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 354화. 의좋은 자매 (9)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이린은 엘리스의 병실로 찾아갔다.
"엘리스...."
처음에는 이호연을 찾아가려 했지만 역시 엘리스를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호연은 일단 엘리스의 상태를 확인하고 봐도 늦지않는다.
똑똑
누구세요?
"엘리스. 언니야."
아, 응. 들어와.
병실 안에는 누워있는 엘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린은 침대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
"... 당연히 괜찮지. 다들 왜 내 몸을 물어보는 거야."
"미안해."
"아니, 사과하지는 말고...."
엘리스는 살며시 웃는 아이린을 보며 어이없게 웃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이린이 찾아오다니, 오늘은 이상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못 가지는 느낌이다.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쌓인 일이 많을 텐데."
"으응. 당연하지. 걱정돼서 빨리 왔어. 저녁밥은 먹었어?"
"응. 밖에서 먹고왔어. 언니는?"
"나도 먹었어. 아, 사과 깎아줄까?"
"고마워."
아이린은 앉아서 사과를 깎기 시작했고,멍하니 아이린의 손놀림을 보던 엘리스는 아이린이 오기 전부터 하던 고민을 이어갔다.
이호연과의 관계.
자신도 그렇고 이호연도 그렇고, 서로 호감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다보니 시작 단추를 스킨십부터 끊은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엘리스는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스칼렛이 사직서 양식을 받아갔다고 하더라."
"... 스칼렛이? 어째서?"
"모르겠어. 가끔씩 재미로 받아가는 사람들도 있긴한데, 스칼렛은 그럴 성격은 아니라서 문제네."
"그걸 재미로 받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응. 세상에 워낙 특이한 사람이 많잖아."
아이린은 사과를 깎으며 엘리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린과의 잡담을 이어가던 엘리스는, 문득 생각했다.
언니는 자신보다 인생 경험이 많으니 연애 경험도 많지않을까.
물론 언니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물어본 적도 없었다.
설마 언니같은 엄청난 미녀가 28년간 아무도 못 사귀었을리는 없겠지.
경험이 아예 없는 자신보다는 나을거고,연애 상담도 해줄 수 있을거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이린이 조금 편해졌기에 고민도 편하게 꺼낼 수 있었다.
엘리스와 아이린은 가족이니까.
엘리스는 귀여운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는 아이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는 남자친구 안 사귀어?"
"... 갑자기 왜?"
아이린은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었다.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주는 거겠지.
엘리스는 감사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나는 그런 걸 잘 모르겠어. 그... 연애나 사랑 같은 거."
"끌리는 사람이라도 생겼나 봐?"
"으음, 끌린다라고 해야 하나. 어... 서로 그런 느낌은 있는 거 같은데. 응. 분명 있어."
엘리스는 살짝 붉어지는 얼굴의 온도를 느꼈다.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남에게 이런 걸 말하는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어색함이 컸다.
"글쎄. 나도 경험이 많지는 않아서."
"그래도 나보다는 많잖아."
"... 우리 다른 이야기는 어때? 예전에 같이 소꿉놀이하던 거 기억해?"
"소꿉놀이? 몇 살 때인데?"
"엘리스가 8살 때였지."
"언니도 참... 10년도 넘은 일을 어떻게 기억해."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와의 대화는 가끔씩 이렇게 핀트가 벗어난다.
예전의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알겠지만, 자신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소중했다.
"엘리스...."
"맞아. 나 내일이면 퇴원해도 괜찮지?"
"으응. 알겠어."
"휴. 다행이다."
엘리스는 드디어 이 병실을 탈출한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쭉 폈다.
아마 연애 상담을 피하는 걸 보면 아이린도 경험이 많지 않은 모양.
어쩌면 아직 미경험일 수도 있겠다.
언니는 일과 수련에 빠져있으니까.
그렇다면 동생인 자신이 배려해야겠지.
음음.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주제를 돌렸다.
한편, 아이린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피는 엘리스를 보며 사과를 잡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어째서 엘리스는 자신에게 그런 고민 상담을 하는 걸까.
엘리스가 아이린을 믿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저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면 안 하는 게 나았다.
이호연과 엘리스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건 싫어도 너무 싫었다.
'… 이제 강수를 둘 수밖에 없어.'
엘리스의 상태를 보니 알 것 같다.둘은 무조건 떼어놓아야 한다.
소중한 엘리스를 건드릴 순 없었다.
하지만 이호연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을 쓸 수 밖에.
*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실.
아이작은 눈앞의 여성이 내민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진심이냐?"
"예. 긴 시간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직서 양식을 받아 갔다길래 설마했는데... 이유가 뭐지? 대우는 충분히 좋았을 텐데."
사직서를 낸 그녀는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에이스.
받는 대우 역시 최상급이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부터 엄청난 재능을 보여준 그녀는 길드장의 총애를 받았기에, 대부분의 여성 암살자들이 받는 성고문 교육도 받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의 실력이 받쳐줬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여성 암살자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 버린 것도 사실.
아이작은 스칼렛이 내민 사직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스칼렛과 눈을 마주쳤다.
"사직서에도 쓰여 있듯이 개인적인...."
"스칼렛.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였어?"
"... 죄송합니다."
"말하기 힘든 일인가보군."
"……."
"계약은 기억하고 있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 하아."
아이리스 길드는 정보 길드를 표방하는 프랑스의 대표 길드다.
양지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프랑스의 음지는 아이리스 길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프랑스는 밤보다 낮에 범죄율이 더 높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명예와 부를 전부 챙길 수 있는 위치.
