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5화 〉 485화. 추리 (3)
* * *
빅토리아 공원의 구석.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이호연은 마력을 펼쳤다.
지이잉
이호연의 마력에 반응한 마법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비었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지옥의 마력.
마법진을 몇 번이고 살핀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은… 없네. 하긴, 누가 이걸 건드리겠어."
이호연은 천천히 마법진을 보강했다.
틀만 잡아놓은 마법진에 뼈대를 추가하고 살을 채워 넣는다.
가짜 던전 마법진 같은 대형 마법진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과정이 진행될수록, 마법진이 완성된 미래가 눈에 보였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겠지.
"…."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자신이 없을 때.
모든 게 귀찮아져서 해야 할 일을 미뤄놓고 다른 곳에 눈을 돌려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함은 남아있을 때.
굳이 생각하자면 시험기간이겠지.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대학생 시절에는 항상 그랬다.
공부를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다.
어차피 할 거 였으면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호연이 느끼는 감정이 그랬다.
이호연은 마법진을 최소한으로 건드리며 안정화했다.
하지만 임솔과의 대련 이후, 지옥의 마력을 다루는 실력이 자신도 모르게 엄청나게 늘었다.
이 마법진도 마찬가지.
무리한다면 오늘 안에 끝낼 수도 있겠지만, 이호연은 최대한 안정적으로 작업했다.
'이제 진짜 미룰 수 없어.'
알베도만 처리하고.
엘리스와 아이린의 관계만 풀고.
임솔과 대련만 이기고.
여러 변명을 했지만 아무리 미뤄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계가 찾아온다.
그때가 지금 아닐까.
더 이상 가짜 던전을 미룰 수가 없다.
"음… 잘 되겠지. 다른 방법은 없잖아. 이거밖에 안 돼."
나쁜 짓을 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고 싸우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이호연은 도저히 떠올리지 못했다.
스르륵
마법진 보수를 끝낸 이호연은 주변의 흔적을 정리했다.
마법진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보다 지옥의 마법을 잘 다루는 마법사가 오지 않는 이상, 들킬 일은 없겠지.
"고생하세요."
"옙. 이호연 생도도요."
아이리스 길드원에게 인사를 하고 공원을 빠져나온 이호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가로 향했다.
혹시 기둥 근처에 아이린이 있다면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대로 돌아간 모양이다.
'루시퍼에 대해서 정보를 아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그렇게 수상한 놈이 아카데미에 침입했으니, 뭔가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 생각해보면 모든 정보를 아이리스 길드에 기대는 것 같네. 이게 문제인가?'
이호연은 모든 정보 수집을 아이리스 길드에만 맡기고 있다.
그 시간에 여자들을 만나곤 했는데…. 몸이 좀 나아진 뒤에는직접 발로 뛰어볼까.
아무래도 지옥의 마력이나 마인에게는 자신이 좀 더 유리하다.
아이리스 길드가 얻지 못하는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슈슈슉
총총.
'오늘 교수 님… 아니, 솔이 병실에도 한 번 들려야겠지. 퇴원하기 전까지는 매일같이 들려야 해.'
사실 생각했던 건 많다.
너무 많아서 문제다.
마법으로 임솔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볼까도 했지만… 너무 과한 거 같다.
역시 적당히 놀리는 정도로 마무리해야 하나. 절정하는 교수 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슈슈슉
총총.
"… 하아."
이호연은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돈 이호연은 커다란 조각상을 확인함과동시에 커다란 조각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빨리 나와."
"…."
"…."
설마 말을 안 하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호연은 한숨을 쉬며 조각상 뒤로 걸어갔다.
"언제까지 쫒아오나 봤는데… 왜 계속 내 뒤에 있는 거야?"
"히익…."
"호, 호연 씨…."
대체 어떻게 눈치챈거지?
조각상 뒤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와 루미가 계속 이호연의 뒤를 쫓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호연의 뒤를 쫓아 빅토리아 공원에 가까이 간 둘은 이호연의 마력이 검은 기둥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서 만족했으면 좋았겠지만,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이 나올 때까지 공원 입구에 숨어서 기다렸다.
이호연의 고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음 목적지도 알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시와 루미는 이호연의 눈을 피하며 사과했다.
"어… 으음… 미안."
"죄송합니다…."
"… 죄송할 건 없는데, 서프라이즈 파티도 아닌데 왜 쫓아온 건가 궁금해서 그래."
이호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이리스 길드도 아니고 루시와 루미가 자신의 뒤를 캐려고 할 줄이야.
이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그게…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말을 안 하길래 우리가 해결해주려고…."
"죄송해요…. 앞으로는 호연 씨한테 먼저 얘기할게요."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인 사과하는 루시와 루미를 보며 이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 아니야. 내가 미안해. 걱정하게 만들었구나."
고민이 있어 보였다…. 이건 결국자신의 잘못이다.
그 많은 여자들을 책임질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이런 걱정이나 하게 만들다니.
'이제 진짜 주의해야겠네.'
사실 얼마 전부터 주변의 여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시작하긴 했다.
루시와 루미가 이 정도라면, 눈치 빠른 다른 여자들은 더욱 주의해야한다.
혹시나 가짜 던전 계획 전에 들키기라도 하면 문제가 된다.
