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1 321화. 점심 식사
"맛있겠다. 스칼렛. 그렇지않아?"
"…."
나는 눈앞에서 김을 내고있는 뜨거운 국밥을 보며 침을 삼켰다.
"설마 프랑스 한복판에 한식당이 있을 줄은 몰랐네.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데에 맞는 곳은 아니니까요."
"왜? 파스타나 국밥이나 뭐가 다른데."
"……."
한국인에게 파스타가 데이트코스라면 프랑스인에게는 국밥이 데이트코스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스칼렛의 앞에는 내 추천메뉴인 치즈순두부찌개가 놓여있었다.
사실 내가 먹어보고 싶어서 시켰다.
치즈가 잔뜩 올라가 있어 겉으로 보기엔 치즈 계란찜 같이 생겼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저것도 엄청 맛있어 보였다.
"나도 순두부 한 입만 먹어보자."
"… 이건 제 음식인데요."
"마! 그게 한국의 정이란거다. 음~ 맛있어."
"아…."
치즈 순두부가 맞는 건가 싶었는데 탱탱한 두부와 치즈가 입안에서 섞이는 맛이 괜찮았다.
스칼렛은 내가 순두부를 떠먹는 걸 보며 입을 벌리고 날 바라봤는데,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엄청 재밌었다.
그래도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같이 밥 먹으러 왔는데 삐지게 만들 순 없지.
이러다 스칼렛이 한국을 혐오할지도 모른다.
"다른 여성분들이랑은 좋은 곳을 가놓고 저는 왜 이런 곳인가요."
"야. 한식당 무시하지 마. 여기 미쉐린도 받은 곳이더만."
"…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금 더 분위기 있는 곳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스칼렛은 순두부를 떠먹으며 한숨을 쉬었다.
"맛은 있는데, 그러니까 더 짜증 나네요."
"그러게. 진짜 맛있다."
어떻게 된 게 한국에서 먹는 거보다 여기서 먹는 게 더 맛있지?
기름진 국물이 입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매일같이 빵만 먹다가 밥알을 먹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게 한국인의 밥심이지.
잠시 식사에 집중하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데이트 때는 좀 더 고급진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스칼렛 양."
"갑자기 왜 그런 말투를 사용하시는 건가요. 게다가 이게 데이트라고 한 적 없습니다."
스칼렛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순두부를 떠먹었다.
혹시 국밥을 먹으러 온 게 불만이라 저러는건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왜? 우리는 호감도 있고 한 발짝 선을 넘기만 하면 되는 상태잖아."
"케흡! 콜록! 콜록!"
스칼렛은 내 말을 들음과 동시에 스푼을 테이블에 떨어뜨리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놀리려고 한 말인데, 걱정될 정도로 심하게 반응했다.
... 너무 심했나?
"스칼렛. 괜찮아?"
"콜록. 네, 괜찮습니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으신 거죠? 아니, 한 명밖에 없겠군요. 어제 길드장님의 호출에 다녀오셨으니."
"길드장님이 먼저 말해준 건 아니야. 내가 캐물었거든."
"… 천하의 아이리스 길드가 정보 유출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네요. 빨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나는 미래의 장인어른을 쉴드쳤지만 소용은 없었다.
스칼렛은 창피한 듯 냅킨으로 입을 가렸는데,얼굴이 살짝 붉어진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렇게 보고해야 임무가 더 쉬워져서 한 것뿐입니다."
"그래? 아쉽네."
"… 저랑 밀당하지마세요."
스칼렛은 분한 듯 주먹을 쥐었고,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스칼렛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스칼렛]
- [ 호감도 : 80 ]
- [ 성욕 : 5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0 ]
현재 상태 :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하지… 그래도 순두부는 맛있어.
'언제 봐도 속마음은 참 무서워.'
게다가 요즘은 점점 말로도 저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그래도 갑을관계인데 잊고있는 것 같단 말이지.
"아무튼, 밥이나 빨리 드시죠."
"그래. 아, 한 입 더 먹어도 되냐? 그거 맛있네."
"… 예. 많이 드세요."
스칼렛은 포기해버린 듯 내 스푼이 순두부로 향하는 걸 막지 않았다.
*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스칼렛도 음식의 맛 자체에는 만족한 것 같았다.
"맛있었어."
"확실히 그렇네요."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아이리스 길드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에는 어디 놀러 갈까?"
"… 갑자기요?"
"응. 싫어?"
"그런건 아니지만, 저만 데려가면 릴리아나 님이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야. 단둘이 가자는 말은 안 했잖아."
"…."
"미안해. 장난이었어."
날 쓰레기처럼 보는 스칼렛의 눈이 무서워서 바로 사과했다.
그렇게 살벌하게 볼 건 없잖아. 왜 그래.
"그래도 나랑 놀면 재밌잖아. 같이 놀러 갈 수도 있지."
"하아… 그런 건 원래 남자가 주도하는 겁니다. 일단 강하게 밀어붙이면 진짜 싫어하지않는 이상 대부분 허락할거에요. 여성의 마음을 정말 모르시네요."
"난 남녀평등주의자야. 가끔은 여자가 주도할 수도 있는 법이잖아."
