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화 〉 483화. 추리
* * *
"아, 나는 나갈게."
"그냥 있으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편하게 얘기해."
총총.
아이린의 배려를 받은 이호연은 정면을 바라봤다.
푸른 마력구에서 떠오르는 홀로그램 모니터 같은 화면.
화면 너머로 보이는 케이론과 알베도는 나란히 서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일단은 루시퍼를 만난 얘기부터 해야겠지.
이호연은 최대한 간결하게 루시퍼를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루시퍼의 능력이나 특징은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자신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루시퍼가 말했던 금제라는 단어.
"그래서…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금제가 뭐냐는 거지."
금제 말인가.
"그래. 금제."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그것을 금제라고 하지.
케이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간 세상에 오래 살았으니, 자신도 어려운 단어는 알고 있었다.
"야. 케이론.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내가 금제의 뜻을 모르겠어? 지옥에서 '금제'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거 없냐고."
릴리아나에게 무언가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 '무언가'가 금제인 것도 예상하기 쉬운 일.
루시퍼가 금제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건, 금제라는 단어가 지옥에서 통용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케이론과 알베도를 찾았다.
기억이 없는 릴리아나라면 몰라도 케이론과 알베도는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단서부터 천천히 찾아내면 릴리아나의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겠지.
금제라. 나는 잘 모르겠군. 용병계에서 꽤나 오래 굴렀지만 그런 단어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도움이 안 되네."
음. 하지만 내가 모른다면 지옥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옥에서 Wild Gladiator의 눈 밖에 있는 건 많지 않으니.
… 괜찮은 추리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이호연은 아쉬운 한숨을 삼켰다.
이러면 금제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는 없겠지.
금제… 저는 아는 게 있습니다.
"뭐? 알베도. 자세히 말해봐."
아쉽게 포기하려던 순간. 가만히 듣고있던 알베도가 입을 열었다.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에게 전해지는 비술. 합의 하에 이성의 감정이나 기억을 지우는 마법입니다.
Strange Nightmare. 인큐버스에게도 그런 비술이 있었나?
그래.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에게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기술이다. 루시퍼가 그 기술을 알고 있는 게 의문이지만… 그는 마왕 쟁탈전의 승자였으니 아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그 마왕 쟁탈전이라는 건 뭔데? 그냥 제일 강한 놈이 마왕 하는 거 아니야? 지옥은 실력이 최우선이라면서."
지옥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이었다.
그냥 후계자들끼리 싸워서 이기는 놈이 마왕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세력을 만들고 경쟁을 하는 걸까 의문이었다.
마왕성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강한 마족임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왕성?"
그래. 마왕이 되는 순간, 마왕성의 마력이 몸에 깃든다. 지옥의 생명체라면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과 위엄. 그리고 많은 정보들. 그것이 마왕의 특권이지.
"그럼 마왕이 되는 순간 너무 강해지는 거 아니야? 원래 강한 놈이 마왕을 하는데, 거기서 마왕성의 마력까지 받으면 어떡해.
그게 무슨 문제가 있지? 지옥은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강한 지배가 없으면 마족과 마수의 본능을 억제할 수가 없어.
"그래도, 음…."
이호연은 고민을 멈췄다.
생각해보면 문제일 건 없지.
이게 게임도 아니고, 지옥의 지배자가 강하더라도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루시퍼가 말한 금제랑 알베도가 아는 금제랑 똑같다는 거야?"
Strange Nightmare. 혹시 더 아는 게 있나?
… 케이론은 은거해서 몰랐겠지만, 지옥의 상위 계층에게 수상한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수상한 소문?"
마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마력을 가진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지옥의 질서를 위해서는 이레귤러를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그런 소문이었습니다.
지옥의 질서를 유지하는 마왕성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지능이 낮은 마수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지능이 높은 데다가 무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알베도의 말을 들은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그게 릴리아나라는 말이야?"
정확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그 소문을 듣고 나서 얼마 후에 릴리아나 님이 사라졌습니다.
지옥의 사교계에 퍼졌던 소문.
금방 사라졌기에 단순 가십거리인 줄 알았지만, 루시퍼의 말이라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알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큰 소문이 아니었고, 릴리아나 님과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에 넘어갔습니다만, 루시퍼가 그렇게 말했다면 의심할 여지가 있습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 확실히 Killer Queen에게는 여러 의문이 있지. 서큐버스답지 않게 강했던 점도 이상했고, 그렇게 강한 여자가 인간 세상에서 기억을 잃은 채 살고 있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케이론과 알베도의 말에,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 뭔가 석연치 않은데. 릴리아나가 마왕을 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야?"
저도 확실한 사정은 모릅니다. 큰 소문도 아니었고, 순식간에 사라진 괴담 중 하나였으니까요.
꾸벅.
이호연은 손을 비비며 고개를 숙이는 알베도를 보고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지옥 놈들이 이상한 건 알고 있지만,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일단 릴리아나에게 금제가 걸린 건 거의 확실하잖아. 알베도. 네가 뭔가 할 순 없어? 너도 인큐버스 중에 최고라면서."
제 수준과 맞는 금제였다면 풀었겠지만, 릴리아나 님을 만났을 때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술사의 힘이 저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금제를 건 게 누군데? 서큐버스나 인큐버스만 걸 수 있다면서. 이성에게만 사용 가능하다면 인큐버스 아니야?"
