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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야겜에 빙의했다-507화 (507/648)

〈 507화 〉 507화. 루시퍼 (4)

* * *

엘리스의 집.거실에서 나온 이호연은 현관 주변을 뱅뱅 돌며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심호흡. 심호흡…."

후우.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곧 엘리스가 온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실 생각할 것도 없다. 이미 방에는 4명의 여자들이 있고, 남은 건 솔직히 말하는 것뿐이다.

"… 그게 어려워서 문제지."

괜히 말한다고 까불었나 싶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거다.

긴장한 이호연은 가슴 속의 진심 모드를 켰다.

[뚜렷한 정신력].

항상 자신의 감정을 지켜주던 특전을 의식한다.

인지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터.

그걸 조절할 수는 없을까.

"… 안되는 거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고 마음먹긴 했지만, [뚜렷한 정신력]과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띠링­

'왔다.'

하지만 더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대문을 지나는 엘리스의 소리가 들렸고, 곧 현관문이 열리겠지.

이호연은 엘리스에게 할 첫 말을 생각하며 마음 한 켠의 찜찜함을 몰아냈다.

"흠흠. 흐으음~."

학생회실에서 나온 엘리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책임지고 다른 기관들의 허락까지 받아주겠다는 문수린의 말은 천군만마(???馬)를 얻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모두 인정해주겠지.'

이권을 하나도 양보하지 않았으니, 너무나 만족스러운 협상이었다.

대견하게 자신을 바라볼 언니와 어머니의 눈빛을 상상하며 집으로 돌아온 엘리스는 현관에 서 있는 이호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응?"

"안녕. 엘리스."

"… 뭐해? 우리 집에 왜 네가 있어? 아무 연락도 없었잖아. 아, 언니가 부른 건가?"

문수린에게 말했던 것처럼, 루시퍼는 이호연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아이린이 이호연에게도 전했을 테니 집에 올 수도 있겠지.

"혹시 내가 온다는 연락 때문에 마중 나온 거야? 그건 좀 기쁜데."

엘리스는 배시시 웃으며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협상을 잘했는데 생각하지 않은 보상까지 있으면 기쁠 수밖에.

하지만 이호연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엘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긴 한데… 대화라도 할까 해서."

"…?"

이호연을 안으려던 엘리스는 어색한 눈동자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떨리는 눈동자와 쑥스러운 건지 부끄러워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입술.

저렇게 당황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음, 마침 너한테 할 말도 있었거든."

이호연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엘리스는 평소보다도 섹시해 보였다.

다행히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는데, 자신의 말을 듣고 갑자기 표정을 구기기라도 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무슨 말? 지금 언니한테 전해야 할 게 있는데, 그다음에 얘기하면 안 될까? 많이 급한 일이야?"

"… 응. 급한 일이야."

"…?"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스를 보며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고백이다.

가짜 던전 계획 이후에 말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자연스럽지?'

무슨 말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뜬금없이 '우리 집에 여자가 4명 살아. 근데 지금 여기 있어 하하.'라고 말하면, 자신을 얼마나 미친놈으로 볼까.

이호연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루시퍼 때문에 아카데미에 갔다 왔다고 했지?"

"학생회장님하고 협상을 해서 루시퍼를 추적할 팀을 구성했어. 아마 헌터 협회나 다른 기관들도 곧 협력해줄 거야."

"대단한데? 그런 중요한 일을 엘리스 네가 맡은 거구나. 고생했네."

"당연하지. 널 노리고 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

이호연은 엘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좆됐다.'

시발. 진짜 좆됐다.

솔직히 감동이었다.

자신 때문에 직접 아카데미에 협상을 하러 가다니

저런 말을 하는 엘리스에게 사실은 나 동거녀가 넷이나 있어. 같은 말을 해야 한다고?

이건 칼을 맞아도 무죄잖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언니한테 협상 결과를 전해야 한다니까."

엘리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이호연을 쳐다봤다.

편한 곳에 앉아 차라도 마시면서 멍하니 있는 거면 엘리스도 즐기겠지만, 현관에서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

"… 고백할 게 있습니다. 엘리스 양."

"응?"

갑자기 왜 이상한 소리를 하나 했는데, 이호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이호연이 헛소리를 하는 건 매일 있는 일이지만, 장난을 치며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아이린 씨가 처음 루시퍼를 만났을 때의 일. 알아?"

"응. 언니의 지인을 찾다가 우연히 루시퍼와 전투 중인 사람들을 만났대."

"… 그 지인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거든."

"그래? 신기하네."

루시퍼가 덮친 지인들을 이호연이 아는 것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근데 그 사람들이 각자 사정 때문에 살 곳이 없어서… 나랑 같이 살고 있어."

"같이 산다고? 혼자 살기에 꽤 넓은 집이긴 하지만…. 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의문을 느끼던 엘리스는, 이호연의 근심어린 표정과 무거운 기류를 파악했다.

동시에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듯 띵하는 느낌이 든다.

며칠 전의 기억이 스물스물 떠오른다.

아이린에게 이호연의 동거녀들에 대한 사실을 들었던 기억.

이호연을 만나면 따질 생각도 당연히 하고 있었는데, 오늘 중요한 자리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호연을 만나 순간적으로 망각해버렸다.

'… 언니한테 들은 건 아닌 거 같고.'

