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3화 > 동아리 방 (2)
"그나저나 동아리 방에서 기자들이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이호연은 동아리 방구석에 있는 침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동아리 방의 침대는 셋이 누워도 될 정도로 컸다.
하지만 아무리 큰 침대라도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불편하겠지. 잠은 잘 수 있더라도 여러모로 생활이 불편할 테니까.
"어쩔 수 없어요…. 기자님들이 기숙사 앞에서 며칠 밤을 새울 기세였거든요."
"흥. 아카데미에 마음대로 들어왔는데 왜 안 쫓아내는 거야!"
"… 그것도 그렇네."
듣다보니 화가 난다.
아카데미가 일을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도 입장에서 들어보니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기자들이 아카데미 내부에서 진을 치고 있다니. 아무리 특종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심하다.
게임의 스토리가 굴러가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방어 체계와 운영 방식이 개판이어야 하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수린이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개판인 이유는 대체 뭐지?
'뭐긴 뭐야. 아래부터 제대로 썩어있으니까 그렇겠지.'
문수린의 몸은 하나다.
신이 아닌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아카데미 전체의 문제를 살필 순 없겠지.
학생회의 선배들은 전부 착한 사람들이니, 그 아래에서 개판을 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쩝.
침을 삼킨 이호연은 스마트위치를 켰다.
"… 잠시만 기다려봐. 내가 수린 누나한테 부탁해볼게."
문수린에게 일을 더 맡기는 게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이런 일을 해결하는 건 문수린이 최고다.
이호연은 동아리방의 구석에서 문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 띠-
[여보세요? 호연아. 무슨 일이야?]
이호연은 쌍둥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스마트워치의 소리를 줄였다.
"응. 수린 누나. 사실 부탁할 게 있는데… 문자로 하기엔 좀 복잡해서요."
사실 복잡한 건 둘째치고 이런 부탁을 문자로 하는 건 미안해서 전화를 걸었다.
쌍둥이들이 기자들 때문에 기숙사에 못 들어가고 있다는 이호연의 말을 들은 문수린은 약간 신음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타다닥- 타다다다닥.]
스마트 워치 너머로 들려오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 것 같아서 왠지 두렵다.
[그 일은 걱정하지 마. 보안팀을 갈구, 아니 지원을 요청했으니까.]
"고마워. 수린아."
결국 보안팀은 갈궈지는구나. 하긴, 나 때문에 욕먹는 건 미안하지만 이건 그들의 잘못이다.
이호연은 잠시 안부를 물은 뒤 문수린과 통화를 종료했다.
"루시와 루미와 관련 있는 부탁이라 조금 미안했는데 흔쾌히 받아주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루시와 루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기자들은 학생회장 님이 해결해준대."
"…그럼 기숙사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우와. 언제 쯤 갈 수 있는건데? 혹시 알아?"
"아마 늦어도 저녁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까?"
"호연 씨…! 대단해요!"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좋네.
"그전까지 같이 시간 때우기라도 할까."
"그럼 같이 보드 게임하자!"
"… 보드게임이 그렇게 좋아?"
해맑게 웃으며 새로운 보드게임을 꺼내는 루시를 보며 이호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보드게임이 싫은 건 아니지만, 다른 것도 좀 할 수 있지 않나?
티타임을 가지거나.
마법에 대해 토론하거나.
차라리 귀여운 인형이나 액세서리에 대해 대화할 수도 있고.
몇 시간 내내 보드게임만 하다 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루미랑 둘이서는 할 수 있는 게임이 얼마 없단 말이야. 새로운 부원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 너랑 있을 때 많이 해야 해."
"맞아요…. 루시랑 호연 씨 말고 딱 한 명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릴리아나 씨라도 있으면 좋겠다. 세 명은 팀이 안 맞잖아."
루시가 가져온 게임의 룰을 읽고 있던 이호연은 릴리아나라는 말에 눈을 깜박거리며 쌍둥이를 바라봤다.
