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1 331화. 켄타우로스 추적 작전 (3)
- 다들 왜 아무 말도 없징?
"…."
"…."
"…."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미니 비행기의 안.
운전자는 스칼렛이었고, 옆의 보조 운전석에 앉은 건 아이린.
뒷자리에는 나와 엘리스가 앉아있었다.
나와 엘리스, 그리고 스칼렛은 원래 같이 타기로 정해져 있었고, 아이린의 자리에 세바스 찬이 타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비행기에 타기 직전 갑자기 자기도 같이 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서 같이 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타고나니까 스칼렛과 엘리스 때문에 나에게 말을 걸진 못했다.
저럴거면 왜 타겠다고 한 거야.
스칼렛은 조용히 앞을 보며 운전했고, 아이린은 곁눈질로 나와 엘리스를 살폈다.
엘리스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고 무언가 집중 하고있는 것 같았다.
아니. 너 어제 나랑 첫 경험 했잖아. 엘리스.
반응이 그렇게 없어?
켄타우로스의 은신처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대화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가 힘들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스. 컨디션은 어때?"
"처음 할 말이 그거?"
"…."
엘리스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무슨 일 있나?' 정도로 끝나겠지만, 사정을 아는 내가 듣기엔 사형선고 같은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나는 엘리스의 목소리에서 작은 원망을 캐치했다.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오래갈 것 같은 서운함.
그렇기에 '마사지라고 우기기' 계획을 폐기하고 바로 사과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미안."
"… 짐승 새끼."
"정말 미안."
"… 걸레 새끼."
"… 미안해."
엘리스는 앞자리에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나도 조용히 사과했다.
- 뭐야! 왜 욕을 먹고만 있어!
릴리아나는 나 대신 화내줬지만, 지금 내 처지로는 불만을 내밀 수 없었다.
그래. 욕해라.
그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욕해!
아니, 마음에 안 든다면 때려도 된다.
어차피 조용히 넘어갈 생각은 안 했거든.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97 ]
- [ 성욕 : 80 ]
- [ 식욕 : 5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나쁜 새끼지만 이럴 때 소심해지는 건 꽤 귀엽네.
'응?'
호감도 97. 매우 높은 수치다.
말하는 걸 보면 어제 일은 다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속마음도 그렇고, 올라간 호감도도 그렇고 이건 단순히 틱틱대는 거일 가능성이 높다.
'이거 잠깐 맞춰주기만 하면 되겠는데.'
엘리스도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좋았잖아.
서로 좋았으니까 넘어가자.
"뭐가 미안한데?"
"…."
하지만 엘리스는 말 한마디로 내 자신감을 다 죽여버렸다.
무섭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너무 무섭다.
"너도 좋았잖아."
"진짜 미쳤구나."
"미안. 농담이야. 싫다고 했는데 해서 미안."
인터넷에서만 들었던 뭐가 미안한데? 를 실제로 들었더니 뇌에 과부하가 와버렸다.
나 같은 찐따한테는 너무 현실적인 말이잖아. 여자를 몇 명이나 안아봤지만 저런 질문은 어려웠다.
"하아… 너 어제 일을 기억하긴 해?"
"나는 당연히 기억하지."
"잠은 잔 거야? 눈이 완전히 죽어있는데.'
"거의 못 자긴 했어."
"… 혹시 내가 쓰러진 뒤에도 한 건 아니지? 어쩐지 일어났는데 아래가 아팠어."
"잘 때 건드리진 않았어. 네가 잘 때 좀 더 마사지하고 숙소에 가서 마법진을 점검하다가 바로 끌려 나와서 피곤한 거야."
"흐음…."
슬쩍 흘리듯이 마사지라고 했는데, 엘리스는 별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얘는 날 걱정해주는 건지 욕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이호연."
"응."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혹시 여기서 연인들 간의 스킨십이라도 할 생각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 아아악…!"
나는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다가, 급하게 입술을 깨물고 상체를 숙였다.
엘리스는 악마처럼 웃으며 내 허벅지를 꼬집은 손을 빼고 내 귀에 속삭였다.
"적어도 일어났을 때 내 옆에 있었다면 덜 놀랐을 거야."
"그건… 미안."
생각해보니 그렇네.
내 입장에서야 몇 시간이나 마사지했으니 피곤하기도 하고, 아이린도 있었으니 숙소로 돌아오는 게 맞겠지만, 첫 경험인 여자를 혼자 내버려 둔 거다.
여자는 섹스보다 섹스가 끝난 뒤의 여운을 더 중요시한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 됐어. 쌍욕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반성하는 것 같네. 뭐, 몸도 가볍고."
"몸은 얼마나 가벼워?"
"글쎄. 제대로 실험해보진 않았는데 꽤 놀라울 정도야. … 혹시 원인이 그건가?"
"그거?"
"아니, 너 지금 알면서… 하아.'
스윽-
살짝 얼굴이 붉어진 엘리스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정면의 운전석을 바라봤다.
스칼렛과 아이린은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아마 아이린은 대부분의 대화를 들었을 거다.
아무리 조용히 얘기하더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닌 이상, 아이린 정도의 강자면 청력을 집중하는 거로 다 들을 수 있다.
"… 이거 봐."
