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392화. 마법사 학회 준비 (2)
* * *
임솔의 연구실.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온 백아영은 개판 오 분 전인 연구실을 보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 또 밤새 연구했지. 무리하지 말라니까.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내가 준 약도 잘 먹어야 해."
"알겠어.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아니야. 몰라. 너는 네 몸을 모른다니까…! 답답해 정말."
백아영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쓰러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연구를 열심히 하는 걸까.
역시 마법사들은 여보를 빼고 한 명도 이해할 수가 없다.
"밤새 연구한 게 아니라 호연이랑 학회에 대해 얘기하느라 조금 어지럽힌 것뿐이야."
"… 그래?"
임솔의 입에서 나오는 이호연이라는 이름.
백아영은 순간 흠칫했지만, 굳이 반응하진 않았다.
이제 자신과 임솔은 같은 길을 걷기로 했으니까.
그녀도 다른 여자들보다는 친구인 임솔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비슷하기도 하고, 어린 여자 생도들과 경쟁하기도 싫었다.
'근데 그 후로 같이 한 게 있었나?'
임솔이 일주일간의 연구로 쓰러진 뒤.
치료를 위해 방문한 연구실에서 둘은 연합을 맺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딱히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다.
백아영은 백아영대로 이호연을 만났고, 임솔은 임솔대로 이호연을 만났다.
'이럴 거면 연합은 왜 한 거야…?'
백아영은 연구들을 정리하는 임솔을 뻔히 바라봤다.
요즘 학회를 핑계로 여보를 자꾸 불러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자신도 예전에는 이상한 이유들로 여보를 불러냈지만… 그때는 연합하기 전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 근데 우리 호연이의 일로는 연합한 거 아니야?"
"맞지. 우리는 하나야."
"그럼 뭔가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백아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주제를 직접 얘기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임솔은 의외로 거부감없이 받아줬다.
"그럼 내일 너도 연구실로 오면 되겠다."
"내일 연구실에 호연이가 오기로 했어?"
"응. 학회 때문에 한 번 오기로 했거든. 같이 놀면 되겠네."
"셋이 같이 놀자고?"
"안돼?"
"안되는 건 아니지…?"
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둘 다 워낙 바쁘다 보니 만나도 잠깐 대화하다가 곧바로 섹스로 이어졌다.
물론 백아영은 그 편이 더 좋았지만….
'여기서 관계를 할 순 없어.'
셋이 관계라니 상상도 안 된다.가끔은 대화나 평범한 식사도 좋겠지.
저번에도 셋이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으니 불편하지도 않을거고.
백아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솔이는 연구실에서 여보와 관계를 하는 걸까.
두리번두리번.
백아영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 부근에서는 할만한 위치가 안 보였다.
어딜가나 임솔의 마법 용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둘은 아직 진도를 덜 나간 건가?
"… 둘은 만나면 뭐 해?"
"요즘은 합을 맞춰보고 있어."
"…."
"참고로 합방이 아니라 마법 수련을 한다는 뜻이야."
"나, 나도 알아."
"근데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내일은 셋이 밥이라도 먹자."
"으응 알겠어.."
백아영은 임솔의 눈을 피하며 핫초코로 입을 적셨다.
달콤한 설탕의 맛이 입으로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솔이는 아직인 것 같아.'
살짝이지만 붉어진 그녀의 볼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지만 이런 주제가 달갑지 않은 거다.
숫처녀의 반응이었다.
'역시 내가 처음…!'
백아영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으며 고개를 숙여 핫초코에 얼굴을 박았다.
*
방학 1일 차.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가 판데믹의 은신처 급습. 이사장 인터뷰. 교육기관의 역할을 넘어 시민들의 안전도 책임지겠다.
테러 방어로도 모자라 마인 소탕까지 아카데미가 하면 협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청. 빅토리아 아카데미 이사장에게 표창장 수여 고려중….
인터넷에는 내가 넘긴 은신처를 열심히 써먹고 계신 이사장님이 보였다.
"이 정도면 양보할 맛난다."
역시 여론을 쓰는 능력이 장난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공로를 양보한 건데 저렇게 쓰고 있구나.
