹과 검은 기둥.

둘 다 지옥의 마력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해도, 그게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순 없다.

판데믹의 루시퍼와 수상한 검은 기둥. 둘 다 생소한 '지옥의 마력'이라는 걸 사용한다.

두 개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지만, 직접적인 물증이 없으니 100%는 아니다.

판데믹의 마인들이 검은 기둥을 심으러 다닌 건 아니니까.

즉 마음만 먹으면 아이리스 길드가 거절할 명분이 될 수 있다.

"길드장 님하고 직접 조사해 봐야겠네. 최종 결정은 길드장 님이 할 테니까."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 어… 그래도 거기서 생기는 권리나 이득은 전부 아이리스 길드에 넘길게. 장담하는데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보수도 필요하다면 최대한 챙겨줄게."

물론 엘리스의 마사지를 하며 받은 돈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이호연이 개인적으로 모은 돈도 굉장히 많았다.

남다은의 복수를 도와주며 바이어 길드를 탈탈 털기도 했고, 원작의 정보를 이용해 틈틈이 돈을 불렸으니까.

"돈은 괜찮아.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당연하지. 궁금한 건 최대한 다 답변해 줄게."

"넌 왜 그렇게 판데믹에 신경 쓰는 거야?"

"응?"

"네가 이상한 남자인 건 알고 있어. 천 년에 한 번 태어날 마법사라고 불리는 천재면서 변태인 것도 알고, 성격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여자에 미친 것도 알아."

"…."

갑자기 왜 그래.

아직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잖아.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예전에 네 뒷조사를 꽤 열심히 했었거든."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 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도 했었잖아."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엘리스의 마사지사가 될 때부터. 아니 그녀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아이리스 길드의 딸이기에 내 뒷조사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스칼렛도 파견했을 거고.

"응. 하지만 네 생각보다 더욱 신중하고 세밀하게 조사했어."

"…."

"네가 판데믹에 그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궁금했거든. 직접 물어봐도 알려주질 않으니 내가 조사할 수밖에 없잖아."

이호연은 엘리스의 질문에도 항상 말을 돌리며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게 '저주' 때문이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우연히 판데믹의 테러에 몇 번 휘말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원한을 품을 성격은 아닐 거야. 정의감이 투철한 건 더더욱 아니겠지."

"정의감이 투철한 걸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언제나 정의를 추구해."

"네가? 큭. 차라리 아이리스 길드의 조사가 틀렸다는 말을 하지 그래."

그 웃음은 뭐야. 엘리스.

천재 마법사 이호연과 적대하고 싶은 거냐.

이호연이 서운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엘리스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네 출생을 의심했어. 혹시나 판데믹이 …부모님의 원수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어."

이 세상에서 이호연은 부모님의 기억이 없는 천애고아였다.

판데믹의 복수를 할 명분 따위 없다.

"사실,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 특별히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눈앞에서 테러가 일어나면 막을 거고, 당연히 판데믹을 싫어할 거야. … 하지만."

엘리스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화가 났다.

"… 하지만 너무 이상하잖아. 넌 판데믹이 지옥의 마왕을 소환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지?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모르는 정보를 말이야."

적대감을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호연. 그는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

"나보다 많은 정보를 알았으면서, 항상 판데믹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어. 게다가 얼마 전에 나타난 루시퍼의 목표는 처음부터 너였지."

엘리스가 예상하던 건 어디까지나 이호연에게 특수한 '저주'가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해제할 열쇠가 판데믹에 있다는 정도.

하지만 아이작과 다니며 얻은 정보는 조금 더 복잡했다.

판데믹의 보스인 마에스트로.

그는 이호연을 '운명의 대척자'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구에 지옥을 강림시킨다는 판데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호연이라고 했다.

이호연이 판데믹을 의식하는 것처럼, 판데믹도 이호연을 의식했다.

그렇다면 이호연에게도 숨기는 게 있을 거다.

엘리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호연. 네가 판데믹과 대체 무슨 관계인지, 이제 네 입으로 들어야겠어."

눈앞의 남자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중요한 사실을 놓쳤기 때문일까.

항상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호연의 속마음을 전혀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위협하는 판데믹이 짜증나기 때문일까.

엘리스는 가슴을 채우는 짜증을 잠재웠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후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엘리스는 이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 대체 어떤 일을 겪고 있는 거야. 말해줘."

그리고, 떨리는 이호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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