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355화. 내 여자친구가 백수일리가 없어
* * *
릴리아나와 놀아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물론 그 지옥 같은 노래를 듣기는 힘들었지만, 다행히 스칼렛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 드디어 왔구나."
"응? 무슨 소리… 아, 스카웃이구나!"
"예. 릴리아나 님."
또각또각.
언제나처럼 스칼렛은 창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럼에도 옷에 주름 하나 없는 게 정말 프로다운 모습이다.
이제 슬슬 문으로 다녀줬으면 좋겠네.
"호연 님. 할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예. 중요한 말입니다."
"… 뭔데?"
혹시 임신이라도 한 건가?
내가 피임 마법 체크를 안하긴 했는데. 설마…
"오늘부터 백수가 되었습니다."
"… 뭐?"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봤다.
*
"그렇게 됐습니다."
"... 진짜?"
"네. 오늘부터 백수에요."
방금 사직서를 내고 허락까지 받았다는 스칼렛의 말에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내 여자친구가 백수일 리가 없어….
그래.
이유라도 들어보자.
"그만 두는 건 네 자유라지만… 이유가 뭔데?"
"어차피 들킨 이상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해요. 당신이든 아이리스 길드든. 그 중에서 당신을 고른거니까 칭찬해줬으면 하는데요."
"들켰어? 뭔 짓을 한 거야 임마. 조심했어야지."
"…… 모두 보는 곳에서 당신 대신 공격을 맞았는데 길드장님이 그걸 모를까요."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천하의 아이작이 그걸 넘어갈 리가 없다.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아이리스 길드장 자리는 내려놔야지.
"게다가 아이리스 길드 내부에서도 여기 숙소에 계속 들락날락거렸으니 아이작 님도 아마 눈치채고 있었을거에요."
"그런가. 그러면 그 아저씨는 내가 엘리스한테 가는 것도 알고 있을까?"
"글쎄요. 그건 아이작 님만 아는 일이죠."
뭔가 무섭네.
역시 밤에는 주의해야겠어.
스칼렛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곧 한국에 돌아가니까... 미리 다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슬슬 질리기도 했고."
"미안하게 됐다. 스칼렛. 백수인 여자는 거절이야."
"그럼 길드장님에게 좋은 정보를 가져왔으니 다시 받아달라고 해볼까요."
"사랑해. 평생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게."
"고마워요. 당신. 그건 꽤 로맨틱한 고백이였어요."
스칼렛은 배시시 웃었다.
한국에서는 스테디셀러 같은 고백인데 프랑스에서는 이게 먹히는구나.
좋은 걸 배웠네.
그때 릴리아나가 짝짝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이제 출근 안 해도 되겠구나! 스칼렛! 나랑 계속 놀 수 있겠어!"
"네. 릴리아나 님 덕분입니다."
"그래그래. 잘했어. 장하다. 스카웃!"
"... 릴리아나. 이제 호칭 좀 고정해주면 안 될까?"
한 두 번도 아니고, 제 마음대로 스칼렛과 스카웃을 바꿔 부르니 나도 헷갈린다.
나도 모르게 스칼렛을 스카웃이라고 부를 뻔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다 릴리아나 때문이라고.
"괜찮아. 이제 스칼렛은 없어졌거든. 남은 건 스카웃 뿐이야."
"... 그래.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스카웃으로 고정한다는 거지?"
혹시 일을 할 때는 스칼렛이고 집에 있을 때는 스카웃인가?
대충 비슷한 것 같은데 확실하게 알 수가 없네.
이제 백수가 되었으니 다시 알 수도 없고.
"스카웃! 안 되겠어. 너도 내 노래를 들어볼래?"
"노래 말입니까?"
"...... 음, 재밌게 들어라."
뭐가 안 되겠다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된다.
나는 릴리아나와 대화를 포기하고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봤다.
메시지에 답장이나 해야지.
"어때? 대단하지. 힙합이 유행이길래 나도 하나 해봤어."
"...... 예."
메시지에 답장을 하면서 스칼렛의 표정을 살폈다.
스칼렛도 저 지옥 같은 노래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못 해주는 건가.
