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화 〉 508화. 루시퍼 (5)
* * *
보통의 연인 관계에서 여자 친구가 한 대 때리는 걸 진심으로 아파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
물론 가끔은 예외도 있는데, 이호연도 그런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배구선수를 여자 친구로 둔 남자의 등 사진에 커다란 손자국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사진.
그걸 보며 킥킥댔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걸 왜 이제야 떠올렸을까.'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엘리스의 주먹은 운동선수와 비교할 수 없었다.
"억… 어억… 크흑…."
이호연은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배를 맞았으니, 웬만한 전투보다 아팠다.
"하아… 한 대 때리니까 좀 괜찮네. 역시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
"에, 엘리스… 나, 나 죽어…."
"이제 와서 말하자면, 사실 다른 여자들하고 같이 사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내가 캐묻기 전에 말해준 건 기분이 좋네."
"…."
이호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말했는데도 이런 주먹을 맞았는데, 혹시나 속이려고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다.
"그리고 거실이나 내 방도 아니고 현관에서 이러는 걸 보면 여기 와있나 보네? 루시퍼 일로 언니가 부른 거야?"
"… 응."
"흐음…. 나만 모르는 일이 많았네."
엘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이호연에게 속삭였다.
"호연아. 거기 있는 여자들 이랑 나 중에 누가 더 예뻐?"
"네가 더… 예쁘지."
이호연은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좋다고 하지만, 이럴 때까지 솔직해질 정도로 눈치 없는 놈은 아니었다.
이호연의 말을 들은 엘리스는 배시시 웃으려다가, 당연한 일이라는 듯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뭐, 좋아. 가서 인사라도 해볼까."
"그전에 잠깐 설명이라도 해줄게. 네가 본 사람들도 있어."
"됐어. 내가 직접 파악하는 게 나아."
엘리스는 자신만만하게 거실로 향했다.
'…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남다은이나 스칼렛을 보면 꽤 놀라지 않을까.
하지만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잡고 설명하는 것도 웃기다.
이호연은 아직도 얼얼한 배의 고통을 느끼며 그 뒤를 따라갔다.
*
이호연이 거실 밖으로 나가 엘리스를 맞이하던 그때.
거실에 남은 여자들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은아. 우리가 루시퍼를 다시 만나면 이길 수 있을까?"
"… 저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남다은은 레베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준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
분명 루시퍼와 전투를 겪으며 훨씬 강해졌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특히 지옥의 마력.
레베카의 말대로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안 되겠어. 오늘부터 특훈이야. 마법진이라도 그려줄 테니까 내 방에서 마력에 익숙해지기 위한 합숙이라도 해."
"시간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루시퍼가 나타난 이상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오늘만큼은 릴리아나도 진지한 태도였고, 스칼렛은 앞으로 행동 방침을 골똘히 고민했다.
당장 루시퍼와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조금은 시간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좋은 작전을 생각할 수 있겠지.
'지금이 좋은 타이밍 같아.'
아이린은 대화를 나누는 여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여자들을 모은 이유는 루시퍼에 대한 건도 있지만, 엘리스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주기 위함도 있다.
"스칼렛. 지금 괜찮을까?"
"예. 아까 말했던 그거군요."
아이린에게 미리 신호를 받았던 스칼렛은 곧바로 눈치를 채고 짝짝 박수를 쳤다.
"여러분들. 아이린 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맞아. 다들 집중해봐. 중요한 말이 있으니까."
아이린의 진지한 태도에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집중했고, 다들 이 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한 아이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이호연은… 지금 저주에 걸려있을 가능성이 높아."
"저주라니? 아이린. 그게 무슨 소리야?"
"정확히 말하면 저주와 비슷한 무언가 겠지. 여자들과 계속 엮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저주."
아이린이 여자들을 모은 이유는 이호연에게 걸린 저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으니, 엘리스에게 들은 날부터 이호연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저주와 비슷한 마법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호연 님이라면 쉽게 막아낼 것 같은데요. 정보의 출처는 확실한 건가요?"