"릴리아나 씨라니? 내가 아는 그 릴리아나?"
"네. 릴리아나 씨는 엄청 착하고 좋으신 분이에요."
"…?"
릴리아나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순간 아카데미에 동명이인이 있나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그럴 리가 없다.
루시와 루미가 얘기하는 릴리아나는 그 미친 서큐버스가 분명하다.
'릴리아나랑 쌍둥이들이 그렇게 친하다고…?'
대체 자신을 찾아오는 동안 그녀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던 걸까.
릴리아나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결과가 예상되진 않는다.
"릴리아나라면 내가 불러줄까?"
"호연 씨. 정말요?"
"응.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그 미친 서큐버스가 루시 루미 쌍둥이에게 무슨 악영향을 줄지 모른다.
차라리 무슨 짓을 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
"잠시 기다려봐."
이호연은 곧바로 스마트 워치로 릴리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워치에선 금방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엉? 무슨 일이야? 그새 또 고백할 게 생겼어? 너 정말 말썽꾸러기구나.]
"… 그런 거 아니야. 루시랑 루미가 놀자는데, 너도 올래?"
[루시, 루미? 아아, 아아아아! 그 귀여운 애들! 당연히 좋지! 언니가 곧 간다고 전해줘!]
"언니? 네가 왜 언니야."
[언니는 언니니까! 됐고 사람 없는 곳으로 나와줘!]
"응? 무슨 소리야?"
[빨리! 언니가 가야 한다고!]
"…."
스마트워치를 째려보던 이호연은 한숨을 작게 쉰 뒤 루시와 루미에게 말했다.
"잠시만. 밖에 나갔다 올게."
지금까지의 경험상 여기서 더 물어봤자 대답을 듣긴 힘들다.
그냥 릴리아나의 말을 들어주는 게 더 빠르다.
'스카웃, 아니 스칼렛을 처음 봤을 때 반응과 비슷한데….'
좀 불안하단 말이지.
물론 귀엽다고 했으니 성적으로 건들 것 같진 않다. 릴리아나를 오래 봐온 만큼 성격은 알고 있다.
다만 쌍둥이와 조합이 맞냐가 문제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가?'
상극이기에 잘 어울리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야. 이제 아무도 없어. 무슨 말하려고 그래?"
[그럼 갈게!]
"뭐? 아니 무슨 개소리를…."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고 복도로 나왔는데.
이호연이 눈을 찌푸리며 스마트워치를 두들기려던 그때.
번쩍-!
눈앞을 가리는 새하얀 빛과 우당탕탕하는 소리.
"꺄악!"
"으읍!"
확 풍겨오는 여성스러운 향기와 동시에 몸에 느껴지는 무게감.
방금까지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던 이호연은, 자신에게 안겨있는 소녀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 릴리아나?"
"으, 으아… 생각보다 무서웠어. 다음엔 안 쓸래."
"아니, 너 뭐야. 왜, 왜 여기 있냐?"
"그래도 성공이야. 역시 난 대단해. 흐흥."
이호연의 목소리를 들은 릴리아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호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킁킁. 앙."
냄새를 맡다가 그걸로 부족한 지 이호연의 어깨 부근을 앙 물었다.
"서큐버스는 텔레포트도 가능했어? 이런 게 되면 진작 좀 쓰지."
"원래는 못 했어. 루시퍼를 잡은 뒤에 마력이 강해져서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는거야. 너랑은 주종관계니까. 비상탈출 같은 느낌이지."
"보통 이런 걸 비상탈출이라고 하냐."
비상 탈출을 이런 데에 써도 되는 걸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귀여운 애들 보러 가야 해!"
"아니, 들어가기 전에 너 나랑 얘기 좀 해. 너 루시 루미랑 왜 친한 거야?"
"음? 귀여운 애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무슨 잘못이양."
"잘못은 아닌데… 갑자기 그러니까 궁금해서 그래."
