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 490화. 사랑과 전쟁 (2)
* * *
"아으어…."
"후으으…."
뜨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호연에게 복수하겠다며 올라탄 루시와 몸을 핥아오던 루미도 침대에 쓰러진 채 잠들었다.
둘 사이에 낀 상태로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이호연은 몸을 일으켰다.
"… 이러다가 진짜 복상사하겠네."
쌍둥이도 성장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호연 혼자 가볍게 이겨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몇 번이나 사정을 받으면서도 계속 달라붙어온다.
기분 좋긴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밀리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클린."
손가락을 튕겨 주변을 정리한 이호연은 쌍둥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곤히 잠들어있는 둘은 사라진 이호연을 찾아 손을 꿈틀거리다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흐으응…."
"호연 씨이…."
이호연은 잠꼬대하는 루시와 루미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쓰다듬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귀여움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돌아가야지.
"내일은 수린 누나를 만나고… 임솔 교수님 면회도 있었지."
임솔의 면회.
연구실에 놀러 갈 때처럼 마음 편하게 갈 수는 없다.
풀 컨디션으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야한다.
쌍둥이의 방에서 나온 이호연은 룬의 결계를 펼쳤다.
루시와 루미를 만나긴 했지만, 이호연은 오늘까지 환자를 할 생각이었다.
"내일부터 움직이고, 오늘은 쉬자."
여자들과 노는 건 정말 즐겁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휴식도 필요했다.
하루 정도는 쉬자.
그 정도면 자연치유력 덕분에 풀 컨디션으로 돌아올 거다.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걸었다.
쌍둥이와 만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열심히 놀고 섹스까지 즐겼더니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다.
다행히 집까지는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호연아. 왔어?"
"응. 저녁 준비중이었나보네?"
남다은은 집에 돌아온 이호연에게 다가와 헤헤 미소를 지었다.
주인이 돌아온 강아지 같은 리액션에 이호연도 웃으며 남다은의 볼을 쓰다듬었다.
"으으응. 방금 시작했어. 거실에 앉아있을래? 금방 해줄게. 오늘은 내가 혼자 준비하거든."
"그래? 스칼렛은?"
"레베카 씨랑 스칼렛 씨는 거실에 있어. 아직 정리할 게… 앗."
"정리?"
"나, 나는 요리하러 가볼게. 불을 켜놓고 와서."
총총총.
남다은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앞치마가 귀여웠는데 아쉽네.
근데 마지막에는 왜 놀란 거야?
거실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앉아있는 스칼렛과 레베카가 보였다.
릴리아나는 그 옆에서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왔구나! 여기야 여기! 같이 놀자!"
"그래. 같이 놀자. 다들 뭐 하고 있었어요?"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남은 자리에 앉았다.
레베카와 스칼렛은 이호연이 오자마자 하던 작업을 집어넣었다.
"애기 아빠 왔구나. 그냥 처리할 일이 있어서, 서류 작업 같은 거."
"아하… 그러고 보니 레베카 씨는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으음, 그냥 이런저런 거? 인맥이 있으니까 먹고살 수는 있어."
심성이 착한 레베카라면 불법적인 일을 하진 않겠지.
하지만 스칼렛이라면 의심해볼 여지가 있지않을까.
고개를 돌린 이호연은 스칼렛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쓰윽.
스칼렛은 검지를 이용해 안경테를 올렸다.
동그랗고 귀여운 검정 뿔테 안경이었다.
안경을 쓰는 건 오랜만에 보네?
이호연은 스칼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스칼렛. 안경 썼네.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 길드에서 일할 때는 몇 번 본 거 같은데, 웬일이야?"
"아, 저도 모르게. 일에 집중할 때는 안경을 쓰는 게 버릇이라서요."
"뭘 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업무입니다."
"알려주면 안 돼?"
"알려드려도 상관은 없지만 길고 지루하실 텐데요. 한국 지부장에게 받은 업무니까요."
"… 그런 거라면 됐어. 안 들을게."