스칼렛은 아이린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보의 진위를 확인했다.
그녀도 이호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 게다가 이호연은 맹하긴 해도 그런 빈틈을 줄 남자는 아니다.
"나도 처음 엘리스에게 들었을 때는 놀랐어. 하지만 이유도 합리적이고, 이호연의 행동들을 보면 납득이 가."
"그 이유가 뭔데? 애기 아빠한테 저주가 있다는 건 처음 들어."
"그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엘리스랑 만나면서 다른 여자까지 만나고 있잖아. 그건 저주 같은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이린을 본 레베카와 스칼렛, 그리고 남다은은 동시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방금 아이린이 한 말이 어째서 합리적인 이유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는 릴리아나 혼자서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호연은 인큐버스의 피를 물려받은 게 분명해. 지옥에는 그런 저주가 많거든."
"잠시만. 인큐버스라니? 릴리아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린 님. 릴리아나 님이 하는 제발 걸러들으십시오. 그것보다, 엘리스 양이 아름다운 것과 호연 님이 걸린 저주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겁니까?"
"너 지금 엘리스를 무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그게 그렇게 되는 건 지 모르겠습니다."
"…."
남다은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거렸다.
그녀로서는 둘의 대화 템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본래 아이린은 이 정도로 막무가내가 아니었는데, 엘리스의 이름이 나왔다고 갑자기 저렇게 변 한 이유는 또 뭘까.
"근거는 미약하지만… 애기 아빠의 바람둥이 기질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은 했어. 평범한 사람보다 심하잖아."
"심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 긴 합니다."
"사실 2세를 생각하면 저주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네…."
"흠."
조용히 대화를 듣던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칼렛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근거는 빈약했지만 이호연이 저주에 걸렸다는 '상황' 자체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가진 여자에 대한 집착은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아이린 님. 그 저주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엘리스가 파악한 바로는 여자를 늘려야 하는 계약이나 맹세라고 했어. 아마 발설하면 안 되는 이유도 있겠지."
"보통 저주는 안전장치가 있는 법이니깐. 내가 저주에도 일가견이 있거든."
"응. 일단은 너희에게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엘리스가 저주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이호연이 엄청나게 놀랐다고 해."
"… 차라리 그 쪽이 더 합리적인 이유같네요."
"고맙습니다. 아이린 님."
고개를 꾸벅 숙인 남다은은 아이린이 말한 것에 대해 고민했다.
남다은은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녀가 아는 건 이호연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뿐.
나쁜 저주에 걸렸다면 구해주고 싶었다.
"맞아.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빅토리아 공원. 기억하지? 매일같이 들리던 곳에 며칠 전부터 안 오고 있는데, 혹시 이유를 아는 사람 있어?"
"호연이의 몸이 아파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다기엔 입원 첫날에도 들렸어. 몸은 그때가 제일 아팠을 거야."
"아니면 거기서 해야 하는 목적을 전부 이뤘다거나?"
"목적…? 다시 조사해봐야 하나…."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해결된 건 없었지만, 점점 더 이호연의 비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스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노력해야지.
"아무튼 저주는 거의 확실한 거야. 혹시 너희들이 직접 보고 의심 가는 점이 있으면…."
똑똑.
아이린이 저주에 대해 당부하려고 할 때.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단정한 정장을 입은 엘리스.
그녀는 웃음을 참는 건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얼굴이 새파래진 이호연도 있었다.
'… 잘 말한 거 맞아?'
역시 그냥 다 내보낼 걸 그랬나.
아이린은 엘리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리스. 저기 이 사람들은…."
"괜찮아 언니. 설명은 들었으니까."
미소를 지은 엘리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연이의 애인인 엘리스라고 합니다."
"오. 기가 센 인간 여자는 오랜만이야."
"… 오랜만입니다. 엘리스 님."
"안녕. 엘리스."
"반가워. 엘리스 양."