그곳이 아이리스 길드였다.
그만큼 아이리스 길드는 길드원들의 관리가 심하다.
특히 스칼렛처럼 중요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면 특별한 계약을 맺어야 했다.
바로 '기억'에 대한 계약.
아이리스 길드에서 얻은 정보와 경험을 모두 봉인하는 계약이다.
실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보통 아이리스 길드의 간부들은 다른 곳으로 이적을 생각하지 않는다.
"… 하아. 그놈은 진짜 도움이 안 되는구나. 엘리스에 스칼렛까지…."
"……."
스칼렛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들키지 않은 게 이상했으니까.
프랑스에 와서도 계속 이호연의 숙소에 들렸고, 특히 켄타우로스 생포 작전에서 공격을 대신 맞아준 건 자신이 봐도 심하긴 했다.
그날 이후로 아이리스 길드를 나와야 하는 건 확정이었다.
"내 데이트 신청은 매몰차게 거절하더니, 너무하잖아. 스칼렛."
"길드장님. 나이 차이가 얼만데 그런 소리를 아직도 하십니까."
"이래서 예쁜 여자들한테는 잘해줘도 소용이 없어."
아이작은 테이블 위의 사직서를 챙기며 살짝 웃었다.
"계약은 취소다. 스칼렛. 기억은 지우지 않으마."
"... 네?"
"애초에 겁주려고 만든 조약이야. 실제로 해본 적은 없거든."
"그게 무슨...."
"지금까지 고마웠다. 스칼렛 라이트."
스칼렛은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아이작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 정도는 이호연도 이해해주겠지.
"길드장님...."
탁
"잘생긴 척 미소 짓지 마세요. 안 넘어갈 거니까."
"한 번은 당해줄 만도 한데 말이야."
아이작은 스칼렛이 쳐낸 손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게 살아라. 스칼렛. 나 같은 나쁜 남자한테 걸리지 말고."
"… 걱정하지 마세요."
스칼렛은 이호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생각하는 나쁜 남자의 기준을 압도적으로 넘어버리니까 차라리 기분 덜 나빴다.
오히려 '원래 이런 새끼인 걸 어쩌겠어.'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안 엮이는 게 최고겠지만.'
이미 엮어버렸으니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스칼렛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
엘리스와 식사를 마친 후.
데이트라도 좀 더 하려고 했더니 엘리스가 자신은 아직 입원중이라며 거절했다.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아이작과 아이린 쪽에서 난리가 날 거라고 했었지.
하긴, 그 사람들한테 걸리면 나도 귀찮아질거다.
나는 엘리스를 병실까지 데려다주고 혼자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이리스 길드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건물들은 불이 꺼지고 길드원들도 퇴근한 것 같았다.
물론, 지하의 아이리스 길드는 이제부터 일을 시작하겠지.
나는 조용한 아이리스 길드의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일은 잘 풀리고 있어.'
엘리스도 내게 마음을 많이 연 것 같다.
사실 몸정으로 밀어붙이는 감이 있긴 한데, 이게 바람둥이의 인생이겠지.
이 세상이 내 하렘을 받아들여 줄 때까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가 이런 느낌일까.
"둘은 벌써 온 건가?"
나는 불이 켜진 숙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안쪽에서는 릴리아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엘리스를 마사지하느라 저녁을 조금 늦게 먹었으니, 스칼렛과 릴리아나는 나보다 일찍 돌아온 모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흐흠~ 하나, 둘, 셋, 넷.
"뭐야?"
거실에서 릴리아나의 콧노래 소리가 들리길래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릴리아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지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깜짝 놀래켜주려고 조용히 다가가는데, 릴리아나가 노래를 시작했다.
"주인님 입술에 쪽쪽. 그러면 보지가 축축─. 주인님 자지에 쪽쪽. 그러면 자지가 길쭉─."
"…?"
사람은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안나온다는데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머리 아프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노래는 처음이다.
세상에 저런 노래가 존재하다니.
"응?! 왔구나?"
릴리아나는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 날 보며 반색하며 다가왔다.
그래.
노래는 이상했지만 여전히 귀엽긴 하네.
"응. 밥은 맛있게 먹었어?"
"당연하지! 아, 내가 노래를 하나 만들었거든? 들어볼래?"
"... 어, 음. 그럴까?"
띠링
그 지옥 같은 노래를 또 들어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때마침 메시지가 왔다.
"아, 잠시만. 메시지가 왔어."
레베카 : 애기 아빠!! 큰일 났어!
"...?"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 : 레베카 씨. 천천히 얘기해보세요.
레베카 : 지금 가서 얘기할게.
"... 뭐야."
"왜?"
"레베카 씨가 큰일 났다는데."
"애기 만들 시간이라 큰일 났다는 거 아니야?"
"... 설마."
순간 설득당할 뻔 했네.
레바카가 그렇게 과장하는 성격은 아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장난스러운 스타일이긴 한데... 잘 모르겠네.
진짜 뭔 일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스칼렛은?"
"스칼렛? 모르겠어. 뭐 할 일이 있다고 하던데."
"할 일?"
다들 나 빼고 어디 간 거야?
어쩔 수 없이 둘이 오기 전까지는 릴리아나랑 놀아야겠네.
"어쩔 수 없다. 너랑 놀아야겠네."
"응. 그럼 내 노래나 들어줘."
"... 그래. 해보든가."
그냥 넘어가질 않는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릴리아나의 노래를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