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화 〉 431화. 테러리스트와 협상은 없다
* * *
"… 진짜 괜찮은 거죠?"
"괜찮다니까."
"그래도 사람 몸이라는 게 원래 괜찮다 싶다가도 아프고 그런 거잖아요. 제가 연구실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임솔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는 제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라 같은 걸 어깨에 얹은 채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제자의 마음은 참 고마웠지만, 이호연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초췌한 상태였다.
어쩌면 자신보다 피곤할지도 몰랐다.
"괜찮으니까 돌아가. 이제 두 번은 안 말할 거야. 살짝 피곤할 뿐이지 제자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 으음.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저렇게 강하게 부정한다면 더 말리기도 힘들다.
사실 여기서부터 연구실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다. 혼자 보내도 괜찮겠지.
이호연은 마력 밧줄에 꽁꽁 묶인 알베도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힘들어…."
임솔은 이호연이 사라지는 걸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인큐버스에게 당한 매혹은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몸을 달팽이처럼 말고 버텼다.
이호연이 저항하지 말라고 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불안했지만, 그를 믿고 몸을 맡겼더니 결국 고통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매혹을 어떻게 풀었는지 못 물어봤네."
처음에는 자신의 몸을 건드리려고 하던 이호연이 어느 순간 알베도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인큐버스를 협박해서 억지로 풀어낸 거 아닐까.
사실 다른 남자가 흥분시켜야만 해결된다는 것도 이상했다.
세상에 그런 음란한 마법이 있을 리가 없지.
일단 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없어졌으니 만족이었다.
아무튼, 임솔의 상태는 회복되었다.
그녀는 느린 걸음을 유지하며 연구실로 향했고.
풀썩
연구실에 들어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듯 응접용 의자에 몸을 맡겼다.
"왜, 왜 이러지…."
임솔은 양 볼에 손을 올렸다.
마치 사춘기가 찾아온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린다.
원인은 명백했다.
이호연.
이상할 정도로 제자의 얼굴이 계속 생각난다.
잘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잘 생겼었나?
"…."
임솔은 눈앞에 보이는 논문을 치우며 책상을 뒤졌다.
제자와 찍은 사진이 있는 기사가 분명 여기 있었는데.
"찾았다…."
자신과 같이 찍혀있는 사진.
학회에서 기자들이 억지로 찍은 사진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마음에 들었다.
"오늘 대련을 했어야 했는데…."
임솔은 아쉬움에 뒷 말을 삼켰다.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이호연에게 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쯤 그와….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뺨을 챱챱 때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인가.
서로의 컨디션이 완벽할 때, 자신을 완벽하게 이겨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니까.
"…."
임솔은 건조해진 입술을 핥으며 스마트워치를 챙겼다.
그의 성장속도는 엄청나고, 자신과 대련 경험도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이호연은 보기보다 바쁜 몸.
방학 내내 자신과 대련을 하진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아카데미의 수업은 빠지지 않는 모범생.
시간이 없다면 수업에서 만들면 되겠지.
띠리리 띠리리
네. 임솔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 다음 학기 마법 학과 커리큘럼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임솔은 마법 학과를 대표하는 학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력은 임솔보다 아래지만, 귀찮은 직책을 싫어하는 임솔이 떠넘긴 사람이다.
아하. 네. 정규 교육 과정은 모든 교수님들에게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메일을 확인하시면 될 거예요.
"늘어나는 테러와 마인들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생도들을 위해 실전 훈련의 비율을 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네?
학과장은 갑작스러운 임솔의 말에 당황한 듯 되물었다.
평소에는 귀찮다며 회의에 잘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하는 소리가 저거였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임솔은 계속 말을 이었다.
"판데믹의 마인들은 점점 강해지고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있어요. 이론도 좋지만 실전의 중요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생각 중인 건 실전 같은 환경을 구축해 교수와 대련을 하며 자신의 약점을 직접 찾아주는 수업입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테니 모든 학과 교수들의 도움이…."
임솔 교수님. 학과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다음 회의에 안건으로 제출할 테니 일단 진정….
학과장은 임솔의 열의를 진정시키며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
알베도는 마력 밧줄에 꽁꽁 묶여 미라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반항할 힘은 남았는지 가끔씩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끄읍. 읍…."
"움직이면 죽일 거야."
"…."
나는 조용해진 알베도를 어깨에 얹은 채 집으로 걸어갔다.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옥의 마력…."
검은 마력이 내 의지에 따라 허공에 떠올랐다.
알베도의 마력과 정기를 흡수한 뒤로 새로운 감각이 트인 느낌이다.
의식하던 감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육감.
굳이 설명하자면 마력을 처음 각성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해결할 줄은 몰랐네."
내가 지옥의 마력은 완벽하게 다룬다면 레베카와 만드는 마법진이 한층 더 완성도가 높아지겠지.
릴리아나의 도움을 받기엔 처음부터 다 알려줘야 하고, 퀄리티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겠네.
나는 지옥의 마력을 연습하며 집까지 걸어갔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느낌이라 기분이 꽤 좋았다.
"읍읍. 으으으읍! 읍읍!"
"움직이지 말라니까."
"으으으으읍. 읍읍읍."
알베도는 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몸을 움직였다.
진짜 죽고 싶은 건가?
나는 알베도의 마력밧줄을 살짝 풀었다.
"푸하. 인큐버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나 알베도를 못 알아보는 건가?!"
"인큐버스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그렇다기엔 정기를…. 잠시, 잠시만! 중요한 말이 있다!"
