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화 > 고백 (4)
학생 회장실로 들어간 이호연은 소파에 앉은 채 슬쩍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문수린은 엄청나게 바빠 보였다.
책상에 널려있는 서류 다발과 평소보다 어수선한 학생 회장실이 문수린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바깥 임원들도 고생이 많던데… 학생회로서 미안하네요."
"에이. 호연이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을걸? 아카데미를 구한 영웅이라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잖아."
"…… 제가요?"
"응. 뉴스 안 봤어?"
그럴 거 같아서 안 봤다.
안 그래도 판데믹의 무차별 테러가 강해진 지금 테러를 막아낸 자신의 위상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무서웠거든.
문수린의 말을 들어보니 상상 이상인 모양이다.
"크흠. 그건 그거고. 제가 바쁜 데 방해한 건 아니죠?"
"마침 쉬려고 했다니까. 거기 앉아있어. 커피라도 내올게."
따악-
문수린이 마력을 살짝 움직이자, 구석에 있던 주전자가 테이블까지 날아와 잔에 커피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호연은 따뜻한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대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그때 문수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호연이의 신변 보호 허가가 떨어졌어. 물론 루시퍼는 죽었지만…."
문수린은 익숙하게 신변 보호 서류의 사인란을 가리켰다.
이호연은 그녀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은 뒤, 문수린의 손을 잡았다.
"이리 와요. 누나."
"응? 일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미안해."
문수린은 이호연의 표정을 보고 눈치 빠르게 서류를 치웠다.
그리고 팔을 벌리는 이호연에게 폭 안겼다.
"따뜻하네… 그 던전은 너무 추웠어. 그렇지. 호연아?"
"확실히 그랬었죠."
"후으… 기분 좋다."
품 안에 있는 문수린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정말 살아있다는 생생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눈 앞의 사람은 게임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걸 다시 체감한다.
"으음…? 호연아…."
이호연의 주도로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다.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문수린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문수린은 이 짧은 키스로 고된 일의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이호연의 공허한 표정은 문수린이 환상에서 깨어나기 충분했다.
"왜 그래 호연아. 무슨 일 있어?"
문수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호연을 바라봤다.
모든 일이 잘 풀린 것 같은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저번에 그랬잖아요. 장인어른의 몸이 나아지면 제 비밀을 말해주기로."
"맞아. 그랬었지. "
"그 일도 있고… 이번에 던전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어서요."
"응. 언제든지 말해도 괜찮아."
문수린의 대답을 들은 이호연은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눈여겨봐놨던 보안팀과 관련 있는 서류.
[아카데미 보안팀 개편…]이라는 무서운 제목이었다.
"이게 제일 중요한가 봐요."
"보안이 뚫린 게 가장 큰 문제니까. 재발을 피하기 위해서는 뜯어고쳐야지."
"…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수린 누나."
착- 착-
아카데미의 보안이 뚫린 것은 보안 팀의 잘못이 크다는 내용의 서류를 대충 훑은 이호연은 서류를 책상에 내려놨다.
표정을 다잡았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데 쓸데없는 분위기를 잡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문수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냐면 아카데미를 덮친 던전은 제가 설치한 거거든요."
"… 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문수린은 이호연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카데미를 덮은 마법진의 범인이 이호연이라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보안을 뚫은 게 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보안 팀을 굳이 갈아엎을 필요도 없어요.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달라진 것은 없었을 거예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아무리 말해봤자 한 번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가 있을까.
이호연은 손바닥 위에 마력 구를 생성했다.
마력 구에서 흘러나오는 지옥의 마력은 가짜 던전에서 뿜어내던 마력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던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신경 썼으니 문수린도 금방 이상함을 눈치챘다.
"… 그러고 보니 레베카 씨가 그런 말을 했었지. 호연이가 마법진을 만들었다고. 루시퍼와 전투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렸어."
문수린은 입을 벌린 채 이호연의 손을 바라봤다.
던전에서 느꼈던 어두운 마력. 그리고 루시퍼가 사용하던 정체불명의 마력.
그것과 똑같은 힘을 이호연이 내뿜고 있었다.
문수린의 컨디션이 평소와 같았다면 레베카가 말해준 정보를 절대 잊지 않았을 텐데, 루시퍼와 전투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다.
혹은 상대방이 이호연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 역시 충격이 크네.'
이호연은 입을 벌린 문수린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집에 사는 히로인들은 이호연에게 굉장히 관대하다.
애초에 이호연이 여자들을 끼고 사는 걸 알면서도 같이 지냈던 거니까.
그렇기에 무언가를 고백할 때도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다른 히로인들은 다르다.
그녀들은 이호연의 하렘을 짐작하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마법진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호연의 고백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문수린의 말은 이호연에게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럼 이제 나는 죽는 거야?"
"…… 네?"
이호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죽는다니?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쳤길래 그런 결과가 도출된 거지?
심지어 문수린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해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연이가 마법진을 설치한 범인이라면… 호연이가 악의 축인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아카데미를 납치하는 마법진을 설치할 리가 없잖아."