"그럼 저는 다은 양을 도우러 부엌에 가보겠습니다."
스칼렛은 안경을 챙겨 주머니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별 거 아닌 것 같으니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그때, 릴리아나가 이호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스마트워치로 화면 하나를 보여줬다.
"빨리 이거 봐봐. 내가 이번에 가상 세계 아이돌이라는 걸 해보려고 하거든?"
"그건 또 뭐야?"
"변하는 시대에 맞춰 서큐버스님도 변해야 한다면서 계약서가 날아왔어. 내 재능을 알아봤다는데 어때?"
"… 사기꾼 같은데. 애초에 지금도 잘 나가잖아."
"음, 그런가…. 재능을 인정해준 줄 알았는데. 나쁜 자식이었어."
릴리아나는 스마트 워치를 꾹꾹 누르며 메일을 차단했다.
맞다.
메일하니까 생각났다.
릴리아나에게 할 말이 있었지.
"… 맞아. 릴리아나. 오랜만에 어머님한테 편지나 써볼래?"
"편지? 으음…."
"싫으면 억지로 안 해도 괜찮아."
릴리아나가 지옥에 있는 어머니와 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계약서에 숨겨진 비밀조항이었다.
이호연은 볼 수 없고 릴리아나만 볼 수 있는 계약서에 숨겨진 마법.
정말로 지옥에서나 쓸만한 개같은 수법이다.
한참 릴리아나가 향수병에 걸렸을 때 몇 번 연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즐거웠고, 릴리아나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뜸해지고 답장이 성의 없어지며 그 후로는 연락을 안 했었다.
릴리아나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리며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물어볼 게 꽤 많다.
"아니야. 그때 답장이 너무 대충 오긴 했지만, 궁금한 것도 많아졌으니까."
"그래. 하나 꺼내 줄게."
스르륵
이호연이 머릿속으로 편지지를 떠올리자, 허공에서 편지지 한 장이 떨어졌다.
"애기 아빠. 그건 또 무슨 마법이야?"
"설명하자면 긴데… 저 편지로 지옥에 있는 릴리아나의 어머님과 연락하는 거예요."
"오호. 신기한 마법이네."
"이호연, 여기 써줬으면 하는 거 있어?"
"… 금제가 뭐냐고 물어보는 거 정도는 괜찮지?"
"으응. 알겠엉."
잠시 편지지를 보며 고민하던 릴리아나는 펜을 쥔 채 서서히 편지지를 채워나갔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조용한 거실에 펜 소리가 울려 퍼졌고, 훔쳐보기도 뭔가 이상했으니 이호연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가족에게 쓰는 편지를 보면 릴리아나도 민망하겠지.
… 아닌가? 보면서 피드백을 해줘야 하는 건가.
자신이 말을 꺼냈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잘 모르겠다.
"애기 아빠."
"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거나 같이 보자."
미소를 지은 레베카는 이호연에게 스마트 워치를 내밀었다.
비록 레베카는 릴리아나의 과거를 잘 모르지만, 상황을 파악할 능력은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자신이 풀어야 했다.
"고마워요. 레베카 씨."
그 마음을 느낀 이호연은 레베카가 내미는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스마트워치에서는 의사가 나와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뭐예요?"
"전문의가 말하는 임신 잘 되는 방법."
"… 아직도 신호가 없어요?"
"내일 병원에 가보려고."
최근에 레베카와 관계에 정말 많은 힘을 쏟았다.
심지어 사정을 받은 후에 정액이 나오지않도록 다리를 올리고 있는 것까지 도와줬는데, 아직도 임신이 안되다니.
임신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슬쩍 눈을 돌리자 레베카는 영상에 집중한 채 의사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듣고 있었다.
사실 저런 걸 보는 게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효과가 있다면 집에 있는 책만 봤어도 임신이 되었겠지.
하지만 레베카가 좋아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어색한 분위기보다는 이거라도 보는 게 낫기도 하고.
서걱서걱.
