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화 〉 480화. 임솔 (6)
* * *
아프다.
몸에서 느껴지는 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흑. 흑흑….
블러드 비트를 극한까지 사용해 마나 회로는 진탕이 났고, 이미 마나 회로가 박살난 상태에서 억지로 마나를 짜냈다.
'이 정도로 아팠던 건 처음인 거 같은데.'
비슷한 경험은 꽤나 있었다. 입원을 한 기억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심했다.
온몸을 망치로 강타당한 것 같다.
돈가스 망치에 맞아서 넓게 펴진 고기가 이런 느낌일까.
적어도 며칠은 못 싸울 것 같은 느낌이다.
흑. 흐으윽… 끄흑. 여보. 으으흑.
"…."
아직도 온 몸이 아팠지만, 옆에서 들리는 서러운 우는 소리가 이호연의 잠들어있는 의식을 깨웠다.
천천히 의식이 각성한다.
눈을 깜박거리고, 자신의 목이 좌우로 움직이는 걸 느낀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침대에 얼굴을 박고있는 귀여운 정수리가 보였다.
너무 서럽게 울고 있으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네.
"… 아영 씨."
"으흐윽..? 응? 아. 여보…. 흐으으윽. 드디어 일어났어."
백아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호연에게 안겼다.
미소를 지은 이호연은 백아영을 한 팔로 끌어안은 채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걱정했나 보네."
"같이 놀자고 했으면서 여기로 놀러 오면 어떡해… 흑. 너무해요."
"…."
생각해보니 그랬었지.
대련이 끝나고 시간이 나면 같이 놀기로 했었다.
정작 싸우다가 기절해버렸으니 너무 걱정을 시킨 모양이다.
"그래도 아영 씨 덕분에 살아있네요. 너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는데."
"… 여보의 몸 상태도 심각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빨리 치료가 되어서... 문제는 솔이였어요."
"아, 맞아. 임솔 교수님은요? 괜찮은 거 맞죠? 마지막에 피를 흘리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진정해요. 옆에 있으니까."
"옆에?"
이호연은 그제야 바로 옆 침대를 발견했다.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임솔.
가슴이 조금씩 올라가는 걸 보면 숨은 쉬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고마워요. 아영 씨."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내가 없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둘 다 왜 그러는 거야? 단순한 대련이었잖아."
"… 그러게요. 죄송합니다."
이호연은 눈을 부릅뜨고 화내는 백아영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임솔이 연구실에서 끝까지 준비하던 것처럼, 이호연도 오늘 모든 걸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다.
'… 그래도 이겨서 다행이네.'
이호연은 자고 있는 임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 증폭부터 지옥의 마력까지. 모든 걸 다 사용했다.
만약 이번에도 졌다면 정말 10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이호연은 다시 백아영을 끌어안았다.
"다행이네요."
"…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니."
"아영 씨가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요. 일어날 때까지 간호해줘서 고마워요."
"으… 여보…."
토닥토닥.
이호연은 울상을 지으며 안기는 백아영을 다시 끌어안았다.
역시 백아영과 레베카를 믿길 잘했다.
폭발에서 대련장 마법진을 보호했던 게 레베카였던 것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감사해야지.
"그래도 눈을 떴으니 다행이야. 이제 여보가 솔이도 좀 봐주면 좋겠네. 계속 있기에는 할 일이 많아."
"제가 깨어날 때 까지 있어준 것도 고마워요. 임솔 교수님은 제가 챙길게요."
"으으응."
이호연은 기쁜 듯 웃는 백아영의 손을 잡고 짧게 키스를 남겼다.
그 정도로도 헤헤 웃으며 돌아가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대련 전에 열심히 놀아준 보람이 있었다.
'…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이호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몸 곳곳이 쑤시긴 하지만, 높은 자연 치유력 덕분인지 걸을 수는 있었다.
"잘 자고 있어. 아주."
꾸욱. 꾸욱.
이호연은 임솔의 볼을 꾹꾹 눌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좋지만, 왜 하필 자신이 상대일 때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고.
