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9화 > 고백 (3)
"레베카 씨뿐만이 아니에요. 릴리아나. 다은이. 스칼렛. …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목적이었어요."
이호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히로인들에게 사과하는 지금도 가짜 던전 마법진을 만들며 느꼈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때는 하렘을 만들기 위해서 히로인들을 속이는 게 필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가짜 던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미쳐있던 건지.
뚜렷한 정신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태어날 때부터 나쁜 새끼인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선택한 건 이호연 자신이고,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몹쓸 짓을 했으니 반성도 사과도 자신이 해야 한다.
반성은 루시퍼와 싸우며 충분히 했으니, 사과도 해야겠지.
"호연 님과 깊은 관계를 맺은 여성분들이 타깃이었다는 거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속임이고."
"그렇지."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스칼렛이 한 마디를 거들었다.
"… 목표를 알아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저희들을 납치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죠?"
스칼렛은 눈치가 빠르다. 이호연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릴리아나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도 이호연의 행동을 보고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그런 스칼렛도 이호연이 자행한 테러의 원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말이다. 스칼렛.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처음엔 던전을 이용해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거든? 어느 순간부터 가짜 던전에 의존하게 되더라. 그걸 만들기만 하면 이 사태가 모두 해결될 줄 알았어."
답답한 상황은 이호연의 마음도 조급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가짜 던전을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말인 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사태라는 건 엄청나게 많은 당신의 여자 친구들인가요?"
"맞아."
"혹시 던전의 함정을 멋있게 돌파하거나 위기를 연출해서 여성들의 호감을 사려는 계획이었을까요?"
"응. 엄청 멍청했지."
"어떻게 그런 찌질한 생각을 하실 수가 있나요?"
스칼렛의 말에 이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구석에 몰려있던 느낌이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거든. 미안해."
"그럼 애기 아빠가 마법진을 만든 이유는 우리를 더 확실하게 꼬시기 위해서였구나. "
"…."
레베카는 이호연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상한 말을 꺼냈다.
저렇게 표현하니까 뭔가 웃기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호연의 집에서 같이 지내는 히로인들은 레베카처럼 하렘에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마법진은 어떻게 빼앗긴거야? 나랑 애기아빠가 만들었으니 보안은 엄청났을텐데."
"글쎄요. 저도 강탈당했다는 걸 해체하는 도중에 알았어요."
"해체라니? 마법진을?"
"네….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마법진을 해체하려고 했거든요."
"그래도 마지막에는 회개했구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나쁜 놈이라고 해주는 게 마음 편해요."
"애기 아빠가 나쁜 놈이 아니라고는 말 안 했는데? 칭찬해주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아서 칭찬해준 거야."
"…."
이호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사과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불편해지는 건 당연한거지.
"이호연이 멍청한 짓을 한 건 알겠어. 그런데 갑자기 말하는 이유는 뭐야? 가만히 있으면 다들 조용히 넘어갔을 텐데. 바보야?"
"… 늦었지만 사과하고 싶었거든. 갑작스럽게 말해서 당황했다면 미안해.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 악마 같은 놈! 루시퍼가 아니었다면 가짜 걱정을 했을 거 아니야!"
"애기 아빠는 루시퍼가 마법진을 탈취한 게 다행이네. 진짜 위기였으니 망정이지. 온갖 걱정을 다 했는데 알고 보니 가짜였다면 정말 화났을 거야."
레베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호연 자신부터 죽을 기세로 싸웠으니, 히로인들의 거부반응이 덜했다.
"저는 지금도 화가 나는데요. 두 분이 너무 착한 것 같습니다."
레베카와 릴리아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은 스칼렛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 호연 님. 지금이라도 여자친구 분들을 확실하게 끊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앗. 난 끊지 말아 줘!"
"애기 아빠. 우리는 끈끈한 부부 사이잖아. 아직 아이 한 명도 만들지 못했어."
"… 그럴 생각 없어요. 미안해 스칼렛.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다른 여성분들에게도 던전에 대한 사실을 말할 생각 아니었나요?"