"너야말로. 이런 귀여운 애들은 진작 소개해줬어야지!"
"… 너 루시랑 루미 보는 거 처음 아니잖아."
"엥? 그랬나?"
"엥은 무슨. 목걸이로 돌아다닐 때 질리도록 봤을 텐데."
릴리아나가 집에 있는 게 심심하다고 징징대서 목걸이로 변한 채 데리고 다니던 때가 한참 아카데미에 있을 때였으니, 루시와 루미는 엄청나게 봤을 거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러냐고.
"으음. 그런가. 서큐버스의 힘이 강해져서 더 귀여워 보이는 걸 지도 몰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도 몰라. 귀여워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난 가야 해!"
릴리아나는 대충 주위를 둘러보더니 동아리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이런 말을 나눌 시간조차 아까워 보였다.
"이거 참."
개소리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이제 진지한 건 지 아닌 지 구별이 안된다.
물론 루시 루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역시 루시퍼를 잡은 뒤에 갑자기 강해진 릴리아나의 마력을 확실히 조사해봐야겠네.
"뭐, 됐어. 릴리아나가 이상한 곳에 빠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사이비도 아니고 루시 루미를 좋아해 주는 건 다행인 일이다.
게다가 원래 전투 같은 위급한 상황에선 금방 친해지는 법이다.
'혹시나 어색할 수도 있으니 빨리 들어가서 분위기를 잡아줘야지.'
극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친해졌다가 상황이 해결되면 어색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치 군대의 훈련소 같은 것. 그 친구들도 평생 보자고 해놓고서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지.
이호연은 재빨리 릴리아나의 뒤를 따라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릴리아나 씨. 이건 어때요?"
"루시.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으음, 릴리아나 언니. 이건 어때요?"
"잘했엉. 루미, 너도 언니라고 해."
"리, 릴리아나 언, 언…. 죄, 죄송해요. 릴리아나 씨."
"흐헤헤. 귀여워라. 응? 이호연. 거기서 뭐해. 빨리 와. 팀이 안 맞잖아."
"…."
뭐야. 왜 그렇게 잘 지내는 거야.
왠지 서운하네.
"자, 가위바위보로 정할 거야. 이호연 네가 말해줘."
이호연은 굉장히 신난 듯 눈을 반짝이는 릴리아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집에 사는 여자들은 게임을 잘 안 즐기니까.
보드게임을 보고 신이 난 모습이 이상한 건 아니다.
오늘은 어울려주자.
"그래. 가위, 바위, 보!"
"릴리아나 스페셜 펀치!"
"적당히 해. 이 미친 서큐버스야!"
어울려주겠다는 마음이 5초만에 산산조각났다.
가위바위보에 릴리아나 스페셜 펀치가 어딨냐고.
"내가 이겼으니까 팀은 내 마음대로 정할게. 괜찮지?"
"네. 릴리아나 씨…."
"하아. 루시, 넌 괜찮아?"
"으응. 릴리아나 언니는 역시 재밌네."
"…."
이호연은 미간을 주무르며 릴리아나가 나눠주는 카드를 받았다.
루시와 루미가 불만이 없어 보이니 딱히 말은 안 하겠지만, 저 텐션은 참 따라가기 힘들다.
'루시랑 루미를 보내고 나면 다른 히로인들도 찾아가 봐야해.'
어쩌다 보니 여기서 시간을 꽤나 쓰긴 했지만, 갈 곳이 많았다.
쌍둥이들을 기숙사에 보내고 가까운 임솔 교수 님을 만나러 가야지.
"이호연. 네 차례잖아. 빨리 해. 릴리아나 스페셜 펀치를 맞고 싶은 거야? 응?"
"바로 할 테니까 조용히 해."
"호연 씨. 저희 팀이니까 힘내 봐요!"
루미는 이호연의 옆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쓸데없는 생각도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나도 집중할게."
피식 웃은 이호연은 카드를 들고 보드게임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