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8 338화. Killer Queen , 릴리아나 칼리오페 (3)
콰직- 콰드득-
퍼엉!
"크, 크아악…."
패기 있는 케이론의 발언과 다르게 전황은 처음부터 압도적이었다.
사실 릴리아나의 기세만 봐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반전은 없었다.
퍽- 털썩-
지루한 듯 손을 휘저으며 마력을 움직이는 릴리아나와 다르게 케이론은 대검에 마력을 담아 혼신의 힘을 다해 릴리아나 주변의 해골을 베어냈다.
"하, 하아… Killer Queen! 내가 어떻게든…."
"말 인간들은 말이 너무 많다니까."
철컥- 철컥-
릴리아나가 손가락을 흔들자, 순식간에 케이론이 부순 만큼의 해골이 일어났고, 동시에 보조 마법들이 캐스팅되며 해골의 안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마 강화 마법 중의 하나겠지.
쐐액- 팍-
"크윽…!"
기껏 쓰러트린 해골들이 다시 일어나는 걸 보며 케이론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동시에 그의 옆구리로 검붉은 섬광이 박혔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불빛은 나조차도 파악하기 힘든 속도로 케이론의 몸을 관통했다.
케이론은 그 충격에 다리를 굽히며 꺽꺽댔다.
옆구리에서 튄 혈흔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릴리아나는 무표정하게 그 상황을 지켜봤다.
"…."
보는 내가 기분 나빠질 정도로 압도적인 싸움.
케이론의 수준도 낮은 편이 아니었다.
상대인 릴리아나가 너무 강했을 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케이론의 의지는 대단했지만… 계속 몸의 상처만 늘어났다.
퍽- 퍽-
얼마나 싸움이 이어졌을까.
케이론의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다다른거겠지.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듯한 그 눈은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겠지.
복수가 됐든, 마왕의 후계자 경쟁이 됐든,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있을 거다.
물론 그 의지와 다르게,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케이론은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릴리아나가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쓰러질 것 같이 약해진 케이론은 마지막 힘으로 대검을 들었다.
최후의 불꽃을 불태우겠다는 마음가짐이 내 가슴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케이론의 기억을 엿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때, 마력을 일으키던 릴리아나가 갑자기 손을 내렸다.
"아, 재미없엉. 그냥 안 죽일래."
"… 뭐라고?"
"어떻게 보면 내 동생이니까. 한 번은 봐줄게.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거든. 마왕님의 인정도 받았구!"
의자에서 툭 뛰어 내린 릴리아나는 뼈 하나를 발로 차며 케이론에게 뒷모습을 보였다.
싸우는 도중에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건 말도 안 되는 행위지만, 릴리아나는 개의치 않은 듯했다.
케이론을 아예 상대로 보고있지 않은거다.
"이, 이봐. 아직 나는 싸울 수 있다…!"
케이론은 허무하게 끝난 전투에 당황한 듯 릴리아나를 붙잡았다.
기껏 목숨을 걸었는데, 아예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니.
마왕의 후계자로서 이런 수치를 받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케이론이 느끼는 치욕은 내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케이론의 자존심은 릴리아나의 다음 말로 완전히 무너졌다.
"정말? 지금 가만히 있으면 살 수 있는데?"
"Killer Queen…."
"기껏 구한 목숨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린다고? 내 동생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이번에 또 덤비면 진짜 죽일 거다?!"
"…."
"기분 좋을 때 봐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 마왕 자리는 내 거니까 포기해야 해?"
저벅저벅.
릴리아나는 말을 마치고, 살짝 웃으며 가던 길로 걸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케이론의 다리와검을 든 손.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뿔을 베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케이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천천히 걷던 릴리아나가 살짝 뒤를 돌어봤다.
"가만히 있으라고 정말 가만히 있네. 진짜 웃겨. 어디 가서 마왕의 자식이란 말 하지 마. …쪽팔리니까."
덜그럭- 덜그럭-
마지막까지 자신을 조롱하는 릴리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케이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아… 크흐윽."
릴리아나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케이론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검으로 내려쳤다.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진 한 명의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흐느꼈다.
'이래서 용병이 된 건가.'
벽을 느껴서 용병이 되었다고 하더니, 자신과 같은 마왕계승자인 릴리아나때문에 도망친 것 같다.
혹시라도 릴리아나가 쫒아와서 죽일까 봐 F급 용병인 척 약한 척을 하는 거고,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릴리아나를 봤을 때 모든 걸 포기한 거다.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당했으니까.
사실 모든 걸 포기하고 폐인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이네.
"하, 하아… 어째서. 어째서 서큐버스 따위에게…."
흐느끼는 케이론의 비참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지내는 곳에서 구역질하지 말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아마 특전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충격이 꽤 컸으니까.
"… 쯧. 기분 더럽네."
혹시 릴리아나도 똑같은 걸 본 건가?
다행히 나는 [뚜렷한 정신력]이라는 특전 때문에 심한 반동이 오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릴리아나와 마왕의 관계.
그리고 내가 취해야 할 태도….
"아."
하지만 내 생각을 끊는 듯 칠흑같은 어둠이 날 감쌌다.
*
"… 후우."
눈을 떴을 때는 숙소의 거실이었다.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몽롱함과 나른함.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아, 아… 아아악…."
"릴리아나 님! 릴리아나 님…!"
내 옆의 릴리아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스칼렛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다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호연님! 릴리아나 님의 상태가 이상해요. 눈을 뜨자마자 이상행동을…."
"… 릴리아나. 너도 본 거야?"
"나는, 나는… 아니야. 내가 아닌데. 분명…."
"…."