"응. 스칼렛이랑 남다은… 그리고 레베카 씨였나요? 프랑스에서 봤던 기억이 있네요."
"왜 내 이름은 안 불러주는 거야. 릴리아나라구."
"… 잘 부탁드립니다. 릴리아나 씨."
엘리스는 익숙한 여자들의 얼굴을 보며 당황했지만,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 표정을 감추었다.
가벼운 기싸움이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는 강적들이라 살짝 놀랐다.
엘리스는 여자들과 눈을 한 명씩 마주쳤다.
검은 머리의 맹해 보이는 여자, 릴리아나.
아카데미에서 자주 봤던 남다은.
전 아이리스 길드원인 스칼렛.
켄타우로스 생포 작전에서 봤던 붉은 머리의 레베카까지.
'… 내가 제일 낫네.'
일단 외모는 자신이 이겼다.
혹시나 덤벼드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매너가 없는 여자는 없었다.
"이, 이거 어떡할 거야. 이호연 네가 책임진다며…!"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아이린이 어쩔 줄 몰라하며 이호연의 팔을 챱챱 때리기 시작했다.
"저 지금 너무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오늘 이 자매한테 몇 대나 맞는 거야.
"이 분위기 어떡할 거냐고! 그러니까 내가 도망가라고 했지?"
"… 걱정하지 마세요. 다 괜찮아 보이는데."
아이린이 호들갑을 떨어서 그렇지, 어색할 뿐 싸우는 분위기는 아니다.
같이 사는 여자들은 이호연의 여자관계에 관대한 편이고, 엘리스도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그래도 자신이 교통정리는 해야겠지.
당장은 괜찮아도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 같은 거니까.
이호연은 침묵을 지키는 여자들 사이에 들어갔다.
"인사 나눴으면 엘리스 너도 앉아. 마침 우리도 루시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 아이린 씨 말로는 네가 중요한 일을 하고 왔다는데, 알려줄 수 있어?"
"… 원래는 언니에게 말해야 할 사안이지만, 그냥 같이 말할게. 아카데미의 협력을 구하는 데에 성공했어. 다른 기관들도 금방 긍정적인 답변을 줄 거야."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 건데?"
"조사팀을 꾸리거나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하겠지."
"우리가 조사팀에 들어갈 순 없어?"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어. 위험하잖아."
"그래도 보기만 하는 건 좀…."
루시퍼가 한국에 나타난 건 자신의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사팀을 먼저 보낸다는 게 왠지 양심에 걸렸다.
"애기 아빠. 잔인해 보이겠지만, 그 사람들 일이야. 막말로 우리가 갔다가 순식간에 전멸해버리면 그게 더 큰일이잖아."
"그것도 이해는 하겠는데요…."
"레베카 씨. 죄송하지만 애기 아빠라는 호칭은 뭔가요?"
"애기 아빠한테 애기 아빠라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이야?"
"… 엘리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아무래도 나중에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루시퍼가 중요하다.
"아이린 씨. 협력을 받았다면 조사팀은 언제쯤 구성되나요?"
"… 아마 짧으면 며칠, 길면 일주일 정도겠지. 이번 사안은 다급하니까 더욱…."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때, 아이린의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네. 아이리스 길드의 아이린입니다. 예…. 에엥? 아니, 방금 끝났는데 어떻게…. 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뚝.
통화를 끊은 아이린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조사팀이 출발하고 있다는데?"
"네? 방금 협상하고 왔다면서요."
"그러니까…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이린이 의문을 느끼는 동안, 스칼렛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협회와 아카데미에서도 루시퍼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요…."
"그러게. 가끔 공기관들도 도움이 되잖아?"
"아이린. 우리가 곧바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엘리스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 얼마나 노력했는 지 감이 오기 때문이다.
'얼마나 난리를 쳤으면 하루 만에 조사팀을 만들어.'
학생회실에서 나올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던 문수린의 얼굴을 떠올린 엘리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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