어떻게 반응해야 릴리아나가 상처를 안 받을지 고민하는 스칼렛의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그 때. 순간적으로 주변의 마력이 일그러지는 걸 감지했다.
스윽
"음?"
"하아. 하아...."
동시에 내 뒤에서 들리는 가쁜 숨소리.
뒤를 돌아보자, 붉은 머리가 내 시야를 가렸다.
내가 아는 여자 중에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레베카뿐이다.
"뭐야, 레베카 씨?"
"헉... 애기 아빠. 하아."
"왜 그래요. 괜찮아요?"
처음 보는 레베카의 다급한 모습.
나를 룬의 일족으로 착각해 덮치려고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거라도 마시고 진정하세요."
"하아, 응. 고마워...."
나는 마시던 커피를 레베카에게 내밀었고,커피를 마시며 숨을 고른 레베카는 곧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지친 듯 옷을 털어낸 레베카는 겉 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입을 열었다.
"휴우... 죽을 뻔했어. 정말로."
"...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까 뭐 큰일 났다고 메시지 보냈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으응... 다 얘기해줄게."
레베카에게 들은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판데믹의 간부 회의를 듣고 있는데 프랑스와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테러를 줄줄이 막아낸 나를 판데믹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큰일이긴 하지.
그런데…
"으음... 뭐, 사실 그럴 때가 되긴 했어요."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주인공은 판데믹에게 어그로가 끌려야 정상.
물론 원작 게임에서는 빨라도 1년은 지나야 하지만, 이미 내 무력은 원작 2년 차보다 강해졌다.
관심을 받기엔 충분하다.
게다가 원작보다도 판데믹의 테러를 많이 막았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도 모자라 프랑스에서 커다란 테러를 막았으니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그 정도가 아니야. 큰일 났다니까."
레베카는 나를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서야 '올 게 왔구나.' 이 정도 감상인데 아무래도 제 3자가 보기엔 큰일 났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아니, 근데 내 존재를 인지했을 정도면 레베카도 위험한 거 아닌가?
"걱정 감사해요. 레베카 씨. 저도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저보다 레베카 씨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저를 알아버린 이상 레베카 씨와 제 관계를 놓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리 레베카에게 룬의 결계가 있다지만, 어쩌다 한 번은 걸릴 수도 있다.
판데믹의 눈은 없는 곳이 없으니까.
그리고 한 번이라도 걸리는 순간 다시 세뇌를 받게되겠지.
이제 판데믹에 있는 게 너무 위험해졌다.
"응. 그래서 오늘부로 그만두려고."
"… 네?"
"오늘부터 백수야. 애기 아빠. 나 어떡하지?"
레베카는 입술을 내밀며 테이블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 당신도 백수야?
*
잠시 후.
레베카는 몸을 일으키며 보란 듯이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모아 놓은 돈이 많으니 걱정하지 마!"
"... 다행이네요."
일단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돈이 없으면 룬의 일족도 못 살린다.
그게 현실이야.
아이키우는 데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사실 저도 백수지만 모아놓은 돈이 많습니다."
"어머, 애기 아빠 여자친구도 이제 백수야? 아이리스 길드 소속이라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쁜 놈에게 단단히 물렸거든요."
"응응. 좋은 선택이야.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볼 때 가장 행복한 법이거든. 아, 우리 애기 양육비는 내가 마련할 테니까 애기 아빠 여자친구는 걱정 말고."
"... 그걸 제가 왜 걱정할까요."
그때 우리의 대화에 스칼렛과 릴리아나도 끼어들었다.
지옥같은 노래에 관해 감상평 나누기는 다 끝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레베카는 왜 스카웃을 이름으로 안 부르는거야?"
"이제부터 부를게. 애기 아빠 여자친구라고 하면 반응하는 게 재밌어서 그랬는데 이제 재밌는 반응을 안 하네. 스칼렛."
"...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군요."
"왜 가만히 있는 스칼렛한테 시비를 걸어요...."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거지."
"맞아. 레베카도 스카웃하고 친해지고 싶을거야."