릴리아나는 고민하며 편지지를 채웠고,이호연은 레베카와 몸을 딱 붙인 채 '전문의가 말해주는 임신 잘되는 방법'을 시청했다.
*
홀짝.
와인 글라스를 입에서 뗀 엘리스는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놨다.
"excellent vin…."
극상의 와인.
역시 아껴놨던 고급와인답게 큰 만족감을 준다.
엘리스는 창문 밖의 풍경을 안주삼아 와인을 마시며 짧은 휴식을 즐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시내를 돌아다닐까 했지만,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는 바람에 집에 있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대신 조금이라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아끼는 와인을 열었다.
"후우…."
천천히 머리를 감싸는 취기에 몸을 맡긴다.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는 털어낼 수 있지만, 엘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한국에 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수재라고 불렸으니 한국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찾아온 첫 번째 벽은 너무나 높았다.
남다은.
그녀는 볼 때마다 자신의 앞에 있었다.
무심하게 휘두르는 검은 너무나 무거웠고, 엘리스의 몸에 있던 마력 장애는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호연의 도움으로 선천적 마력 장애를 고치며 차이를 좁혔지만, 그럼에도 남다은에게는 못미쳤다.
'전력으로 싸우면 이길 수 있으려나.'
남다은의 실력을 마지막으로 본 건 대련장.
그녀의 대련은 엘리스에게도 충격이었다.
대련장의 마법진을 두동강내는 검술이라니.
그 직후 충격으로 쓰러지긴 했지만, 남다은도 이호연 다음가는 실력자라며 꽤 이슈였다.
"… 이호연."
엘리스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호연.
그래. 그 남자가 문제다.
엘리스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엘리스를 가로막은 두 번째 벽.
최근 언니와 있던 이슈를 제외하고도, 엘리스는 이호연의 대련을 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걸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남다은이 강하긴 하지만, 엘리스도 남다은과 맞먹는 슈퍼 루키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10번 중에 3~4번은 이기지 않을까.
하지만 이호연은 다르다.
그의 마법은 너무나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10번 싸우면 10번, 100번 싸우면 100번 질 자신이 있었다.
'남다은과 같이 덤비면 이길 수 있으려나.'
잠시 모의 대련을 생각해봤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다은과 함께라면 10번 중에 2번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뭉뚱그릴 뿐이었다.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엘리스는 자신의 자신감이 푹푹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홀짝.
다시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간 엘리스는 서서히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역시 좋은 술이라 금방 취하는 것 같았다.
엘리스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찾아오든가. 연락을 먼저 하든가. 물론 그렇게 오래 지나진 않았지만…."
그 남자는 엘리스의 자신감을 깎는 걸로도 모자라 더럽게 바쁘기 가지 했다.
퇴원했다고 알려줬으면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잡아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자신만 매일 보고 싶어 하는 건가?
그가 환자인 걸 알아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투력은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여자와 비교해 매력이 밀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좋다고 했으면서… 거기에 언니 일도 있고… 으, 정말…!"
엘리스는 주먹을 쥔 채 테이블을 쿵쿵 내려쳤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추태지만, 몸을 감싸는 취기가 그녀가 투정을 부리게 만들었다.
쾅. 쾅. 쾅.
몇 번이나 테이블을 때리며 감정을 토해냈더니 화가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역시 장인이 제작한 마법 테이블은 튼튼했다. 들썩이기만 할 뿐 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후우. 그래. 내가 먼저 연락하면 되는 거지. 진정하자."
먼저 연락하는 것과 자존심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환자니까 병문안이라도 가볼까.
엘리스는 바로 옆 집의 마당을 내려다봤다.
이호연의 집.
엘리스의 집과 딱 붙어있으며두터운 결계가 쳐져있는 그곳에는… 다른 여자가 살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엘리스의 머리가 다시 뜨거워진다.
"화를 안 낼 수가 없잖아. 미친 바람둥이 새끼."
다시 엘리스의 눈이 찌푸려지려고 하던 그때.
스르륵
"… 어?"
이호연의 집을 둘러싼 결계에서, 아이린이 튀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