릴리아나한테 데려가기 전에 죽일 순 없으니 다시 입을 막으려는데, 인큐버스가 다급하게 날 말렸다.
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
"뭔데."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정말이다. 모든 정기를 다 써버려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인다고 해도 반항했던 거구나.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죽는 거니까.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인큐버스인 '알베도'.
사실 그를 좋게 대접할 생각은 없다.
그가 판데믹의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 여자를 건드리려고 했기때문이다.
사실 불안요소 제거를 위해 지금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뜯어낼 정보가 있으니 그럴 순 없다.
그리고 보기보다 싸움을 못해서 큰 걱정은 없었다.
"내 정기를 조금 가져가."
"이왕이면 여성의… 알겠다."
포로로 잡아놓고 다른 여자의 정기를 주는 것도 웃기지.
나는 내 정기를 쥐꼬리만큼 넘겼다.
이걸로 집까지는 버티겠지.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띠링
"모두 좋은 점심."
집에 도착한 나는 거실에 있는 스칼렛과 남다은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호연아! 늦게 올 줄 알았는데."
"호연 님 오셨습니까. 근데 그건 뭐죠? 낚시터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남다은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고, 스칼렛은 어깨에 있는 알베도에 관심을 보였다.
근데 낚시터라니. 월척이긴 하니까 나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낚시터를 가도 이렇게 데려 오겠냐. 인큐버스를 잡은 거야."
"읍. 읍으읍!"
알베도는 여자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작하기 시작했는데, 절대 얼굴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인큐버스… 릴리아나 님에게 들었습니다. 미녀와 처녀를 좋아하는 종족이라고요."
"응. 함정을 파고 있는데 내 앞에 마침 나타나더라고 운이 좋았어."
"그 종족이 제 앞에도 하나 있는 거 같습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칼렛은 고개를 숙였다.
이 헛소리에 어울리다간 끝이 없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릴리아나를 찾았다.
"릴리아나는 어딨어?"
"방에 있습니다."
"오케이. 내가 직접 가야겠다. 이 더러운 놈을 너희랑 접촉시킬 수 없거든. 바이러스가 옮을거야."
"릴리아나 씨는 괜찮은 거야…?"
"괜찮겠지. 서큐버스인데."
남다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설마 서큐버스가 인큐버스한테 당하겠어.
아무리 지옥이라지만 선은 지켜야지.
그리고 내가 릴리아나에게 적응했듯이, 릴리아나도 내게 적응했을 거다.
나보다 못생긴 이 놈한테 매혹당할 리가 없다.
똑똑.
들어오세용!
릴리아나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서 과자를 먹고 있는 릴리아나가 보였다.
남편은 고생하고 왔는데 가장이라는 년은 여전히 생각 없이 사는구나.
저러면서 항상 가장이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에엥. 벌써 왔어?"
"그래. 인큐버스 잡아왔다. 릴리아나."
쿵
나도 별생각 없이 알베도를 방 한가운데에 집어던졌다.
벌떡.
누워있던 릴리아나도 내 말에 반응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꽁꽁 묶인 알베도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뭐야. 인큐버스를 이렇게 빨리 잡아왔네? 사실 허접 인큐버스 아니야?"
"자기 입으로 마왕의 후계자라고 했으니 그렇진 않을걸. 그리고 허접 인큐버스가 뜬금없이 지구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네."
"읍읍. 읍으으븝."
알베도는 아까처럼 몸을 움직이며 저항하진 않았지만, 말을 하고 싶은 듯 읍읍거렸다.
릴리아나는 꽁꽁 묶인 알베도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얘도 지옥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그럴 거야."
알베도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라고 해봤자 그거지.
지옥의 정보를 뜯어내기 위함이다.
릴리아나의 정보도 좋고 마왕의 정보도 좋다.
정 안되면 지옥의 시사경제라도 말했으면 좋겠네.
나는 살짝 침울해지려는 릴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까지 누워서 게임하고 있었으면서 약한 척 하기는.
"일단 얼굴 부분만 벗길 테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나도 도와줄게."
"응. 알겠어."
두 번째라서 다행이네.
케이론을 겪어봤으니 그만큼 큰 충격은 없을 거다.
나는 알베도의 얼굴 부분에 있는 마력 밧줄을 해제했다.
"하아! 젠장. 이 망할 놈… 카, 칼리오페? 도망쳐! 칼리오페다! 젠장!"
알베도는 자신이 묶여있는 것도 까먹고 애벌레처럼 몸을 좌우로 파닥거렸다.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을 흩뿌리는 걸 보니 그 꼴이 살짝 불쌍해서, 나는 알베도의 등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야. 가만히 있어."
"히이익!"
나는 알베도의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걸 막아줬다.
다시 정기를 챙겨주긴 싫었다.
"엥. 뭐야. 이호연 너 지옥의 마력을 어떻게 쓰는 거야?"
"이번에 알베도랑 싸우면서 배웠어. 의외로 어렵지 않더라."
"그게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거였어? 저번에는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잖아."
"노력하니까 안 되는 게 없어.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새겨들어."
"아하.... 맞아. 네가 노력이 부족하긴 했어."
릴리아나는 알베도를 바라보며 딱한 듯 혀를 찼다.
"인큐버스가 이러고 있으니까 엄청 볼품없네. 얼굴도 네가 훨씬 나은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이 년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 네 놈. 정체가 뭐냐! 칼리오페를 데리고 있다니!"
알베도는 릴리아나를 보며 몸을 벌벌 떨다가 나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도를 보니 역시 릴리아나를 아는 모양이다.
대체 릴리아나는 지옥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