엘리스는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들고 내가 보이는 곳에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했던 그거 말이야. 그거 때문에 내 마력이 이렇게 활발한 거야?]
탁-
엘리스는 스마트 워치를 내 손에 넘겼다.
아마 여기에 타이핑해서 대답하라는 거겠지.
[그니까 그게 뭔데.]
탁-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죽일 거야.]
[미안. 맞아. 섹스가 효과가 직방이거든.]
[… 정말?]
응. 물론 내 성욕이 들어간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몸 안쪽에 마력이 담긴 정액을 넣는 게 효과가 좋아. 특히 나같이 마력을 잘 조종하면 더 좋고.]
탁- 탁- 탁- 탁-
우리는 스마트 워치로 대화를 이어갔다.
- 왜 이렇게 대화하는 거야? 보기 힘들엉.
쓰담쓰담.
불만을 내비치는 릴리아나를 달래주며 슬쩍 앞을 확인하자 아이린이 이쪽을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말을 못 들으니 속이 타겠지.
엘리스가 나한테 부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 걸 보고 어이가 없을 거다.
한편 엘리스의 표정도 재밌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는데, 아마 내 마사지의 효과가 그만큼 대단했나 보다. 몇 시간이나 집중한 보람이 있네.
'이러면 또 만날 명분이 생기지.'
심지어 마력 보충이라며 정액을 먹일 수도 있다.
이런 걸 순식간에 생각하다니 역시 나는 천재인가?
"흐음. 알겠어. 일단 오늘 좀 싸워보고 생각할래."
"응. 좋은 생각이야."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자는 게 어때? 시간을 뺏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괜찮아. 그리고 곧 도착이야."
잠깐의 대화 사이에, 추적하는 마력과 가까워졌다.
나는 아이작에게 받은 통신기를 켰다.
- 이호연입니다. 이쯤에서 내리죠.
*
- 잠시 대기입니다.
치지직-
비행기에 내린 추적조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곳은 파리의 교외.
그중에서도 숲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판데믹의 은신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보통 적들의 은신처는 이렇게 허를 찌르는 곳에 있더라.
"적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나? 이런 지형은 침투하는 우리가 불리한데."
"저 숲 안인 건 확실하고요, 아예 지하에 은신처를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 흐음. 어떻게 진입하지."
- 그냥 나무를 다 태워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
나는 릴리아나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렇게 무식한 생각이라니…….
잠시만.
'저거 할만하지 않나?'
내 옆에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이 있는데, 두려울 게 어디 있을까.
이 사람은 프랑스 정부도 움직이는 사람이잖아.
나는 바로 아이작에게 의견을 제출했다.
"길드장님. 판데믹을 잡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나?"
"그냥 다 태워버리죠?"
"… 좋은데."
아이작은 내 말에 동의하듯 숲을 바라봤다.
나는 아이작의 내부평가를 한 단계 높이며 그 옆에 섰다.
*
판데믹 프랑스 지부의 은신처.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마인들과 최근 늘어난 간부들이 쉬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켄타우로스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소음이 늘어났기에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마인들 사이에서 다리를 굽혀 앉아있던 켄타우로스는 조용히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오고 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준비하도록."
짧은 대화를 마친 켄타우로스는 불편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은신처를 걸었다.
마에스트로라는 놈이 건 세뇌는 엄청나게 강했다.
힘을 드러내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을 드러내게 되는 무서운 세뇌.
인간 중에 이렇게 강한 인간이 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이렇게 정신은 살아있다는 점일까.
하지만 정신이 살아있기에, 세뇌에 걸린 걸 알면서도 그 세뇌에 따라야 하는 게 굉장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켄타우로스는 모든 일을 그에게 유리하게 움직여야 했다.
짧게라도 마인들에게 습격을 전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나마 저번에 만났던 추적조라는 인간들 덕분에 어째서 자신이 인간계에 있는지에 대한 해답은 알았지만, 이유를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바꿀 수 없는 상황이 더 짜증날 뿐.
어쩌면 이것도 세뇌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스트레스를 인간들을 죽이며 풀어야 하니까.
저벅. 저벅.
켄타우로스는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파리의 교외 중에서도 인적이 없고 숲이 우거진 곳.
지하 깊은 곳에 있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고 가까이 와서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결계가 쳐져 있는 이곳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몰라도, 추적조에서 만났던 마력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한 인간 몇 명과 약한 인간들의 마력. 그 사이에는 지옥의 마력도 섞여있었다.
"…."
켄타우로스는 몇십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시체와 피, 그리고 뼈들이 강처럼 흐르는 학살의 현장.
어린 나이에 마왕 성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조차 참혹한 현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세상은 냉정했다.지옥이라는 야생에서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고, 켄타우로스에겐 그만큼의 재능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힘을 숨기고 자세를 낮추어 일개 용병의 삶으로 살아갔다.
마왕의 후계자 중 서열이 낮았던 그가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방식은 그뿐이었다.
그가 모든 걸 포기했던 날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아무렇지 않게 학살을 자행하고 언데드들이 들고 있는 왕좌에 앉아있던 그 섬뜩한 ….
"왔나."
켄타우로스는 다가오는 마력들을 느끼며 고민을 끊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앙-!
숲 한가운데에 거대한 번개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