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54화 (554/648)

< 554화 > 동아리 방 (3)

"얘들아. 이거 봐봐. 언니의 패가 어때?"

"릴리아나 씨 대단해요…."

"루미. 다음엔 이거 하자. 별들의 전쟁이래. 릴리아나 언니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이호연. 이번엔 나랑 팀해!"

예쁜 소녀 세 명이 도손도손 앉아 카드게임을 하는 모습은 꽤나 보기 좋은 광경이다.

그 사이에 끼는 건 남자라면 당연히 환영하는 일이겠지.

하지만, 재밌는 것도 한두 시간이다. 벌써 5시간 넘게 게임에 열중하는 루시 루미 쌍둥이와 릴리아나를 보며 이호연은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 얘들아. 기숙사는 안 갈 거야?"

잘 노는 모습은 좋다. 하지만 기껏 문수린에게 부탁해서 기자들도 다 내쫓았는데 게임만 하고 있잖아.

동아리방 창문 너머로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게 보인다.

이러다가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겠네.

"뭐야. 왜 네 마음대로 끝내는 분위기를 만드는 건데. 앙?"

"릴리아나. 난 네가 오기 전에도 계속 있었다니까."

이호연은 불량배처럼 자신의 가슴을 톡톡 건드리는 릴리아나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신나할 줄 알았으면 오지말라고 할 걸.

"아…. 호연 씨. 피곤하세요? 호연 씨가 피곤하다면 그만해도 괜찮아요."

가짜 던전에서 탈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얘들은 지치지도 않는 건가?

루미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이호연도 휴식이 필요했다.

"으음. 솔직히 약간 피곤하긴 해."

"루미. 나도 힘들어. 이제 누워서 쉴래."

"루시 까지 그렇다면 알겠어…. 이제 쉬자."

"어으, 몇 시간이나 한 거람. 하으으."

루시도 이호연의 말과 동시에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동생인 루미가 즐거워 보여서 루시도 힘내고 있었지만, 그녀도 한계였다.

나이스. 루시.

루시의 지원사격에 이호연은 내심 안심했다.

"엥? 그럼 이제 해산이야? 나는 방금 왔는데!"

"아니, 네가 온 지도 두 시간 넘게 지났거든. 이제 좀 쉬자. 너도 같이 루시퍼랑 싸웠잖아. 안 피곤해?"

"그치만 재밌는 걸. 이호연 너 어차피 할 것도 없을 텐데 여기서 나랑 같이 쉬어. 보드 게임은 그만해도 되니까."

"… 그것도 좋긴 한데, 내일도 돌아다녀야해. 오늘은 집에서 정리할 게 좀 있어."

생각 외로 시간을 너무 써버려서 오늘 임솔 교수님에게 가긴 글렀다.

동아리방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내일 일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호연이 너는 안 피곤해? 내일 어디 가는데?"

루시는 사용한 카드를 정리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호연은 던전에서 탈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돌아다니려는 걸까.

"임솔 교수님 보러 가려고. 너희들도 들었지? 연구실에 같이 오라고 했었잖아. 내가 가서 물어볼게."

"아하. 그런 거 라면 어쩔 수 없지."

임솔과 함께 마법을 사용했던 그 기억은 루시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게다가 이호연과 함께 방문이라니. 무언가 엄청난 상이라도 주시려는 게 아닐까.

루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너 먼저 가. 나는 더 놀래."

릴리아나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의자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얼마 만에 나온 나들이인데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야. 누구 맘대로 더 놀아. 루시랑 루미도 쉬어야지."

"저는 괜찮아요. 호연 씨."

"나는 누워있고 싶어. 릴리아나 언니. 그래도 괜찮으면 있으세요."

"야호! 얘들아. 그럼 언니도 이 동아리에 들어와도 돼?"

"릴리아나 씨도…? 하지만 릴리아나 씨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생도가 아닌걸요…."

"괜찮아, 루미. 명예회원으로 올리면 되거든."

"명예회원? 국회의원 같은 거야?"

이호연은 잡담을 나누는 셋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쌍둥이들과 놀 때는 확실히 잔잔한 매력이 있다.

릴리아나도 기대 이상으로 잘 노는 걸 보니 다행이네.

"그럼 난 갈게. 사고 치지 말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나만큼 자제력이 뛰어난 서큐버스는 얼마 없거든."

"잘 가, 이호연. 재밌었어!"

"호연 씨. 다음에 봐요…!"