"그런 사람이 여자를 몇 명이나 끼고 다니는 건가요?"
"……"
나름 반박할 말이 많았는데, 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역시 스칼렛은 강적이네.
"뭐. 어쩌면 잘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런 서툰 부분이 있으니 여성분들이 호연님에게 매달리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응 그렇…."
쫘악-
그게 내 매력이라고 너스레를 떨려고 하는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뭐야.'
깜짝 놀랐네.
나는 빠르게 마력을 펼쳤다.
그리고 앞에 있는 골목길에서 은신 마법을 사용한 채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아이린을 발견했다.
"… 스칼렛."
"네. 근데 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시는 거죠?"
"너도 따라 해. 지금 아이린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거든."
"아이린 아가씨요? …또 놀리시는 거 아닌가요?"
스칼렛은 날 의심하면서도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줬다.
그녀도 나름대로 마력으로 주변을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저 사람 날 감시하는 거 같단 말이야. 저번 출격부터 나를 계속 바라보더라고."
"으음, 아가씨의 그런 모습을 자주 보진 못했는데요. 워낙 쿨한 이미지를 가진 분이라."
"분명해. 나를 견제하고 있어. 아마 엘리스 때문인 것 같아."
"엘리스 아가씨요?"
"… 설명하자면 긴데. 그런 게 있어."
스칼렛은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으음…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제가 아이리스 길드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길드원이 '어린 엘리스 아가씨가 너무 귀엽다' 라고 말했다가 아이린 아가씨에게 끌려가고, 그다음 날 사표를 제출 했다고 하던데요."
"그건 괴담이야 팩트야."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팩트가 아닐까.
아이린이 이미지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그런 괴담이 생길 리가 없지.
"… 아무튼, 가봐. 계속 여기 있으면 너한테도 불똥이 튀겠다."
"알겠습니다. 오늘 식사는 잘 먹었습니다."
스칼렛은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뒤로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고, 아이린은 내 뒤에서 날 따라왔다.
'저걸 어떻게 할까.'
왜 나한테 저렇게 신경 쓰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엘리스 때문인 건 확실하다.
문제는 어떻게 엘리스와 내 관계를 확신하고 저렇게 쫓아 오냐겠지.
나는 스칼렛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질투….'
질투를 시킨다라.
엘리스와의 관계로 질투를 유발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분명 아이린의 점수는 83점이었다.
공략한다면 꽤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질투해서 공략할 수는 있나?
'일단 질러볼까.'
어차피 나를 좋아하진 않는 것 같으니, 한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손절하는 수 밖에.
아까 길드원은 끌려가서 사표를 냈느니 뭐니 하지만, 날 그렇게 할 순 없겠지.
나는 엘리스에게도 아이리스 길드에게도 소중한 존재니까.
고민을 마친 나는 뒤로 돌아 아이린이 숨어있는 간판 뒤에 걸어갔다.
그리고 간판 뒤에 딱 붙어있는 아이린을 보며 말을 걸었다.
"뭐 하세요?"
내가 말을 걸자 흠칫하고 놀란 아이린은, 곧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스칼렛하고 밥 먹고 왔는데요. 아이린 님이 제 뒤를 미행하길래 의도가 궁금해서요."
"…."
아이린도 참 애매한 상황일 거다.
내가 엘리스 말고 다른 여자랑 노는 게 마음에 들지않지만 그렇다고 엘리스랑 내 관계를 인정하기도 싫겠지.
나는 바로 화를 내며 덤빌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참을성이 있었다.
이러면 계획 폐기.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할 말이 없으시면 그냥 갈게요."
"자, 잠시만."
그때, 아이린이 돌아가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
"… 하."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뜬 엘리스는 뉴스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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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하아."
커뮤니티의 반응을 확인하던 엘리스는 느껴지는 두통에 커피를 쭉 들이켰다.
엘리스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호연이 프랑스 정부의 부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세바스찬에게 진위를 물었다.
'아마 길드장님과 이호연 생도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진 모양입니다. 저도 오늘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합의에 엘리스는 없었다.
그녀는 켄타우로스를 공략할 능력 따위 없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 난 시험 보러 가야 되는데."
엘리스는 당장 내일이면 귀국이었다.
당연히 이호연과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일정이 되었다.
"…."
뜨거운 커피를 어느새 다 마셔버린 엘리스는 결국 스마트워치를 들었다.
딱히 같이 안 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여자의 감이라고 할까.
프랑스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녀의 경험이든 이호연과의 관계든 어딘가 큰 게 바뀔 것 같았다.
"후우… 어쩔 수 없어. 잠시만. 잠시만."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 으응?! 우리 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익숙한 아빠의 목소리.
이 사람은 내가 전화를 걸면 항상 이렇게 반응한다.
크흠-
전화에 들리지않게 목을 다듬은 엘리스는 혀를 최대한으로 꼬았다.
"… 아빵. 뭐해용?"
"아니 그게 아니구우…."
"엘리스도 프랑스에 있고 싶은데엥…."
뚝-
"… 끄아악."
잠시 후.
침대에 몸을 던진 엘리스는 데굴데굴 구르며 화끈해진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