"아마도… 그렇겠지."
가짜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모든 히로인들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걸 고백하지않으면 이호연의 마음이 너무 답답할 것 같았다.
"아무리 호연 님 주변의 여성분들이 착하다지만… 호연 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정도로 실망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 글쎄.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마음을 돌려야지."
"쓰레기 주제에 대응은 순정남 같네요."
이호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히로인들의 호감도는 전부 높았으니, 좋게 풀릴 가능성도 꽤 높았다.
만약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마음을 돌려야겠지.
꼬옥.
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이호연의 손을 감쌌다.
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있던 남다은이 보였다.
"호연아. 잘은 모르지만… 그런 행동을 한 건 너에게 걸린 저주 때문 아니야? 불가항력이었다면 호연이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해."
"…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단순히 내 생각이 짧았던 거야."
이호연은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남다은을 보며 생각했다.
저주.
저주에 대해서는 엘리스에게 다들 들은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저주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저주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결국 모두가 죽으니까.
이호연의 행동이 메인 퀘스트의 압박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다.
마왕을 처치하고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더라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단순한 멘트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 호연이는 내 거야!
- 이, 이 도둑고양이가! 거기서!
- 제발 그만 좀 싸워!
~ END ~
같은 허접한 엔딩크레딧으로 설득할 수 없다.
현실은 확실한 결과가 필요하다.
'애초에 첫 단추부터 틀렸어.'
처음부터 한 명 씩 납득시켰어야 했는데, 그걸 한 번에 몰아서 하려고 한 자신이 잘못이다.
모두의 앞에서 고백한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멍청한 말이다.
그런 사과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겠지.
"늦게라도 정말 미안해. 원래 다 함께 있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그래서…."
"던전에서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다면, 말 안 하길 잘하셨네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긴 하지만, 거기서 말하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다. 이 눈치 없는 남자가 거기서 폭탄 발언을 했다면 어떤 참사가 일어났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미안해. 다은이도. 날 믿어줘서 고마워."
"으응. 내게 호연이는 은인이니까. 무슨 짓을 해도 믿을 거야."
이호연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남다은을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남다은을 속이려 했다니 왠지 가슴이 아파온다.
"나는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있어서 그런가? 충격이 적네."
"뭐야. 레베카. 알았으면 처음부터 말해줬어야지!"
"… 난 분명히 말했어. 근데 릴리아나 네가 이상한 소리를 했잖아. 다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내 말은 기억도 못 해놓고."
"엥. 그랬었나?"
릴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레베카가 마법진 어쩌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호연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려 했던 거겠죠. 하지만 현실은 더욱 참혹했군요."
"미안해 스칼렛. 정말 반성중이야."
"… 하아. 쓰레기인 걸 알았으면서도 이 집에 눌러앉은 제 잘못이겠죠."
스칼렛은 아직 화가 났지만, 같이 사는 여자들이 워낙 이호연 바라기이다 보니 스칼렛 혼자 화를 내는 건 상황이 이상했다.
게다가 스칼렛은 루시퍼와의 전투에서 이호연이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걸 알고 있었다.
3번 정도는 죽어도 이상하지않을 부상이었다.
'루시퍼에게서 구해줬을 때는 조금 멋있기도 했고.'
그것만 아니었어도 더 화를 내지 않았을까.
스칼렛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며 굳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마법진 같은 건 모르겠고, 나는 루시퍼를 잡아서 좋긴 해. 아무튼 그 마법진 덕분에 루시퍼가 나타났으니까. 언젠가 꼭 잡고 싶었거든."
"고마워. 릴리아나."
"그리고 루시퍼를 만난 이후로 이상하게 마력도 돌아왔단 말이지."
슈우욱-
릴리아나는 손 위에 마력 구를 생성한 뒤 저글링을 하듯 위로 던져서 받기를 반복했다.
"… 그러게. 그 이유도 나중에 한 번 알아보자."
자신보다 마력이 약해야 할 릴리아나의 마력이 강해진 건 확실히 조사해야 할 내용이다.