적당히 져주면 얼마나 좋아.
"야. 임솔. 안 일어나면 덮친다."
조물조물.
조심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린다.
부드러운 볼을 지나 턱 선. 목을 훑고 쇄골까지 손가락이 닿았는데도, 임솔은 깨어나지 않았다.
"… 쩝. 진짜 자네."
자는 사람 가슴을 만지는 건 양심에 찔린다.
백아영이 괜찮다고 했으니 금방 일어나겠지.
임솔을 이기는 걸 계속 목포료 삼았지만, 막상 이기고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하고싶은 거 다 하게 해준다고 했었지.'
뭘 할 지는 천천히 고민해보자.
무조건 고생한 만큼은 받아낼 생각이다.
이호연은 임솔에게서 손을 뗀 후 병실 바깥으로 향했다.
나오자마자 익숙한 복도가 보였다. 몇 번이고 입원했던 아카데미의 vip 병실.
이번에도 백아영이 힘을 썼겠지.
'겨우 몇 시간밖에 안 지났구나.'
이호연은 스마트워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루 내내 잠들어있던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하긴,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지.'
이호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걸어갈수록 익숙한 마력이 느껴진다.
vip들이 사용하는 휴게실.
그곳에 룬의 결계가 쳐져있었다.
누가 봐도 이 쪽으로 오라는 신호.
이호연은 아직 말을 잘 듣지않는 발을 이끌고 휴게실로 향했다.
"오, 애기 아빠. 드디어 일어났네?"
"… 여기서 계속 기다리던 거예요?"
"한 시간 뒤에도 안 일어나면 갈 생각이었습니다."
이호연은 휴게실을 차지한 여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커피를 뽑아먹고 있는 릴리아나와 집 소파에 앉아있는 것 처럼 편하게 휴게실 의자에 앉아있는 스칼렛과 레베카.
의료팀에 있던 남다은까지 있었다.
"호연아. 몸은 괜찮아?"
"응. 다행히 살아있어. 다은이 너는?"
"나도 성녀 님이 잘 봐주셔서…."
남다은은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련 당시에는 살짝 불안정해 보였는데,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애기 아빠. 대련 승리 축하해. 다 지켜봤는데 역시 내가 도와준 덕이 컸던 거 같아. 맞지?"
"맞아요. 아, 그리고 레베카 씨가 마지막에 결계로 막아준 것도 엄청 컸어요. 고마워요."
"으응. 내가 해야지 뭐 어쩌겠어. 애기 아빠도 그걸 기대한 거잖아."
"그렇긴 하죠."
"근데 왜 그렇게 죽일 기세로 한 거야? 교수하고 사이좋다면서."
릴리아나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이호연에게 다가왔다.
"… 무조건 이겨야 하는 사정이 있었거든.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 줘서 고마워. 맞아. 다들 몸은 괜찮아요? 스칼렛, 너는? 입에서 피 맛이 난다며."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호연은 고개를 돌려 스칼렛과 눈을 마주쳤다.
레베카의 기억을 봤을 때, 모두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스칼렛은 이호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요즘 치료 마법 수준이 꽤 높으니까요."
"다행이네. 맞아. 루시퍼를 만났을 때 이야기, 더 있어?"
"루시퍼…?"
"레베카 씨를 덮쳤던 놈의 이름이에요."
[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지옥의 망나니들을 불러낸 자가 당신인가?
4마리의 망나니 중 하나를 골라라.
1.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
2. 지옥 아카데미 아다 폭격기 금 태양 인큐버스
3. 20년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4. 50살째 노처녀 거미줄 치기 장인 서큐버스
이호연은 기억 속에 있는 계약서를 떠올렸다.
4명의 망나니 중 마지막 한 명.
그것이 루시퍼다.
"사실 더 있냐고 물어봐도 말할 게 없긴 합니다. 치열하게 싸우긴 했지만, 상대의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
"… 으음. 나도 똑같아. 지옥에서 루시퍼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
"애기 아빠랑 비슷할거야. 특이한 점은 다은이가 엄청 활약했다는 거?"