릴리아나를 보자마자 아까의 기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케이론이 느꼈던 오싹한 감정과 소름 끼치는 두려움.
격이 다른 포식자를 만났을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심.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해 불온한 감정을 털어냈다.
'어째서 그런 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과거의 릴리아나는 지금과 전혀 달랐어.'
분명한 건 릴리아나는 마왕의 후계자였고 말하는 걸 들어보면 계승 순위도 높았을 거다.
그리고 지옥의 마왕은, 결국 내가 쓰러뜨려야 할 적이다.
내 여자들을 위해.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 남기 위해.
히로인들을 공략한 상태로 마왕의 습격을 막아내야 한다.
그게 이 세계로 날 보낸 신과의 내기.
그렇다면 여기서 릴리아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만약 릴리아나가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내 편을 들어줄까.
아니면 아버지인 마왕의 편을 들어줄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기억을 잃은 척을 하고있는 건 아닐까.
"하아…."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래.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건 나도 안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지.
이 세계의 신은 마왕보다 높은 존재.
아무리 마왕이라도 신의 의도까지 파악하고 그런 일을 벌일 순 없다.
그리고 나와 릴리아나의 사이엔 [지옥 망나니 소환 계약서]가 있다.
그렇기에 무조건 나보다 약한 마력을 사용해야 하고,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예외가 없는 건 아니야.'
분명 성욕을 참지 못한 릴리아나가 날 제압했던 적이 있었다.
지옥의 불공정 계약답게 쓰여 있지 않은 다른 제약이 있을 거다.
"호연님. 지금 릴리아나 님이…."
"아, 나… 나는 모르는데… 마왕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는…."
릴리아나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 릴리아나. 걱정 마."
나는 조심스럽게 릴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그녀를 끌어안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릴리아나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
침대 위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시발 진짜."
가만히 있어도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릴리아나는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나도 따라갔겠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나도 내 방으로 들어왔다.
"릴리아나…."
분명 지옥의 그 서큐버스는 릴리아나였다.
릴리아나의 상태를 보면 직접 물어본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겠지.
"… 대체 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를 건데."
이미 몇 번이나 봐줬다.
내 반응이 과민반응이라기엔, 이미 허용 빈도를 넘었다는 뜻이다.
릴리아나의 기억에 대한 것도 그렇고, 지옥의 망나니와 정체불명의 과거까지.
불안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릴리아나에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도움이 되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혹시 너무 강해서 봉인 당한 건가? 그래서 망나니 계약서에서 소환되는 거고… 아니, 그러면 케이론이 여기 소환된 이유는 뭔데? 분명 케이론도 망나니 계약서에 써있었어."
내 기억을 하나씩 되짚으며 가능성을 생각해봤지만,나 혼자서는 아무리 고민해봤자 소용없었다.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그걸 기반으로 추론할 텐데 정보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똑똑똑.
"호연님."
"아…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도 있었다.
스칼렛… 하고도 좋은 분위기였는데,지금은 그런 텐션을 올릴 수 없었다.
나는 방에 들어온 스칼렛을 보며 말을 걸었다.
"스칼렛. 미안해. 괜히 너만 불편하겠네."
"괜찮습니다. 밀려나는 건 일상이니까요."
"…."
스칼렛은 터덜터덜 걸어와 내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을 가진 후, 스칼렛이 먼저 입을 열었다.
"릴리아나 님과 무엇을 봤는지… 저로서는 알 권리가 없겠죠. 하지만 두 분 다 너무 이상해지셨어요."
"… 미안하다."
"평소의 호연 님이었다면 저런 상태의 릴리아나 님을 혼자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요. 나쁜 남자지만, 착한 면도 있으니까."
"…."
나도 그러고 싶다.
스칼렛.
이상한 생각들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히로인 중 한 명이 최종 보스의 딸이라니.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어쩐지.
릴리아나의 호감도가 100을 못 찍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뜻이겠지.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온 릴리아나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마왕의 편에 선다면….
"하아."
진짜 개 같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호연님. 뭐가 더 중요한지를 생각하셔야 해요. 걱정도 좋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걸 걱정해야 한다고요."
"… 그러게. 네 말이 맞는 건 알아.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걸 내버려 두면, 언젠가 내 소중한 것들에 피해가 갈 수도 있어."
책임져야 할 게 많아진 지금.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모든 선택지를 고민하며 확실한 길을 골라야한다.
"하아…."
스칼렛은 답답한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봤다.
"… 스칼렛?"
"그래요. 다 알아요. 소중한 게 참 많으시잖아요. 하지만…."
스칼렛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와서 당신이 그러면 안 되잖아."
"… 어?"
나는 갑작스러운 스칼렛의 호칭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스칼렛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책임하게 소환해서 지옥에서 여기까지 온 릴리아나 님은. 당신이 아카데미에서 여자랑 놀러 다니고 자러 다닐 때 방에서 방송하며 외로움을 달랬던 릴리아나 님은… 왜 최우선이 아닌데요."
"스칼렛…."
나는 멍하니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면 어떻게든 책임을 지셔야죠. 릴리아나 님이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어떻게든 당신이 해결하세요. 그게 맞는 방법이니까."
"…."
"제가 알던 당신, 이호연은… 적어도 그렇게 행동했어요. 그게 당신의 매력이었거든요. 무슨 일을 벌여도 해결할 수 있다는 패기와 자신감. 그리고 정말 해결해버리는 능력. 그리고, 하아."
스칼렛은 말을 마치자마자 방 밖으로 나갔다.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자리를 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몇 마디는, 내게 가시처럼 박혀왔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머리를 식히자.
릴리아나에게… 찾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