지옥에 저보다 뛰어난 인큐버스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있어요. 마왕의 정부인 서큐버스 퀸. 전투력은 부족하지만 매혹과 마법의 영역에서는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서큐버스 퀸이면 릴리아나 엄마잖아."
예. 저도 이해는 안 되지만… 만약 릴리아나 님이 금제에 걸렸다면 그 가능성밖에 없겠군요. 서큐버스 퀸이라면 이성에게 걸어야 한다는 제약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겁니다.
이호연은 눈을 찌푸렸다.
들을수록 답답해진다.
기회가 된다면, 지옥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부숴야겠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들.
그래도 조금 긍정적인 건 릴리아나의 기억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것.
서큐버스 퀸만 만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물론 서큐버스 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 음… 이제부터는 내가 생각해볼게. 더 아는 건 없는 거지?"
제가 지옥에 있었다면 정보를 더 찾아봤겠지만….
나는 금제라는 걸 처음 들어보는 군. 미안하다 인간. 루시퍼에 대한 정보라면 줄 수 있다.
"루시퍼에 대한 정보는 괜찮아. …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서면으로 써서 전달해줘. 금제에 대한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원작에도 정보가 많지만, 혹시 모르니 받아놓자.
알겠다. 잘 있어라 인간. 내 친우인 엘리스 소녀에게도 인사를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래.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사고 치지 말고 잘 지내라."
이호연은 케이론과 알베도에게 인사하며 연결을 종료했다.
알베도는 개인적으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행히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끼익.
"다 끝났어?"
"네. 오래 걸려서 죄송해요."
"아니야. 이 정도면 괜찮아. 차라도 한 잔 하고 갈래?"
이호연은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직 환자라서요. 좀 쉬어야 할 거 같아요."
"아… 맞다. 아무렇지도 않아해서 까먹었어. 너 대체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요.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 쉬어야 해요."
"알겠어. 엘리스도 곧 올 거 같았는데…."
"다음에 꼭 올게요. 진짜 피곤해서 그래요."
피곤하기도 하고 생각할 것도 많다.
이호연은 아쉬워하는 아이린을 뒤로한 채 엘리스의 집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여러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외출했던 여자들이 돌아왔겠지.
예상대로,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릴리아나가 걸어왔다.
"에엥. 퇴원했다고 해서 왔더니. 어디 갔다 온 거야?"
"잠깐 일이 있어서. 너는?"
"나는 레베카하고 스카웃하고 장 보고 왔는뎅."
"조심해야지. 막 돌아다니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얼마 전에 루시퍼도 만났잖아."
"으음… 그렇긴 하지만. 밥은 먹어야행."
"당분간 배달만 시켜먹어."
아마 레베카와 스칼렛은 릴리아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움직였겠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다.
"웅…."
"걱정돼서 그래. 집 밥이 먹고 싶으면 내가 사다줄게."
이호연은 릴리아나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안에 엄청난 힘이 봉인되어 있다니. 아무리 봐도 안 믿긴다.
릴리아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호연의 시선을 받았고, 피식 웃은 이호연은 릴리아나를 끌어안았다.
"에휴. 이리 와."
"으응?"
이호연은 릴리아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서큐버스 특유의 부드러운 살결이 기분 좋았다.
"뭐야. 낫자마자 내 몸을 노리는 거야?"
"그건 밤에."
그나마 다행인 건 릴리아나의 상태가 좋다는 것.
케이론을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공황상태였지.
★ 히로인 상태창
[릴리아나]
[ 호감도 : 99 ] ( + 3.8 )
[ 성욕 : 90 ]
[ 식욕 : 50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이호연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여러모로 신경 쓰이긴 하지만, 결국 이호연에게 릴리아나는 릴리아나일 뿐이다.
"나만 믿어. 릴리아나."
"응. 당연하지."
이호연은 마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릴리아나의 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
"흐음…."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에 손을 뻗었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당분간은 아카데미도 쉬어야겠지.
그런 대련을 봤으니 아카데미에서도 허락해줄 거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다 끝난 거 같은데.'
백아영의 말로는 임솔은 나보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한다.
보상을 받으려면 회복할 시간을 줘야겠지.
자신도 환자에게 요구하는 변태는 아니다.
"맞다. 퇴원했다고 말은 해야지."
삑. 삑. 삑.
이호연은 침대에 누운 채 메시지를 보냈다.
엘리스, 문수린, 루시 루미 자매까지.
가장 빨리 답장이 온 건 문수린.
수린 누나 : 미안해. 빨리 보러 가지 못해서. 뒤처리를 하고 있었거든.
나 :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오후에는 어디 갔던 거예요?
수린 누나 : 아. 잠시 누가 찾아와서, 중요한 얘기를 좀 했어.
'나랑 헤어지고 누구랑 만난 거지?'
오후 대련 때, 수린 누나가 안 보였던 시간이 있었다.
학생회 일일까.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 이호연은 금방 머리에서 지웠다.
띠링
그때,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
루시 : 이호연. 지금 만날 수 있어?!
루미 : 호연 씨, 혹시… 만날 수 있을까요?
"… 뭐야?"
약속한 듯이 동시에 도착하는 메시지를 보며, 이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