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437화. 엘리스의 집에서 (2)
* * *
아이리스 길드는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지만, 동시에 프랑스의 대표 길드다.
정보를 지키려면 그만큼 힘도 가져야 하는 법. 아이리스 길드원들의 수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 보니 밤의 황제를 이을 아이리스 길드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도 쏠리고 있다.
실력이 있으면 대우해주는 아이리스 길드지만, 감히 후계자 자리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길드장이 딸을 아끼는 건 아이리스 길드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딸들이 가진 재능도 길드를 이어받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데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니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엘리스 아가씨 실력이 대단하지 않아?"
"이건 비밀인데, 2팀 팀장님과 대련에서 승리했다는 말도 있어."
"거짓말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아직 생도 신분인데…."
"쉿. 아가씨 나오신다."
치이익
"후우."
마력을 움직여 머리에 묻은 땀을 증발시킨 엘리스는 훈련장에서 빠져나왔다.
몸에 익숙해진 마력은 엘리스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선천적 마력 장애를 고친 이후, 처음엔 어색했던 마력도 이제 완전히 일체되었다.
본래 쌓아왔던 그녀의 검술과 마법이 섞이며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어냈고, 그 경지는 길드장인 아이작도 놀랄 수준이었다.
"소녀여. 마력이 많이 안정되었군. 처음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많이 성장했구나."
"… 네. 뭐, 고마워요."
엘리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훈련장 앞에 서있던 케이론을 지나쳤다.
저 마수가 아이리스 길드에 있는 건 아직 이해가 안 되지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열 마디의 말 중 헛소리 아홉 마디를 거르면 한 마디는 정말 좋은 조언을 해준다.
몇 주 동안 케이론과 아버지의 도움으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엘리스는 뿌듯함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갔다.
최근에 있던 대련에서는 2팀장까지 제압했다.
본래 엘리스의 재능은 세계관에서도 최고 수준.
원작보다 선천적 마력 장애를 일찍 치료하며, 그 부작용도 줄었으니 날아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프랑스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이호연을 본 지 오래 되었다는 것.
옆 집에 있으면서 방학동안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원 숙소.
엘리스는 익숙한 마법구 앞에 자리 잡았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마법구.
상대는 한국에 출장 가있는 아이린이다.
"언니. 잘 지냈어? 요즘 바빠 보이던데."
"엘리스. 걱정하지 마. 언니는 엘리스 얼굴 보는 걸로 피로가 다 풀려."
"응응. 너무 무리하지말고 집 관리 잘해줘 언니."
"무슨 일이 있어도 깨끗하게 유지할게. 엘리스. 언니만 믿어."
엘리스는 눈에서 꿀을 떨어뜨리는 아이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엘리스는 아이린이좋았다.
어릴 적에는 싸우고 다투기도 했지만,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로 챙겨주는 아이린을 보며 부정적인 감정은 대부분 사라졌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호연과 엮일 일이 없다는 것.
자신의 언니는 예전부터 연애와 담을 쌓고 살았다.
"한국은 언제쯤 오는 거야? 듣기로는 방학이 끝나야 온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럴 거 같아. 아직 내가 만족스럽지 않거든. 케이론하고 아빠한테 더 배워야 해."
"… 좀 더 일찍 와도 좋을 텐데. 나도 검술은 알려줄 수 있어. 한국에는. 음, 이호연 생도도 있고…."
"이호연?"
"이, 이호연 생도가 마법도 잘 쓰니까. 내가 검을 알려주면 이호연 생도한테 마법을 배울 수도 있잖아. 꼭 배우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아하. 그렇긴 하지."
아이린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횡설수설했다.
슬쩍 엘리스를 떠보려고 이호연의 이름을 꺼내봤는데, 자신이 더욱 당황한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이호연 생도하고 친하잖아. 연락은 했어?"
"호연이랑은 벌써 통화했어. 걔는 내가 늦으면 오히려 좋아할지도 몰라."
"… 아, 아하… 나랑 통화하기 전에 먼저 했구나. 그럴 수 있지."
"응. 아쉽다고 말은 하는데, 다른 여자들하고 놀 시간이 늘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엘리스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호연이 다른 여자와 노는 게 아쉽긴 했지만, 프랑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만큼 중요했다.
어차피 옆 집이었으니 한국에 돌아간다면 못 본 시간만큼 집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엘리스….'
아이린은 엘리스의 태도를 보며 꽤 놀랐다. 아이린은 엘리스를 어릴 때부터 지켜봤고, 그녀의 성격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남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엘리스가 저런 관대한 태도를 보이다니.
… 그리고 언니인 자신보다 이호연에게 먼저 연락을 할 줄이야.
방금 이호연을 생각하며 자위한 이후였기에 아이린은 괜히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은 언제나 엘리스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데, 엘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엘리스의 웃는 얼굴.
저 얼굴이 망가지는 게 싫어서 이호연과 거리를 두게 시킬 생각이었지만, 과연 그게 맞는 행동일까.
어쩌면 자신의 욕심은 아닐까.
아이린의 고민은 엘리스의 말에 끊겼다.
"언니, 무슨 생각해? 내 말 듣고 있지?"
"아. 음. 미안. 무, 무슨 얘기였지?"
"화동 던전에서 인큐버스를 만났다면서. 그건 어떻게 되는 거야?"
"아아… 응. 그건… 이호연 생도가 협력해주기로 했어. 직접 잡았다고 하던데."
"… 역시 비슷한 놈들끼리 끌리는 건가."
