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9화 (339/648)

EP.339 339화. 늑대와 미녀

똑똑똑.

조용한 거실에서, 릴리아나의 방을 두드렸다.

스칼렛의 모습이 보이지않는 걸 보면 방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스칼렛이 나간 후, 침대에 누워 스칼렛의 말을 되새기다가 일단 릴리아나를 찾아가기로 정했다.

생각해보면언제부터 내가 생각하고 움직였다고.

일단 움직이고 행동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서야 지킬 게 많아졌다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기지.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가 생각난다.

분명 게임을 하는 느낌으로 접근했었지.

히로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마약상에게 가기도 했고, 내가 죽을 뻔했는데도 어떻게 하면 눈앞의 여자와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듯 아카데미에 다녔다.

상태창이 나오고 게임에서 보던 히로인들이 실제로 눈 앞에 있으니 그런 감정이 들 수 밖에.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느끼지 못했던 기분과 새로운 인연들.

이제는 내 주변 사람들이 없는 삶이 상상도 가지 않는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사람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익숙해진 도심의 모습과 모르고 살았던 마법까지.

나는 이미 이 세계가 소중해졌다.

"… 들어간다. 릴리아나."

난 대답 없는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 흐으읏."

방에 들어가자마자 내 시야에 보인 건 릴리아나의 뒷모습.

마치 타조가 머리를 모래에 박은 채 완전히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 릴리아나는 얼굴을 침대에 박은 채 베개로 머리를 덮고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게 아직도 케이론이 본 기억의 구슬의 여파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저러니까 노크 소리도 못 들었구나.

"… 릴리아나."

털썩-

스칼렛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모든 고민은 뒤로 미뤄두고, 릴리아나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아, 아으…?"

사시나무 떨듯 몸을 파르르 떨던 릴리아나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안녕?"

"아, 아…."

얼마나 울었는지, 릴리아나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내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베개를 집어던진 릴리아나는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나, 나는 정말… 몰라. 아무것도 몰라… 진짜 아니라니까…."

"…."

"믿어줘. 제발…."

불안한 듯 갈 길을 잃은 눈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수전증 환자처럼 떠는 손.

아마 릴리아나도 아까 내 감정을 눈치챈 거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거다.

자신을 의심한다는 걸 느꼈으니까.

"릴리아나…."

난 릴리아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릴리아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로 갑자기 인간 세상에 소환된 후.

어떻게 보면 처음 이 세계에 빙의한 나와 똑같은 입장이다.

만약 내가 아무런 정보와 특전이 없이 이 세계에 빙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가끔 생각하곤 한다.

릴리아나와 정말 똑같은 상황에 놓여진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수린 누나의 존재를 몰랐으니 수린 누나와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고, 루시와 루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친구가 되지도 못했을 거다.

백아영의 취향을 몰라서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재능이 없었다면 임솔 교수님과 친해지지도 못했다.

암시장 따위 몰랐을 테니 릴리아나를 소환하지도 못했고, 남다은을 도와줄 힘이 없었으니 그녀를 구하지도 못했다.

룬의 결계를 사용하지 못하니 레베카가 날 찾아올 일도 없었겠지.

엘리스와는 말도 못 붙였을 테고, 자연스럽게 스칼렛도 모르는 사이가 된다.

이 사람들이 내 주변에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릴리아나는 나를 믿고 밝은 모습만 보여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나도 릴리아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을 안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된 켄타우로스의 기억때문에 릴리아나를 의심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너무 충격적인 걸 봐서 잠깐 미쳐버린걸까.

애초에 히로인들을 공략하면서 세계를 구하라는 말도 안 되는 업을 지고 있는데, 마왕 딸 한 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다.

그게 이 세계의 주인공인 이호연이니까.

"몰라. 몰라. 정말 몰라… 미안해. 미, 미안해….'

"릴리아나."

난 마음을 다잡고 릴리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내 목소리에서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오히려 더욱 겁먹은 듯 말했다.

"… 나였어. 분명히 나였어. 응, 나인 걸 알아. 하지만,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괜찮아. 일단 진정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릴리아나는 억울한 듯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치만 나는. 정말… 그런 거 싫어. 죽이는 것도 싫고. 난 그냥…."

"… 이리 와"

"으, 아…?"

릴리아나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본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기에 밝던 릴리아나가 이렇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와의 추억까지 모두 부정당하는 그 느낌.

공감할 수 없으니 그저 받아들여 주는 수 밖에.

나는 릴리아나의 몸을 잡아당기며 내 품으로 끌고왔다.

"릴리아나. 네가 마왕의 딸이든 킬러 퀸이든 상관없어. 넌 딱 하나만 약속하면 돼."

"…."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고 말해. 그거면 충분해."

다른 말은 필요 없다.

릴리아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

우정과 사랑의 힘….

사실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볼 때 강한 보스를 우정의 힘으로 물리칠 때 마다 진부하다고 욕하곤 했었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의지할 때는 의지해야지.

주인공이 되고 나서야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인가.

내 말을 들은 릴리아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코를 훌쩍거렸다.

"울지 말고. 애도 아니고 왜 울어."

"흐, 흐윽… 나, 나 버리는 줄 알고. 내가 싫어진 줄 알고…."

"쓰읍.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방송 망해."

"푸흐, 아, 무슨 소리야…! 나는 진지했는데…."

"내 말에 대답이나 해. 릴리아나."

릴리아나를 내 몸에서 살짝 떼어내고 눈을 마주쳤다.

눈이 살짝 충혈되긴 했지만, 여전히 예쁜 얼굴은 날 보며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 응. 당연하지. 넌 내 주인님인걸."