"레, 레베카 씨.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다은이 가요?"
"다은 양이 치명상을 입혀서 아이린 님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레베카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남다은이 대련장에서 보여준 공격도 이해가 간다.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맞아. 엄청 멋있었어."
"릴리아나 씨. 감사해요."
이호연은 서로 칭찬하는 여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퍼에 대한 건 케이론이나 알베도에게 물어볼까. 아이린에게 부탁하면 연결해줄 거다.
남다은이 강해진 것도 나중에 확인해보자.
"루시퍼는 케이론한테 물어보고…. 아니다. 일단 이리 와 봐."
이호연은 양 팔을 벌려 눈 앞에 있던 릴리아나와 남다은을 끌어안았다.
임솔과 대련때문에 바로 챙기지 못했지만, 이호연은 마왕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루시퍼를 만나고도 모두가 살았다는 건 정말 기적이다.
"모두 살아서 다행이다. 정말로."
"으, 으음… 호연아."
"따뜻하당…."
남다은과 릴리아나는 이호연에게 몸을 맡겼다.
그 치열했던 싸움을 보상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애기 아빠는 역시 여자를 잘 다루네."
"그러게 말입니다."
"레베카 씨랑 스칼렛도 이리 와요. 살아있나 확인하게."
"나는 좋아~."
"부른다면 가야겠죠."
레베카와 스칼렛은 웃으며 이호연에게 다가갔고, 이호연은 네 명의 체온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판데믹의 본부,어두운 지하.
루시퍼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인간의 문물들은 꽤나 재밌었는데, 특히 이 턱시도는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지옥으로 돌아가 마왕이 된다고 해도 턱시도는 챙겨갈 생각이다.
"릴리아나 칼리오페. …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이 하나. 게다가 지옥의 마법진도 있었지."
아카데미에 다녀온 뒤.
루시퍼는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찾아냈다.
먼저 자신의 형제인 릴리아나 칼리오페.
릴리아나는 자신에게 걸린 금제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필 모든 힘을 되찾기 전이라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힘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호연… 인간 중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니."
아카데미에는 릴리아나가 아니더라도 흥미로운 존재가 있었다.
대강당에 잠입한 루시퍼는 이호연을 직접 바라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퍼의 마안은 모든 것을 읽어낸다.
하지만 이호연의 마력과 마법.그 모든 것의 원천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마왕성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스르륵.
루시퍼는 손 위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것은 이호연뿐 만이 아니다.
지옥의 마력이 듬뿍 담긴 마법진.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인간 세상에 지옥의 마력을 다루는 존재가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호연을 직접 눈으로 보기위해 들어간 대강당에서, 루시퍼는 더욱 엄청난 걸 목격했다.
대련의 마지막. 이호연이 사용한 마력을 루시퍼는 똑똑히 확인했다.
"그 검은 태양에는 분명히 지옥의 마력이 담겨있었다."
그것도 마법진에서 발견된 마력과 동일한 마력.
루시퍼는 우연히마법진의 주인을 알아냈다.
"인간이 마안을 피하면서 지옥의 마력을 사용한다라."
루시퍼의 마안은 마법진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호연이라는 인간은 루시퍼의 마안을 막아냈지만, 그가 만들어낸 마법진은 아니었다.
루시퍼가 발견한 인공 던전을 소환하는 마법진.
마법진의 주인에게 던전의 모든 권한이 주어지는 고급 마법진이었다
이 마법진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시퍼는 미소를 지었다.
"힘만 되찾는다면 내가 차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가 마에스트로에게 받은 부탁은 지옥의 동화를 돕고 이호연을 죽여달라는 것.
하지만 곧바로 죽여야 할 의무는 없다. 이호연을 어떻게 죽일지 선택할 권한은 루시퍼에게 있었다.
"마안을 막을 수 있는 이유를 알아낸다. 그리고, 마왕성을 되찾는다."
이호연.
루시퍼는 자신의 흥미를 이끄는 인간의 이름을 기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