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화 〉 489화. 사랑과 전쟁
* * *
하루에 24시간. 1440분. 86400초.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상대성 이론 같은 복잡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주말을 보내는 사람과 월요일 아침을 맞은 사람이 느끼는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순식간에 몇 시간이 지나가지만, 공부나 일을 할 때는 5분마다 시계를 보게 된다.
슈슉. 스르르륵.
지루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임솔은 눈앞의 큐브가 돌아가는 걸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무색의 마력 큐브는 임솔의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공중에 뜬 채 자동으로 돌아갔다.
마력을 사용해 큐브에 새겨진 패턴을 역산하는 아카데미의 수업 교제.
심심풀이로는 나쁘지 않지만, 임솔 정도의 마법사라면 눈 감고도 맞출 수 있는 난이도였다.
'… 병실은 너무 조용해.'
조용한 건 매일 지내는 연구실도 마찬가지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으려니 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임솔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제자인 이호연.
그 남자가 문제였다.
'아영이한테 들키지만 않았어도…아니, 걔는 회복이 왜 그렇게 빠른 거지?'
대련이 끝난 뒤, 임솔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옥상에 끌고 간 것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진지한 고민과 대화 직전에는 바깥공기를 맡아야 했다.
다만 천재 마법사 임솔도 저녁 공기가 생각보다 차갑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무리하게 움직인 임솔은 이호연이 퇴원한 뒤에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이제…진도만 나가면 되는 거잖아.'
남자와 애정을 나누는 행위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비록 본방은 아니었지만, 이호연과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야한 일을 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되는건데….
"…."
꿀꺽.
임솔은 침을 삼켰다.
최대한 자신감을 가지려 해도, 여자로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첫 경험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임솔이 마법을 제외한 일을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때가 되니 너무나 떨렸다.
결국에는 자신도 여자인걸까.
이호연의 얼굴을 생각하면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럴 때는 단 걸 먹어야 하는데…아영이가 당분간 환자식만 먹으라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제자의 달콤한 정액을 못 먹은 지 좀 오래된 것 같다.
어쩌면 컨디션 저하의 이유가 당분 부족일지도 모른다.
임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연도 문제였다.
자신이 아직 입원하고 있는데 백아영이 퇴원하라고 했다는 이유로 곧바로 퇴원해버리다니.
아니, 그것까지도 좋다.
적어도 자신의 옆자리를 계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은 이호연 밖에 없는데, 이호연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너무 추한 질투인가.'
후발주자 주제에 질투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억울한 걸 어떡해.
조금은 더 신경 써줘야지.
임솔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슈욱
마력 큐브에 들어가던 마력이 흐트러졌다.
"집중력이 흐트러졌어. 솔이 너. 딴생각하고 있구나."
백아영은 힘없이 이불 위로 떨어진 마력 큐브를 집어 들었다.
병실의 임솔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하는 건 재활훈련.
망가진 마력 회로를 치료하긴 했지만, 마력을 움직이는 느낌을 되찾는 건 임솔이 해야 할 과제였다.
임솔은 환자 중에서도 VVIP였으니, 성녀인 백아영이 많은 시간 붙어있었다.
"마력 큐브가 만만한 게 아니라니까. 솔이 네가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해도 재활을 할 때는 내 말을 들어야 해."
"… 아영아. 나한테 큐브 맞추기 세계 신기록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심심풀이로 나갔던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잖아. 그 뒤로 아무도 못 깨고 있어."
"그건 그거고, 지금은 재활이잖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임솔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솔직히 이런 마력 큐브를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느끼기에 몸이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정도는 더더욱 아니다.
당장이라도 병실을 뛰쳐나가 제자를 만나러 가거나 연구실에서 마법 연구를 이어가고 싶었다.
"아영아. 근데 나 정말 괜찮아졌어. 지금 당장 퇴원해도 문제없을걸?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다가 일주일 내내 굶어서 연구실에서 쓰러진 건 기억 안 나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크흡."
임솔은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찡그렸다.