기본적으로 빅토리아 아카데미는 교육기관이지만, 대부분이 이사장의 지분이다.
아카데미의 이름값이 올라갈수록 생도와 이름있는 신인들이 많이 모일 테고, 언젠가는 아카데미라는 인맥으로 한국 헌터 사회를 주무를지도 모른다.
'그럼 사위인 나도 잘 챙겨주시겠지.'
헌터 협회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나는 뉴스를 계속 넘겼다.
혹시나 뉴스에서 문성민에 대한 언급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다.
"역시 없네."
이렇게 꽁꽁 숨겨져있는 걸 보면이건 수린 누나가 직접 처리하려나 보네.
누나의 의지도 진심인 것 같았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
문수린을 생각하니 그녀의 집이 또 생각났다.
곱씹을수록 신기했다.
내 사진이 그렇게 많다니.
혐오감보다는 정말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겸사겸사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했다.
"와…."
내 이름을 검색하자마자 나오는 수천수만 장의 내 사진들.
기자들이 찍은 사진과대체 언제 이런 걸 찍은 건지 모르겠는 사진들.
아카데미 내부에서 찍힌 사진도 많은 걸 보면 생도중에서도 촬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진짜 신기하네.
탁
나는 스마트워치를 덮고 거실로 빠져나왔다.
도촬은 조금 기분나쁘지만, 내 사진이 돌아다니는 정도야 웃어넘길 수 있다.
알몸도 아닌데 뭐 어때.
유명인의 삶은 이런거지.
거실에 나오자 소파에 앉아 홀로그램 모니터를 쳐다보는 릴리아나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씻거나 부엌에 있는 모양.
나는 소파에 다가가 릴리아나의 옆에 앉았다.
"으응? 무슨 일있어?"
"아니, 나도 같이 보려고."
"아하."
릴리아나는 날 보고 엉덩이를 옆으로 옮기더니, 그대로 내 허벅지를 베개 삼아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눕는다고?"
"안돼? 안되면 일어나구."
"그건 아닌데…."
"헤헤."
릴리아나는 뭐가 좋은지 누워서 모니터를 쳐다봤다.
사실 내 무릎에 앉히고 앞으로 기대면서 가슴이라도 만지려고 했는데, 계획이 무너졌네.
난 아쉬운 대로 누워있는 릴리아나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으흐응. 주인님, 아침부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복수야."
"내가 무슨 잘못했어? 왜 복수를 해."
"원래 복수는 당하기 전에 하는 거야."
"어째서?"
"그러면 절대 손해 보지 않거든. 당하고나서 복수하면 늦잖아."
"또 헛소리였구나."
"이게 유서깊은 인간의 전통이야."
릴리아나 씨, 아침 먹어요!
잠시 릴리아나와 놀고 있었더니, 부엌에서 남다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얘기를 들으니까 또 배고파지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릴리아나. 나 배고프다."
"구랭. 그럼 나도 인간의 전통을 따라서 스카웃의 소시지를 뺏는 잔인한 복수를 해야겠엉."
"스칼렛 괴롭히지말고 그냥 내 거 먹어."
괜히 헛소리했다가 스칼렛한테 피해를 끼칠 뻔했네.
나는 복수를 외치는 릴리아나의 등을 밀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
점심 즈음.
나는 스마트워치로 임솔 교수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 지금 갈게요.
응. 업무 정리하고 있을게. 참고로 연구실에 아영이도 있어.
네? 아영 씨가 왜 있어요. 지금 안되면 조금 이따 가도 상관없어요.
그냥 지금 와.
둘이 뭐 하고 있었는데요?
교수님은 그 뒤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뭐야?"
괜찮은거 맞나? 그래도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백아영도 허락한 거겠지?
임솔 교수님이 그렇게 예의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옷을 챙겨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요즘 교수님을 자주 보네.'
곧 있을 마법사 학회 때문에 볼 일이 점점 많아진다.
미국에 있으면 아예 같이 지내게 되려나.
'그래도 한방을 쓰기는 힘들 것 같은데.'
교수님의 행동을 봐서는 설령 같이 잠을 자도 자신보다 약한 남자와는 절대 섹스를 안 할 것 같거든.
밤에 꼬시려는 노력은 그만두자.