"하긴, 그럴지도…."
아이린과 엘리스는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는 언니의 공감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자매는 밤 내내 대화를 이어가며 웃음꽃을 피웠다.
*
알베도를 생포한 다음 날.
이호연은 방 안에서 알베도를 앉힌 채 연구 중이었다.
지옥의 마력과 인간의 마력은 차이점이 존재했다.
릴리아나는 이론에 약했기에 물어볼 수 없었는데, 알베도에게는 그나마 기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았다.
"하긴, 태어나서부터 지옥의 마력만 봤던 너한테 차이점을 물어봐도 모르겠지."
"예… 그렇습니다…. 저는 오히려 지구의 마력이 신기합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알베도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속세를 초월한 신선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이게 인큐버스의 숨은 재능 아닐까.
그리고 공손해졌다. 금태양 인큐버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힘이 다 빠진 거 같았다.
아무래도 남성 호르몬이 없어서 그렇겠지.
"뭐. 됐어. 생각보다 별 거 없네. 슬슬 가자."
이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베도를 감싼 마력 밧줄을 잡아당겼다.
곧 아이린을 만날 시간이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역시 죽는 겁니까…?"
"아니. 케이론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아…. 케이론…."
"아는 사이야?"
"아닙니다. 후계자들끼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다만 서로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흐음. 뭐, 알아서들 해. 케이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알베도는 아이리스 길드에 던져놓고 도망칠 생각이다. 그 뒤에 알베도가 어떻게 지내는지까지는 신경 쓸 생각이 없다. 연구를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해라.
케이론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설마 죽이진 않겠지.
이호연은 알베도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이린과 약속 장소는 멀지 않았다.
바로 옆 집. 엘리스의 집이었다.
"저 넓은 집을 아이린 혼자 쓰는 거네."
어제 엘리스에게 통화가 왔었다.
지금 프랑스에 있는 엘리스는 후계자 교육에 힘쓰는 중이다.
엘리스는 아마 방학이 끝나야 한국에 올 생각인 모양이다.
방학에 일정 조율이 조금 편해졌다. 그때까지 집에 있는 건 아이린 혼자였다.
"아이린… 사실 그냥 냅다 덮쳐도 될 거 같은데."
아이린이 엘리스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와 몸을 몇 번이나 겹치며 그 쾌락을 잊지 못한 것도 사실.
상태창으로 보기도 했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컷을 원하는 암컷의 눈빛.
아이린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덮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섹스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끼익
이호연은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고 엘리스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젯 밤, 이 시간대에 오겠다고 통보했다.
"… 연락에 답장은 했으면 좋겠는데."
"시간만 잡으면 됐죠. 뭘."
이호연은 팔짱을 낀 아이린에게 인사하며 마력 밧줄에 묶인 알베도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력 밧줄에 묶인 금발의 노인.
아이린은 알베도의 얼굴을 뻔히 바라봤다.
"… 이게 그 인큐버스라고?"
"네. 죽기 전까지 팼더니 이렇게 되던데요."
"확실히 금발이긴 한데…."
아이린은 눈을 찌푸리며 알베도를 살폈다.
분명 화동 던전에서 봤던 얼굴이 남아있긴 했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어. 어… 아니, 네?"
이호연은 알베도의 사과를 받고 당황하는 아이린을 보며 마음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정기 흡수 같은 복잡한 걸 말할 수는 없었으니, 대충 팼더니 늙어졌다고 속였다.
아이린은 그것만으로도 넘어가는 눈치였다.
"… 맞는 거 같은데. 인상착의도 그렇고 느껴지는 기세가… 아니, 조금 다르긴 하지만 확실한 거 같아."
"맞아요. 아니면 케이론한테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둘이 아는 사이라고 했거든요."
"케이론… 응. 그것도 보고할게."
이호연은 아이린에게 알베도를 양도했다.
인큐버스가 손을 떠나가니 드디어 해방된 느낌이었다.
이호연은 가뿐한 마음으로 아이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럼 보상은요?"
"… 보상?"
"네. 화동 던전에서도 꽤 활약했고, 인큐버스도 잡았는데."
실제로 그렇다.
화동 던전에는 s급 마인이 있었고, 문성민도 있었다. 게다가 매혹을 쓸 수 있던 알베도도 있었으니, 이호연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조사팀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보상. 그건… 내가 건의해볼게. 당장은 줄 수 있는 게 없어."
별생각 없이 해본 말인데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아이린을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저번보다 아이린의 적의가 많이 줄었다.
그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호연의 입장에선 저게 편했다.
"엘리스는 방학이 끝나야 온다는데, 아이린 씨는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거예요?"
"나, 나는… 다음 달 정도."
사실 아이린의 일정은 꽤 많이 남았다.
적어도 학기가 시작하고 몇 달은 한국에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이호연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살짝 거짓말을 섞었다.
"흐음…."
★ 히로인 상태창
[아이린]
[ 호감도 : 53 ] (+ 0.2)
[ 성욕 : 80 ]
[ 식욕 : 30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엘리스가 오기 전에 하고 싶은데… 여, 역시 직접 말을 안 꺼내면 내가 꺼낼 수밖에 없나….
이호연은 상태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린을 위해 직접 말해줘야지.
"인큐버스에 대한 보상이요. 아이린 씨한테 다른 거로 받아도 괜찮은데요."
"다른 거…?"
이호연은 아이린의 눈이 커지는 걸 보며 알베도의 몸을 마력으로 둘둘 감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