아마 그녀에게 걸린 금제가 약해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왜? 오늘은 바빠?"
"응. 할 일이 좀 많거든. 당장 나가봐야 해."
빅토리아 아카데미를 덮친 대규모 테러.
이번 일로 가장 고생하고 있을 사람에게 찾아가야 한다.
*
"역시 보안팀이 문제겠지? 공원 근처 보안이면 후방팀이… 아니야. 윗물이 썩었으니 아랫물도 썩은 거 아닐까."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학생 회장실.
문수린은 가짜 던전에서 탈출하자마자 쌓여있는 서류의 산을 마주했다.
가짜 던전의 범인은 확연했지만, 어떻게 아카데미의 보안을 뚫었는지가 알아내야 할 문제였다.
"안 바쁜 날이 없네… 나도 나름 피해자였다구."
학생회장으로서 던전 내부를 지휘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루시퍼와 전투는 말할 것도 없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아마 호연이가 없었다면 세 번은 죽었겠지.
그나마 뒤에서 싸웠던 자신이었으니 이 정도지. 다른 사람들은 상태가 더 심할거다.
문수린은 서류의 산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해야 할 일인 것도 알고, 자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안다.
하지만 던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 정도의 업무량이 정말 맞는 걸까.
"어쩔 수 없지. 힘내서 해보자."
서걱- 서걱-
문수린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일에 몰두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문수린의 작업 속도는 엄청났지만, 일이 들어오는 속도도 엄청났다.
가짜 던전의 피해는 규모에 비해 작았다. 그 후의 조치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지만, 루시퍼를 사주한 판데믹에 대한 조사와 보안의 구멍을 찾기는 꽤나 어려웠다.
'그냥 호연이랑 쉬면서 놀고 싶네….'
문수린은 기지개를 켜며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너무 오랜 시간 업무에 집중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잠시 커피라도 마시며 쉬어야지.
똑똑.
"응. 그냥 책상에 놔줘."
문수린은 문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또 업무가 늘어난 거겠지.
몇 번이고 받다 보니 이제 노크소리만 들어도 서기라는 걸 알 것 같다.
"학생회장 님. 추가 업무가 아니고,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누군데?"
노크는 예상대로 서기였지만, 추가 업무는 아니었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이사장도 문수린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니 찾아올 시간은 없을 텐데.
"회장 님. 저 왔어요."
"호연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문수린은 문 앞까지 이호연을 마중 나왔다.
"호연이가 온 거였구나! 미리 연락했다면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니에요. 수린 누나. 지금 바쁘세요?"
"하나도 안 바빠. 안 그래도 던전에서 나온 직후에 호연이를 못 챙겨줘서 미안했어."
"저야말로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도망갔는데요 뭘."
사실 고민거리가 많아서 자리를 피한 거지만… 그때는 그런 핑계를 댔었다.
이호연은 다가온 문수린을 살짝 안아주며 슬쩍 책상 위를 바라봤다.
'… 뭘 물어보냐. 당연히 바쁘겠지.'
빅토리아 아카데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학생회장인 문수린이 바쁘지 않을 리가 없다.
서류의 제목을 훑자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내용들이 보였다.
- 아카데미 보안팀 개편….
- 테러의 후속조치와 복구….
- 마인 루시퍼 시체의 소유권.
"궁금한 거라도 있어? 아. 맞아. 루시퍼 시체의 소유권에 대해서 분쟁이 조금 있었거든. 내가 첫 번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호연이라고 박박 우겨서 받아오긴 했는데… 혹시 필요해?"
"아… 네.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마법 연구용으로요."
"다행이다. 그럼 이것도 챙겨줄게."
문수린은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노인네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소유권을 가져가려 했는데, 호연이가 원한다면 빼앗은 보람이 있었다.
"그나저나 왜 놀러 온 거야? 누나를 보고 싶어서 왔다면 기분 좋을 것 같네. 아, 일단 커피라도 한 잔 마셔. 마침 쉬려고 했거든."
"… 네."
이호연은 문수린의 배웅을 받으며 학생회장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