사고가 멈추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스르르 눈을 감는 문수린을 보던 이호연은 곧바로 문수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잠시만요. 무슨 소리예요 수린 누나. 제가 루시퍼를 죽였잖아요."
"… 악의 집단 내부의 서열싸움이라거나? 어차피 목적은 사람들이었던 거지."
"그럴 거였으면 마지막에 마법진 해체를 안 했겠죠. 누군가를 해할 목적은 없었어요."
"아…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다행이네."
이호연은 삶의 희망을 다시 찾은 문수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생각했어도 내가 악당 일리는 없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말을 꺼내서 수린 누나도 잠깐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간 거겠지.
문수린은 이호연이 악의 축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확인했다.
"신변 보호 요청 같은 건 필요 없었으려나…? 수속은 다 끝났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해놓을까? 호연이가 안전한 건 좋은 일이잖아."
"… 아니요. 인력 낭비니까요. 그보다 너무 전환이 빠른 거 아니에요? 방금까지 삶을 포기한 것처럼 굴어놓고."
"호연이한테 죽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
"무슨 소리예요. 수린 누나"
문수린은 자신의 말에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한 말을 담담하게 꺼내는 것 뿐이다.
"정말이야. 난 호연이 덕분에 살고 있거든. 만약 호연이가 없었다면 혼자 삶을 끝냈을지도 몰라. 겁이 많아서 그러진 않았을 것 같지만. 아마도 스트레스나 과로로 죽지 않았을까."
"…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뭘 했다고."
"생각보다 많은 걸 했어. 나만 믿으라고. 내 기둥이 되어준다고 말했잖아.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되었는지 호연이 너는 모를 거야."
문수린의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온다.
향긋한 머리 냄새가 풍기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가 이호연의 눈에 담긴다.
"그러니까 지금 호연이가 고민하는 거 모두 말해도 돼."
"…."
이호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문수린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저 따뜻한 눈빛이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이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숨어있던 말을 꺼냈다.
"저는 사실 수린 누나 말고 다른 여자랑도 관계를 가졌어요."
"그건 호연이가 처음 좋아한다고 말해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문수린에게 처음 고백했던 날.
여자가 있는데도 고백을 가행한 건 이호연이었다.
"… 근데 조금 많아요."
"혹시 던전에 있던 사람들 전부?"
"…… 네."
"후우. 호연이 너도 참."
이호연은 범죄자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여자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하는 건 역시 힘든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인가가 문제가 아니다.
역시 인간으로서 조금 힘들다고 해야할까.
문수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 이호연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어떡해. 화도 못 내게."
"죄송해요."
"이기적으로 고백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건 호연이 너야."
"… 네."
"나쁜 남자를 할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지. 이러면 내가 손해 보는 거잖아. 나한테 보내던 거짓 스케줄도 항상 눈감아줬는데."
"… 다 눈치채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아카데미에 학생회장의 눈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동아리 방에 가는 것도, 임솔 교수님을 보러 가는 것도, 성녀 님을 보러 가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어."
"하아…."
문수린이 다른 여자들을 눈치챘을 때.
어떤 행동을 할지 하나하나 보고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연히 이호연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보통 집에서 마법 연구를 한다는 핑계를 가장 많이 댔었지.
그럼 수린 누나는 모든 걸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
'… 이러면 내가 뭐가 돼.'
그런 가벼운 속임수로 문수린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했다.
이호연은 문수린을 책임지겠다고 말해놓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솔직히 큰 충격은 없네. 나는 '사실 저는 뱀파이어라서 야한 짓을 할 때마다 누나 피를 빨아야 해요. 참기 힘들었어요.' 같은 비밀을 각오하고 있었거든."
"그게 뭐예요… 큭."
이호연은 문수린의 가슴에 안긴 채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누나로서 분위기를 리드해주는 게 참 고마웠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야. 그럼 던전 테러는 뭐였던 거야? 마법 연구용 마법진을 루시퍼가 강탈당한 거야?"
"루시퍼가 강탈한 건 맞지만… 아카데미 전체를 덮는 건 제 의도예요. 저도 왜 그랬는 지는 모르겠어요.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마법진을 해체하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루시퍼에게 강탈당했어요."
"하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난 한 번도 호연이 말고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호연이는 다른 곳을 보고 있어."
"죄송해요. 수린 누나."
꾸욱.
문수린은 이호연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더이상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이호연이 문수린에게 희망을 주었을 때처럼 확실한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이호연도 그 시선으로 문수린의 마음을 눈치챘다.
"… 누나. 사랑해요."
"조금 더 사랑을 담으면?"
"… 사랑해. 수린아."
"응. 난 처음부터 그거면 됐어."
문수린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호연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 중요하지 않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가 가혹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놓지않은 건 문수린이었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나는 이미 호연이한테 짐을 맡겼어. 그러니까 호연이 너도… 그 때처럼 자신만만하게 웃어줘."
"네. 아니, 응. 알겠어. 수린아."
문수린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