백아영이 임솔의 옆에 대기하는 이유가 이 것이다.
마력 회로가 진탕이 났으니 예고없는 고통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백아영은 익숙하게 마력을 일으켰다.
지이잉.
밝은 치유의 마력이 임솔의 몸에 스며들고, 구겨진 임솔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진다.
백아영은 성녀라는 이름에 맞게 순식간에 고통을 잠재웠다.
"… 고마워."
"봤지? 그럼 다시 시작해."
임솔은 백아영이 건네주는 마력 큐브를 받은 채 얼굴을 붉혔다.
건강하다고 자신해놓고 곧바로 추태를 보이다니. 이런 창피한 상황이 또 있을까.
혹시나 백아영이 일부러 자신을 골리기 위해 고통을 준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슈슉 슈르륵
물론 그럴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임솔은 조용히 큐브를 집어 들었다.
조용한 병실에 마력 큐브가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 찬다.
임솔은 집중력을 발휘했다.
곧 큐브의 모든 면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임솔은 고개를 돌렸다.
"아영아. 다 맞췄어. 이제 쉬어도 되지?"
"아니. 다시 처음부터 해야지."
"그건 진짜 고문이야…."
"애도 아니고 정말. 계속 그러면 면회도 금지할 거야."
"…미안."
마력 큐브를 내려놓으려던 임솔은 자신이 맞춘 큐브를 직접 섞기 시작했다.
하아.
서운한 표정을 짓는 임솔을 본 백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마음 같아선 퇴원시켜주고 싶지만, 몸의 이상이 눈에 보이는데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계속 보고 있을 거니까 완벽히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는 다른 거 금지야."
"안돼. 오늘 면회 있어."
"호연이야?"
"…응."
"호연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그래도 그때까지는 큐브를 맞추는거야."
백아영과 임솔은 동맹관계였다.
딱히 동맹관계라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방해를 하기는 싫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싸웠어. 중요한 대련도 아닌데 자존심이 뭐라고. 입원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면서."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뜻이야?"
백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존심이 아니라면 대련장을 반파시킬 정도로 싸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냥…여러 감정이 있었어."
"흐음. 그래. 설마 솔이가 멍청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
임솔은 생각했다.
멍청한 행동의 기준이 뭘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운명의 상대에게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것.
평범한 사람들은 그걸 멍청한 행동이라고 부르진 않겠지.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음음.
임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큐브에 집중했다.
*
"차라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스칼렛 양."
홀짝.
조용한 거실.
집주인도 모르는 사이 거실에 들어온 아이린은 스칼렛이 내주는 커피를 받아마셨다.
"오호…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애기 아빠가 검은 기둥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알았지만, 설마 매일같이 들렸을 줄이야."
"레베카 씨. 그 검은 기둥이라는 게 중요한 건가요.호연이랑 무슨 상관인거에요?"
"아직은 연관성을 찾는 단계입니다."
이호연의 집에 사는 여자들은 아이린이 가져온 자료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 번이나 오긴 했지만, 아직도 이 집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이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냠. 스카웃. 커피 더 있어?"
"아직 한 입도 마시지 않았는데 제 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설탕은 테이블에 있습니다."
"응. 먹을랭."
과자를 와구와구 집어먹고 있는 이 집의 실세.
릴리아나라는 여자.
볼 때마다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도 남들이 지적하지 않는 걸 보면 이호연에게 제일 총애받는 여자가 아닐까.
참고로 레베카와 스칼렛은 실무를 담당하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나름대로 여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쌓았다.
혹시라도 이 여자들과 경쟁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엘리스를 위해서라도 대비해야 한다.
"아이린 양. 오늘도 애기 아빠를 봤다고 했지? 어디로 갔는지는 못 본거야?"
"네. 그는 저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만약 뒤를 밟았다면 곧바로 눈치챘을 겁니다."
"그렇겠지? 아, 말은 편하게 해도 된다니까. 처음 봤을 때는 반말했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 아이린 양."
"아….알겠어. 레베카."
"저한테도 하던 대로 하십시오. 아이린 님."