"이호연. 화났어…?"
"호연 씨. 다시는 안 그럴게요."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물론 그건 그거고. 루시와 루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오늘은 좀 열심히 놀아야겠네.
*
"좋은 카페가 있어. 금방 나와."
"호연 씨도 좋아할 거예요."
"그래? 기대되네."
이호연은 양손에서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거리를 걸었다.
그야말로 양손의 꽃.
몸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가벼운 인식 저해 결계 정도는 가능했다. 덕분에 아카데미 상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3명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그래서 계속 검은 기둥 주변에…?"
"응. 연구를 위해서."
"헉. 어쩐지… 임솔 교수님이 맥없이 쓰러지는 게 이상하긴 했어."
"맥없이 쓰러지진 않았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호연은 대련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느낀 감정과 압박감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딸랑
어서오세요~.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고, 대충 맛있어 보이는 걸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루시와 루미가 좋아하는 간식이다.
"호연 씨… 이거 드세요."
"응, 고마워."
남.
루미가 떠준 케이크를 입에 넣은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초콜릿이 입에 퍼지는 기분 좋은 단맛이었다.
"맛있네. 내 취향인 달콤함이야."
"그렇죠…? 헤헤."
"내 것도 먹어. 딸기 케이크야."
이호연은 미소를 지으며 루시 루미와 데이트를 즐겼다.
루시와 루미랑 있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
같이 지내던 친구라 그런 걸까. 아니면 동생 같은 귀여움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호연은 멍하니 루시와 루미를 쳐다봤다.
확실히 둘은 귀여웠다.
범상치 않은 외모와 귀여운 몸과 맞지 않는 몸매.
비슷하게 생긴 두 명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면 마치 동화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런 애들을 내가 가져도 되는 걸까.'
이호연은 자신의 여자들을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그러세요. 호연 씨?"
"케이크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줄게."
"응. 많이 먹어."
이호연은 피식 웃었다.
자신을 보고 방긋방긋 웃는 둘을 보니 뭐든 좋았다.
느긋하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3명은 카페를 나왔다.
평소라면 금방 해산했겠지만, 이호연은 오늘 루시와 루미에게 시간을 쏟을 생각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여자는 많아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제대로 해본 경험은 손에 꼽았으니, 가끔은 이렇게 놀아야 했다.
"이거 어때?"
"예뻐."
"호연 씨… 저는요?"
"응. 루미도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뭐야. 루미한테 더 신경 써주는 거야? 칭찬이 더 길어."
"루시는 새하얀 계열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헤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옷 가게에 들어온 이호연은 루시와 루미의 옷을 골라줬다.
둘이 키득키득 웃으며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간 동안.
이호연은 주변을 살폈다.
'… 저건 다은이한테 잘 어울리겠네.'
패션에 일가견이 없으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참한 복장이라고 해야 하나.
얌전하고 단정한 게 딱 남다은의 스타일이다.
저 붉은 드레스는 레베카.
새하얀 자켓은 백아영.
진한 노란색 셔츠는 엘리스한테 잘 어울리겠네.
"언제 한 번 선물 쇼핑이라도 와야겠다."
주변 여자들의 스타일이 곧바로 떠오르는 걸 보면 기억 능력이 꽤 쓸만하다.
다만 아쉬운 건 지금처럼 떠올리려는 노력을 해야만 떠오른다는 것.
"식사는 루미가 좋아하는 떡볶이로 하고…. 음?"
멍하니 앉아 옷을 구경하며 루시와 루미가 나오길 기다리던 이호연은 눈을 얇게 떴다.
순간적으로 몸을 스친 이질적인 감각.
이상함을 느낀 이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답답함.
한 번 느낀 갈증과 짜증은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
마에스트로.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어릴 적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기 싫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있는 기억은 어느 순간 깨달아버렸다는 것뿐.
자신은 현세에 지옥을 소환하고 인간을 멸망시킬 '운명'을 가진 인간.
지옥을 현세에 구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분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고, 사지에 힘이 빠졌다.
그렇기에 판데믹을 만들었다.
인간은 없어져야 할 존재. 마인은 이용하기 편한 존재.
자신이 소환하는 마왕은 지구를 구할 영웅.
비록 이 한 몸을 희생하더라도 마왕을 소환해야 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마에스트로의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 제일 편했다.
"… 오늘도 없군."
그는 루시퍼가 지내는 방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루시퍼는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호연과 지옥 동화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적이라는 것.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변인에게 모든 걸 의존할 순 없다.
"기둥이 나타난 세상에도 적응했으니… 다시 시작해야겠지."
검은 기둥에 대한 조사는 완벽히 끝났다.
마인들도 이제는 욕구가 쌓여있을 터.
딱
마에스트로는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마인이 마에스트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에스트로 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인들에게 불만이 쌓여있다고 하던데요."
"검은 기둥이 나타난 뒤로 활동하지 못한 몇몇 마인들이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리신다면 모두 목을 쳐…."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예?"
"마음대로. 앞으로 판데믹에게 테러 활동의 제한은 없습니다.'
인간 세상을 멸망 시킬 날이 곧 다가온다.
지옥의 동화와 마왕의 등장또한 운명.
과연 멸망을 막을 운명을 가진 자가 자신보다 뛰어날 것인지.
그것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