이호연의 긴장한 표정을 보면 아이린에게 들어서 뒤늦게 고백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들키기 전에 먼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엘리스는 자연스럽게 모르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혹시 여자야?"

"… 응."

"몇 명인데?"

"4명…."

"뭐? 4명? 전부 다 여자야?"

"정확히 말하면 친구의 여동생도 있어서 5명이긴 한데…."

"그럼 여자만 5명이라고? 장난해?"

"그게, 숨기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말을 할 기회가 없어서…."

엘리스는 우물쭈물하는 이호연을 보며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아이린에게 들었을 때부터 화가 나긴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 때릴까 싶었다.

'… 저주 때문일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엘리스는 이호연이 저주에 걸린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저주는 분명 여자와 관련된 것.

동거녀를 4명이나 들인 것도 그 일환이겠지.

게다가, 아무리 쓰레기 같은 남자라도 이호연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엘리스는 자신이 있었다.

'운 좋게' 이호연과 먼저 관계를 쌓은 여자들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선점효과 덕분에 이호연의 애정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딱 한 가지.

이호연의 주변에 아무리 많은 여자들이 있어도,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변치 않았다.

오히려 뛰어난 외모에 맞는 능력도 생겼으니 엘리스의 자신감은 더욱 확고해졌다.

확실한 승리를 내버려 두고 굳이 길을 피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어.'

물론 그것과 동거는 다른 문제.

동거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 동거 기록이 있으면 연애를 시작도 안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한 명도 아니고 4명하고 같이 사는 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

여자로서 화가 나고 질투심이 생기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저주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들으면 그만이야.'

이호연의 여자를 가까이하는 이유가 저주 때문인 걸 예상은 하지만, 먼저 화를 내고 받을 걸 받아낸다.

상대의 사정을 알아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건 얻어내는 것.

이게 바로 협상의 기본이다.

문수린을 만난 엘리스는 협상의 달인이 되었다.

생각을 정리한 엘리스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이호연을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그걸 말하는 이유는 뭐야? 혹시 싸우자는 거야?"

"… 그럴 리가요."

"그럼 왜? 나한테 좋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건 알고 있잖아."

쏘아붙이는 말투로 이호연을 공격했다.

원하는 건 일주일 정도 엘리스의 집에 숙식하라고 하기. 그 말을 끌어내기 위해선 자신이 화를 내야 한다.

"미안해."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뭔데?"

이유 따위 없는 건 엘리스도 알고 있다.

이건 연인 사이의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같은 무적의 말이다.

화난 이유를 말해줘도 욕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이호연이 꼬리를 내리길 바라는 것이다.

이호연은 엘리스의 생각대로 고개를 숙였고 엘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주일 정도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는 말을 한 뒤에 사정을 들으면 된다.

그때, 이호연이 고개를 들었다.

"… 더 진지한 관계를 위해서."

"으응?"

엘리스는 갑작스러운 이호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엘리스. 너에게 더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었어."

"아…?"

"우리의 관계에 거짓말이 없도록, 솔직하게 얘기한 거야. 미안해. 엘리스."

이제야 인정한다.

자신이 한 행동이 다른 여자들에게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엘리스와 눈을 마주치고 사과한 이호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엘리스가 뺨을 때리면 뺨을 맞고, 정강이를 걷어차면 버틸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 어라?'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깜박거린 엘리스는 자신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에 닿는 뜨겁게 달아오른 볼이 느껴진다.

'이 미친년.'

엘리스는 오랜만에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겨우 저 정도 말에 넘어가면 어떡해.

이 정도밖에 안되는 여자였어?

엘리스는 첫사랑을 부정하는 소녀처럼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저항이 너무 쉽게 풀렸다.

진실한 관계가 뭐 어때서.

결국 나쁜 놈이 저쪽인 건 변하지 않는다.

엘리스는 피해자고 바람둥이는 이호연이다.

하지만… 더 진지한 관계를 원한다는 그 뻔한 말이 너무 설렌다.

이미 엘리스는 이호연에게 물들어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마음이 엘리스를 물들였다.

"자존심 상해.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대로 오케이하는 건 절대 안 된다.

어떻게든 반응해야 한다.

'뭐지?'

아무리 기다려도 엘리스의 반응이 오질 않는다.

이상함에 슬쩍 고개를 든 이호연은 엘리스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바라봤다.

"엘리스…?"

"… 열받아."

"미안. 그, 음…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해줄 테니까."

"일주일."

"응?"

"우리 집에서도 일주일 묵어. 그거 아니면 절대 용서 안 해."

"어…. 알겠어. 그거면 될까?"

생각할 거리가 많긴 하지만, 엘리스의 단호한 표정을 보면 무조건 허락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화 안 풀렸어."

"넵."

"… 나한테 한 대만 맞아. 그냥 넘어가는 건 도저히 안 되겠어."

원래 계획은 화난 척을 더 이어가며 이호연과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가는 것이었지만, 엘리스는 자신에게 의외로 푼수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겠어. 맞을게."

이호연은 눈을 감은 채 양 팔을 벌렸다.

혹시나 심하게 화내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생각이었는데, 한 대 맞는 정도면 얼마든지 오케이다.

"… 조심해. 이 악물어."

저런 말에 넘어간 자신이 너무 분했지만, 그냥 넘어 가는 건 말도 안 된다.

억지로라도 이 분함을 해소하기 위해, 엘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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