"역시 릴리아나는 말을 잘 알아들어. … 그런데 릴리아나는 계속 반말할거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무슨 소리야."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대화들이 오가는지 모르겠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역시 좋은 편이겠지?'
저게 다 애정표현일거다.
나는 레베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요. 레베카 씨도 저희 집에서 지낼 거 아니에요? 사이 좋게 지내면 좋죠."
"다행이야! 쫓겨날까 봐 걱정했는데."
"제가 왜 쫓아내요. 아, 그러고 보니 레베카 씨의 개인적인 세력이 있는 거 아니에요?"
"응. 일단 세뇌만 다 풀어줬어. 그리고 퇴직금 주면서 다 해고했지."
"그래도 되는 거에요?"
퇴직금만 주고 해고하다니.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가장의 슬픈 현실이 펼쳐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현실은 내 생각보다도 처참했다.
"그게 차라리 나아. 어차피 다들 재능 없는 놈들을 내가 주워다 쓴 거니까. 판데믹이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숨어 살라고 했으니 알아서 할 거야."
"아... 어쩌면 그 사람들이 판데믹의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레베카씨의 정보를 캐낼 수 있을테니까요."
"아마 무조건 될 거야. 그래도 충성심 하나만큼은 괜찮은 놈들이었으니 믿어봐야지. 세뇌를 풀 때 대충 상황을 알려줬거든."
"... 레베카 씨는 정이 많으시네요."
"정이 많은 건 아니야. 그냥 착하게 살아야 운이 좋아진다고 생각하거든."
사실 아예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는 레베카의 세력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게 제일 깔끔한 해결방법이다.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내가 레베카와 대화하는 동안 스칼렛과 릴리아나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카웃, 이제 우리 생활비는 어떻게 벌지?"
"호연님이 엘리스 아가씨에게 뜯은 돈이 꽤 됩니다."
"오... 맞아맞아. 내 방송보다 훨씬 많이 벌었었지."
"그리고 릴리아나 님의 방송 수익도 점점 늘어날 겁니다. 제가 알아보니 요즘은 스트리밍보다 편집 영상을 올리는 편이...."
"그래? 그거 나도 할 수 있엉?"
음.
생활비는 중요한 일이다.
둘이 중요한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레베카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 가짜 던전 마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아, 준비하고 있긴 한데... 솔직히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할 것 같긴 해."
언젠가 히로인들에게 결국 사실을 밝혀야 할 날이 올거다.
내 여자친구가 10 명이 넘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그 때의 충격을 줄이기위해 준비하고 있는 가짜 던전 마법.
어차피 바로 완성될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으니 나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필요한 건 없으세요? 아니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저도 나름 모아놓은 돈이 있어요. 아니면 마법진 구성을 같이하죠."
"음... 돈은 이제 월급 나갈 곳도 없으니 괜찮고. 마법진은 같이 짜면 되겠다."
"그럼 같이 마법진이라도 짜요. 한국에 돌아가면 시간이 많을 거에요."
"다행이네. 아, 우리 아이는 언제 만들까?"
"... 이제 좀 덜 바쁘긴 해요."
이미 레베카를 안을 마음의 준비는 끝냈다.
사실 준비가 필요한 일은 아니지.
나야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나는 당장이라도 괜찮긴 한데... 애기 아빠가 내일 모레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그렇죠. 내일 모레가 목요일이니까."
"그럼 그 날 거사를 치를까...!"
레베카는 입술을 핥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가지고 싶어 하던 장난감을 가진 아이 같았다.
"한국에서요?"
"응.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야 하거든!"
레베카는 조금 여유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아이를 못 만든다고 엉엉 울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처음에 봤을 때는 엄청 불안정해 보였는데 이제는 괜찮으신가 봐요."
"이제 일할 것도 없고... 여유가 있어서 그렇지. 일단 유아용품이라도 알아놓아야겠어."
"... 임신도 안 했는데요?"
"응. 몸이 무거워지기 전에 해야지. 애기 아빠도 항상 몸조심해. 질 좋은 유전자를 짜내야 하니까."
"그, 말을 좀... 쩝.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기쁜 듯 웃는 레베카를 보며 뒷말을 삼켰다.
그래. 좋으면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