흐흐 웃는 릴리아나를 보니 약간 걱정되긴 하지만… 이상한 일은 없겠지.

혹여나 쌍둥이들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곧바로 찾아오면 된다.

이호연은 인사를 건네며 동아리방을 나왔다.

"… 갑자기 힘드네."

동아리방에서 나오자마자 힘이 쭉 빠진다.

가짜 던전에서 탈출하자마자 몇 시간 강행군을 달렸으니 피곤할 수밖에.

여기서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해진다.

"빨리 가서 쉬어야지. 임솔 교수님하고 아영 씨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 지도 생각하고. 음…."

아카데미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다들 휴식을 취하거나 치료를 받고 있겠지.

생각해보면 루시퍼와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자신의 치유력이 아무리 괴물 같다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자야 할 것 같다.

이호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집으로 향했다.

*

"으헤헤. 이리 와."

이호연이 사라진 동아리방.

주인이 없어지고 이제서야 자유를 느낀 서큐버스는 자신의 욕망을 마구 표출했다….

"릴리아나 씨…."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언니."

루시는 몇 시간에 걸친 게임이 피곤했는지 침대에 누워있었고, 릴리아나와 루미는 아직도 테이블에 앉은 채였다.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내 차례는 안 할 거야. 자, 호연이도 없으니까 한 번만 해봐."

귓가에 속삭이듯 다가오는 서큐버스의 속삭임.

자신을 안기 직전인 릴리아나를 보며, 루미는 조용히 대답했다.

"…… 릴리아나 언니."

"후후. 잘했엉."

쓰담쓰담.

릴리아나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는 루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귀여운 아이들에게 까지 이호연의 마수가 미쳤다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그녀도 서큐버스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아이 같은 루시와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스러운 루미.

이 쌍둥이들의 순수한 매력을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혹시라도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언니에게 말하렴."

"릴리아나 언니. 루미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 언니인 제 역할이니까 빼앗지 말아 주세요."

침대에 누워있던 루시는 스트레칭을 하며 테이블로 돌아왔다.

더 누워있다가는 자신의 동생을 빼앗길 것 같았다.

"으음… 릴리아나 씨. 저 사실 고민이 있어요."

"응응. 얼마든지 말해봐. 언니가 해결해줄게."

"호연 씨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호연?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말 안 해줄 것 같진 않은데."

"아… 으. 그렇지만 막상 들으려고 하니까 약간 긴장되기도 하고…. 듣고 싶지만 듣기 싫기도 하고…."

"…?"

이게 무슨 소리래.

루미의 듣고 싶지만 듣기 싫은 애매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릴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떠올렸다.

'맞아. 기억났어.'

목걸이로 변해서 이호연을 따라다니던 때.

펠릭스인가 뭔가 하던 잡 마인에게 유혹당했던 답답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저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떠올랐다.

그게 루시와 루미 쌍둥이었다.

'근데 이호연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뭐지? … 앗!'

겨우 몇 시간 전에 들었던 충격적인 말!

이호연이 아카데미를 덮쳤던 마법진의 설계자라는 고백이었다.

최근에 끙끙 앓기도 했으니 분명 그게 맞겠지.

'이 둘한테는 말 안 했나보넹.'

릴리아나는 이왕 말했다면 공평하게 모두에게 말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지만…

이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충격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숨기는 게 좋을 수도.

게다가 이호연의 의사는 웬만하면 존중하고 싶었다.

그는 처음 생긴 자신의 주인님이었으니까.

'어쩌면 상처받기 싫은 것일지도 몰라.'

이렇게 순수한 아이들이기에 마음이 약할 수도 있는 법.

릴리아나는 펠릭스가 나타났을 때 보았던 둘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호연에게 말을 듣고 싶은데 듣기 무서운 거구나?"

"네…. 제가 실망하는 것도 무섭고 호연 씨가 제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것도 무서워요… 으으…."

"으음…."

서큐버스의 감각이 울부짖고 있다.

릴리아나는 관심 없는 척 이 쪽을 슬쩍 흘기는 루시와 움찔거리는 루미의 움직임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호연이 집에서 보이던 이상한 모습을 이 둘에게도 보였는데, 정작 둘에게 사실을 말하진 않아서 이런 고민이 생긴 것이다.

마음 같아선 무언가 멋있는 말을 해서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릴리아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나는 어려운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의외로 별 거 아닐지도 몰라. 원래 이호연은 이상한 거로 고민하잖아. 음음."