그 시간에 마법 훈련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방학 첫날이라 고요한 아카데미를 걸으며 마도관에 도착했다.
익숙한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니, 언제나와 같은 연구실이 보였다.
안에는 정말 백아영이 앉아있었다.
백아영은 날 보고 눈이 커졌다가 금방 웃으며 인사해왔다.
"안녕. 여… 호연아."
"안녕하세요. 성녀 님."
"성녀 님?"
"이제 성녀로 돌아오셨잖아요. 저번에 만났을 때 못 불러준 거 같아서."
"엽… 큼. 호연이는 그냥 편하게 불러도 괜찮아."
나는 말 할 때마다 실수할까 봐 입을 꽉 다무는 백아영을 보고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임솔 교수님은 논문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표지를 보니 학회에 가져갈 논문같았다.
"교수님, 저 왔어요."
"응. 오랜만이야."
"바쁘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혼자 하는 게 나아."
며칠 만에 봤으니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겠지.
나는 소파에 앉아 백아영이 따라주는 핫초코를 받았다.
슬쩍 눈인사를 하자 백아영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셋이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핫초코가 맛있네요."
"으응. 솔이는 제일 좋은 걸 쓰니까."
백아영은 뭔가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 임솔 교수님 때문에 여보라고 못 부르는 게 엄청 답답한 모양이다.
'맞다. 교수님한테 학회에 대해서 좀 물어봐야지.'
레베카가 말해준 정보를 교수님도 아는 지 물어봐야지.
나는 논문을 정리하는 교수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그러고 보니 논문에 제 이름도 들어가 있다고 하셨죠."
"응. 보조가 아니라 공동 저자로 넣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고, 마법사 학회에 처음 가는 걸 마법사 데뷔라고 한다면서요. 제가 이번에 데뷔하는 거예요?"
"다른 마법사들의 기준에 따르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어차피 너는 그런 거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교수님은 어떻게 했어요?"
또 처음, 데뷔 이런 단어를 사용하니까 괜히 신경 쓰인다.
원래 첫인상이 제일 중요한 법인데, 천재 마법사로서 엄청난 거 하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학회에 널리 퍼져있던 5대 난제를 모두 해결했어."
"… 첫 발표에서요?"
"그렇지. 마법을 알려달라고 찾아오는 마법사들이 생겨서 귀찮아졌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하고싶지는 않네요."
교수님의 말을 들으니 의욕이 좀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노력을 못하거든.
"정 그러면 논문 하나 만들던가. 너라면 괜찮은 논문 하나는 금방 할거야."
"음… 글쎄요."
내 마법은 이론이 아닌 느낌이라 논문으로 써내기 힘들다.
물론 내 기준으로 힘들어도 느낌이 없는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쉽겠지.
하지만 그것도 하기 싫은 걸 어떡해.
안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무슨 논문이냐고.
나는 데뷔에 신경을 끄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둘은 같이 뭐 하고 있던 거에요?"
"원래 아영이가 자주 놀러 와. 여기는 조용하거든."
"오늘은 호연이랑 셋이 놀자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아하. 제가 살게요. 최근에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셋이 밥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네.
마음 같아선 더 좋은 걸 하고 싶지만… 아직 교수님의 방어가 두터우니까.
"후우… 됐다. 준비는 됐지?"
"무슨 준비요?"
통 크게 밥을 산다고 말했는데, 임솔 교수님은 내 말을 듣지도 않았는지 이상한 말을 꺼냈다.
교수님은 논문을 테이블에 정갈하게 놓고는 기지개를 피고 소파로 다가왔다.
"대련해야지. 설마 안 할 생각이었어?"
"아영 씨가 있는데요?"
"응급요원까지 있으니 완벽하잖아. 오늘은 좀 더 실전에 가깝게 해보려고해."
"… 솔아. 날 그런 용도로 쓰려고 데려온 거야?"
"그냥 겸사겸사 하는 거지. 가자."
교수님은 앞장서서 연구실을 빠져나갔고, 나와 백아영은 서로 눈을 마주치다가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여보랑 따로 놀 걸."
"교수님이 막무가내인 건 알고있잖아요. 일단 가요."
우리는 천천히 교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