"그럼 됐어."

"아, 아흐. 잠깐… 지금은 하지 마…!"

난 릴리아나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간지럽혔다.

하지 말라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릴리아나의 모습은 이제서야 조금 텐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아버님과 어머님께 첫인사는 '따님은 이미 제가 데려갔습니다.' 로 할까?"

"됐거든?!"

"울면서 웃으면 큰일 나는데."

"그, 그만 놀려…!"

나는 릴리아나의 투정을 받아주며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연약한 몸이 내게 안겨 들어왔다.

양손으로 내 허리를 꽉 잡은 릴리아나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가슴에 비비적거렸다.

"… 무서웠어. 그 기억도, 네 행동도."

"미안. 많이 티 났어? 최대한 숨기려고 한 건데."

"바보. 평소처럼 날 안아줬어야지."

꾸욱-

쩝. 그렇게 티 났나?

나름 숨기려고 하는데도 히로인들에게는 결국 들키는 거 같다.

연기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쉽네.

릴리아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왜 마음이 바로 바뀐 거야? 분명 '나 생각할 거 너무 많아. 다가오지 마.' 하는 표정이었는데."

"… 음, 스칼렛이랑 대화를 좀 했거든."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는 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항상 하게 된다.

스윗남은 역시 포기하자.

여자가 10명이 넘는데 스윗은 무슨.

"… 스카웃이랑?"

"응. 스칼렛이 좋은 말을 많이 해줬거든. 그래서 이렇게 너랑…."

"그럼 스카웃은 어딨는데?"

그때, 릴리아나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약간… '이 새끼 뭐지?'하는 눈이었다.

"어, 방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숙소에 있나?"

내 방에서 나간 후 얼굴이 안 보였으니 남은 방에 들어가 있겠지.

어쩌면 자기 숙소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화가 난 것 같았으니까.

"멍청이. 진짜 바보…."

"…… 나?"

내가 왜?

*

"으, 으아악…."

이호연의 방에서 나온 스칼렛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집어 던졌다.

침대에서 몇 번이나 발을 구르고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오글거리는 손과 발에 간신히 적응한 스칼렛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찌질해."

찌질하다.

이호연에게 마구 말을 쏟아내던 자신의 모습은 분명 찌질했다.

처음엔 릴리아나를 대하는 이호연의 태도에 화가 난 게 맞았다.

하지만 이호연에게 말 할때는 자신의 심경도 담겨있었다.

릴리아나를 챙기는 척하면서, 자신도 좀 봐달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담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릴리아나를 챙기려고 갔다가 화가 나서 자신의 감정까지 쏟아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하아, 이 찌질녀.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니… 내가 뭐라고 당신이래. 하아…."

후회된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다행인 점은 이호연이 릴리아나에게 찾아갔다는 점이지만….

"…."

그게 과연 자신에게도 다행일까.

자신의 말을 들은 이호연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마 일은 잘 풀리겠지.

주먹 한 대 맞은 한심한 표정이었으니, 금방 정신을 차릴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뜨겁게 섹스 한 판 하고 화해.

이호연과 릴리아나.

둘 다 행복해지는 해피엔딩.

… 하지만 자신의 순위는 또 밀리는 거다.

"에휴."

이호연을 찾아간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릴리아나의 표정을 봤을 때, 이건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릴리아나가 아니라 이호연이다.

"시간을 주긴 개뿔.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구해주지도 말았어야 했어."

스칼렛은 천장의 무늬를 세며 입맛을 다셨다.

"… 그건 아닌가?"

살리긴 했어야지. 음. 맞아.

고개를 끄덕인 스칼렛은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소중한 게 참 많다며 비꼬고, 다른 여자랑 놀러 갈 때 외로움을 달랬다는 말.

무슨 일을 벌여도 해결할 수 있다는 패기와 자신감. 그리고 정말 해결해버리는 능력이 있다는 말.

사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 자신 있던 모습이 사라진 이호연이 보기 싫었으니까.

"… 오늘 밤은 못 보겠네. 숙소로 돌아가야지."

둘만의 시간을 가질 테니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오랜만에 아이리스 길드의 숙소로 돌아가 볼까.

스윽- 슥-

스칼렛은 몸의 자유를 되찾은 뒤 벗어놨던 외출용 정장을 다시 걸쳤다.

둘의 앞에서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몸에 이상은 없다고하니 아마 며칠 정도 후유증만 버티면 되겠지.

똑똑-

"… 어?"

평소처럼 창문을 열고 나가려던 스칼렛은,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몸을 멈췄다.

"스칼렛. 나야. 안에 있어?"

"어...? 어?!"

익숙한 목소리.

이호연의 목소리였다.

'왜 저 사람이 여기로?'

분명 지금쯤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안에 없나? 스칼렛? 문 연다?"

"자, 잠시만. 아니, 잠시만요. 안에 있습니다."

스칼렛은 주변을 둘러봤다.

탁─ 탁─

발을 구르느라 엉망이 된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점검했다.

외출복을 입고 있었지만, 굳이 벗을 필요는 없겠지.

나름 깔끔하고 예쁜 복장이니까.

크흠. 큼.

마지막으로 목까지 더듬은 후에, 스칼렛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스칼렛. 있었구나."

"무슨 일이신가요. 릴리아나 님과 대화는 끝나신 건가요?"

"응. 아, 들어가도 되지?"

"어, 어… 네."

약간 화난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했던 스칼렛은, 밀고들어오는 이호연에게 살짝 당황하며 몸을 비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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