릴리아나는 최대한 말을 돌리며 이호연을 변호했다.

솔직히, 릴리아나는 이호연의 잘못을 딱히 못 느끼고 있었다.

이호연의 말에 따르면 아카데미를 덮었던 마법진은 곧 해체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마지막 순간에 죄책감을 느꼈대나 뭐래나. 그것을 직전에 루시퍼가 강탈한 것이다.

물론 이호연은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나쁜 놈은 루시퍼가 아닌가?

"그래도 너희는 이호연을 좋아하잖아. 그치?"

"네. 저는 호연 씨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 나도 그래. 이호연이 없으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이호연이 이상한 놈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니까!"

릴리아나는 어느새 루미의 옆에서 루미를 보듬어주는 루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주인님에게 푹 빠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저 귀여운 애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니 부럽기도 했다.

'이호연이 잘해줘야 할 텐뎅. 에잉.'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여자를 늘릴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아니, 이미 양심은 없구나. 앗. 이리 와. 언니가 안아줄게. 흑흑."

"고마워요. 릴리아나 언니."

"릴리아나 씨… 감사해요. 같이 고민을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힘이 나요."

"응? 아니, 뭘. 헤헤."

릴리아나는 루시와 루미를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헤헤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또 해낸 모양이다.

너무 잘난 것도 탈이네.

*

"끄흐으. 오늘 모두를 만나고 싶었는데. 아쉽네."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래도 오늘 히로인들과 대화하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쩝. 아니야. 어차피 다들 쉴 시간이 필요하겠지."

첫 날부터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다들 피곤할 텐데 루시퍼와 전투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들이닥치면 그것도 부담스럽겠지.

"내일은 임솔 교수님 하고… 아영 씨한테 가면 되겠네. 엘리스도 보러 가긴 해야 하는데…."

아영 씨는 여러모로 바쁠 테고, 임솔 교수 님은 뭘 하고 있으려나.

엘리스랑 아이린도 가보긴 해야 하는데 연락을 안 받으니 언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똑똑똑.

"응. 들어와."

안의 사람을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저것만으로도 문 앞의 사람이 누군 지 알 수 있다.

"호연아. 차 가져왔어."

"고마워. 다은아."

이호연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남다은이 준 차를 받았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방에 들어온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 힘이 없어 보이네."

위로해주러 온 거구나.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남다은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고마워. 다희는 자?"

"안전한 곳에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많이 놀란 것 같아."

"다행이네."

다희도 마법진을 구상할 때 안전한 곳으로 빼놨다.

그래도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네.

홀짝-.

'이건 무슨 차지….'

집에 워낙 이상한 게 많다 보니 뭘 마시는지도 모르겠다.

이호연은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을 깬 것은 남다은이었다.

"으음… 무슨 말을 해야 호연이 기분이 나아질지 모르겠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돼. 노력은 내가 해야지."

"그, 그래도 호연이는 마법진을 없앨 생각이었던 거잖아. 그걸 루시퍼가 강탈한 거고… 나는 호연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이런 데에 재능이 없나 봐."

남다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름 이호연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아서 우울함이 느껴졌다.

"아니야. 그래도 위로해주러 와서 고마워. 다은아."

남다은의 말대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이제부터 잘한다고 해도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호, 호연아."

"응?"

이호연은 무언가 마음먹은 듯 자신에게 다가온 남다은을 바라봤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남다은은, 이호연과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사… 사랑해요. 주인님…."

"…."

시간이 멈췄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남다은의 애교에 이호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은아. 괜찮아?"

혹시 뭘 잘못 먹은 건 아닐까.

이호연은 걱정스럽게 남다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어, 어라. 이게 아닌가. 예전에 릴리아나 씨가 호연이의 기분을 풀어주는 비기라고 얘기했었는데…."

이호연의 반응이 불안했는지, 남다은은 조심스럽게 이호연을 올려다봤다.

릴리아나.

그 이름만 들어도 이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호연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으려 했지만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불안한 듯 고개를 돌리는 남다은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큭… 아, 도저히 못 참겠어. 푸흐."

"왜, 왜 웃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웃음을 참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몸을 채우던 긴장이 확 털어져 나간 기분이다.

이호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남다은의 어깨를 꼬옥 안아줬다.

"아니야. 정말 고마워. 힘이 났어."

"… 정말?"

"응. 다은이 덕분이야. 이제 힘내 볼게."

"다행이다…."

휴우.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남다은을 보며 이호연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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