"…응. 스칼렛."
"스칼렛 양. 애기 아빠가 오늘도 들린 건 확실히 수상해. 이미 마법진은 완성되었을 텐데... 더 정보가 필요하진 않을 거야."
"예. 이건 다음에 한 번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스칼렛은 아이린이 말한 정보를 토대로 무언가 적고 있었고, 아이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커피를 마셨다.
첫 만남에는 당황해서 반말을 뱉었지만 본래 아이린은 조금 더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아이린 씨. 첫 만남이 조금 더 좋았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 아니야. 남다은 양. 고마워."
그때, 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에게 구원 같은 목소리.
이 여자들 중에 유일한 양심인 남다은이었다.
대체 이런 착한 여자가 왜 이호연과 살고있는 걸까.
아이린은 고개를 숙이는 남다은을 보며 손을 저었다.
"아니야. 다은 양이 사과할 필요가 어디 있어. 다 이호연 탓이지."
"……방금,뭐라고 하셨어요?"
"…다 내 탓이야. 미안해."
"아하. 아니에요. 아이린 씨. 아, 다음에 오시면 저희 집 구경이라도…."
아이린은 방긋방긋 미소를 짓는 남다은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뭐였지?
날카로운 감각으로 말을 돌리긴했지만분명 살기가 느껴졌는데….착각인가?
"그러고 보니 아이린 님. 저희를 습격했던 루시퍼에 대한 정보는 없으십니까?"
"아, 응. 조사 팀을 따로 파견했는데도 정보가 딱히 없어. 하필 타이밍도 안 좋아. 전 세계에서 판데믹의 테러가 급격하게 늘어서 조사가 원활하지 않거든."
"흐음…맞아. 아이린 양. 검은 기둥과 판데믹의 연관성은 있는 거지?"
"학계에서는 새로운 던전일지도 모른다고 발표하고 있지만…그런 구조물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으니, 판데믹의 소행이라고 보는 게 정설이야.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겠지."
"확실히…판데믹은 종교단체 같은 곳이거든. 내가 있을 때에도 마왕을 소환한다는 목표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던 놈들이었어."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의 판데믹을 생각하면, 지금 무슨 짓을 하고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일종의 종교적인 구조물이 아닌가 하는…에? 잠시만. 네가 있을 때라니?"
"생각해보니 아이린 님은 모르시는군요. 레베카 님은 판데믹에 잠시 소속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뭐, 아이린이라면 말해도 되겠지."
"에? 으응?"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빠르게 반응한 남다은이 커피가 쏟아지기도 전에 커피잔을 테이블에 원위치시켰고, 그걸 본 아이린은 다시 한번 놀랐다.
"어, 어떻게…아니, 나랑 같이 작전도 했는데…어?"
"혼란스러워하지 마. 그때는 나쁜 짓도 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어."
"…그렇구나. 후우. 음. 그럴 수도 있지."
아이린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신은 아이리스 길드의 1팀장.
겨우 이 정도로 당황해서는 안된다.
"스카웃이 쫓겨난 길드는 정보도 잘 못 구해오네."
"…릴리아나. 쫓겨나다니? 스칼렛은 직접 사표를 제출했고, 아이리스 길드는 절차대로 수리한거야."
"아니야. 스카웃이 자기 입으로 쫓겨났다고 인정했엉."
"…?"
아이린은 쿠키를 집어먹다가 대화에 끼어든 릴리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확고한 표정.
그 괴리감 사이에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님."
"응? 아…."
릴리아나의 뒤에 서있던 스칼렛은 입에 검지를 올린 채 고개를 저었다.
릴리아나는 본래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엉뚱한 부분은 남다희보다 더하니, 차라리 대충 넘어가는 편이 낫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몇 번이나 놀림받아서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다.
'…역시 무서워.'
아이린은 스칼렛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스칼렛도 고집이 약한 여자는 아닌데, 쫓겨났다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그냥 넘어가다니.
역시 릴리아나가 서열 1위구나.
아이린은 몸을 쭈뼛거리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