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6화 (306/648)

EP.306 306화. 아이리스 길드로 (4)

"에잇.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왜 따라오는 거야."

내 등을 떠밀며 로비 옆의 응접실까지 끌고 온 아이린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유리로 이루어진 응접실의 바깥에는 결국 우리를 따라온 세바스 찬과 스칼렛이 이 쪽을 보며 서 있었는데, 아이린은 그 둘을 잠깐 지켜보다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환영 받느라 고생했어. 길드장님 고집이라… 아, 음료수라도 먹을래?"

"괜찮습니다. 할 말이 있으신 거죠?"

나는 아이린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시도했다.

음료수나 먹을 때가 아니지.

이 여우 같은 여자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들어야 하거든.

"으응. 특별한 건 아니고, 켄타우로스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은 볼 사이인데 대화 좀 해보려고 했지."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의외로 평범한 대화였구나.

다행이다.

"엘리스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처음엔 학생회에서 만났다가 서바이벌 시험에서 친해졌어요."

"아하…. 지금은 마사지도 하고 있다며."

"네. 마나를 다루는 데에 자신이 있어서요."

아이린과의 대화가 지금까지는 정상같지만, 난 절대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언제 이상한 질문을 던질지 모르니까.

"그러고보니 엘리스는 어때? 사귈 마음은 없어? 호연이 정도면 나도 찬성이야."

아이린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왔구나.'

이건 덫이다.

걸리는 순간 바로 나에 대한 아이린의 호감도는 0으로 고정이다.

물론 나는 완벽한 대답을 이미 생각해놨다.

"엘리스랑은 그냥 친구예요."

"마사지를 하다 보면 몸을 만질 기회도 있을 텐데, 정말 마음이 없어?"

"그쪽은 프로의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어서요. 돈도 많이 받는데 그럴 순 없죠."

"그렇게 예쁜 몸을 보고도 흥분하지 않다니 너 정상이 아니구나. 약간 기분 나빠."

"…."

어쩌란 거야 미친 년이.

그렇다고 네 여동생 개꼴린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래도 기분 나쁜 놈이 낫지.'

엘리스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연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장난은 여기까지하고, 일로 돌아올게. 켄타우로스를 보려는 목적은 뭐야?"

"개인적인 연구입니다. 길드장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아이린은 방긋방긋 웃으며 질문했고, 난 침착하게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마법사들이 괴상한 연구를 하는 건 유명한 사실이니까.

"그치만, 그건 못 믿겠는걸."

"… 네?"

"길드장님은 널 받아주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널 어떻게 믿고 받아들여?"

"이미 길드장 님한테 허락을 받았는데요?"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막을 순 있어. 아빠는 나랑 엘리스를 사랑하거든."

"…."

- 뭐 이딴 여자가 다 있어! 이호연! 죽여버려!

릴리아나는 화를 냈고, 아이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진짜 쉽지 않은 여자네.

엘리스가 얼굴 믿고 까부는 걸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언니한테 배운 게 분명하다.

저렇게 말해도 별로 밉지가 않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운데도 예뻐서 화가 덜 난다.

"하아, 원하시는 게 뭔데요."

어차피 내 목적이 궁금한 건 아닐 거다.

아이리스 길드에서 내 뒷조사를 안 했을 리가 없지.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처음부터 관계를 끊었을 터.

내가 아이리스 길드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뒤는 깨끗하다는 뜻인데, 저렇게 나온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거다.

"나한테 협조해. 너한테도 좋은 얘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린의 말에 집중했다.

"엘리스는 분명 이번 기회에 실전을 치르려고 할 거야. 마침 너랑 같이 체험을 하러 온 입장이니 분명 그렇게 말하겠지."

"…."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는 엘리스 때문에라도 대충 끼워주는 척만 할 거야. 켄타우로스 추적조는 굉장히 위험하거든."

"… 네."

그런가?

나는 아이린의 말을 들으며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아이린이 생각하지 못하는 게 있다.

사실 내 목적은 켄타우로스의 마법을 보는 것 자체.

아무리 추적을 대충 해도 켄타우로스 얼굴은 보여주겠지.

그 순간부터는 나랑 릴리아나 둘이 추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를 제대로 된 추적팀에 넣어주는 대신 들어줘야 할 게 있어."

"네. 얘기해주세요."

하지만 대화를 끊지는 않았다.

아이린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 지 알고싶었다.

"엘리스는 무조건, 추적조에서 빠져야 해. 절대 데려갈 수 없어. 네가 엘리스를 설득해."

"아."

왜 이렇게 열심히 말하나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엘리스를 조금이라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구나.

참 대단한 우애 납셨네.

"너무 과보호 아니에요? 길드장님도 그렇고 아이린 님도 그렇고… 엘리스도 경험을 쌓아야죠. 게다가 엘리스가 위험에 빠질 상황도 별로 없을 텐데요."

"으응? 아니 안 돼. 엘리스는 나중에 길드를 물려받을 거니까,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안 돼. 실무는 내가 다 처리할 거야. 엘리스는 그냥 행복하게 일생을 보내게 만들 거야."

"…."

- 이 여자 눈이 무서워. 이호연. 나 빨리 도망가고 싶어….

릴리아나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나도 무서웠거든.

마치 중세시대에 사랑하는 여자를 성에 가둬놓고 바라보기만 하는 미친 귀족 같다.

직접 만난 아이린은 확실히 기묘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켄타우로스. 보고 싶잖아."

"그렇긴 한데요…."

릴리아나의 일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켄타우로스를 보긴 봐야한다.

문제는 엘리스한테도 경험을 쌓게 해 주겠다고 떵떵거리며 소리쳐놨다는 거다.

물론 아이린의 말을 무시하고 하던 대로 해도 된다.

엘리스도 첫 실전을 치뤄서 좋고, 나도 켄타우로스를 봐서 좋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이린이 날 좋게 보지 않겠지.

이 제안을 들은 순간 나는 아이린의 편이 되든가, 적이 되어야한다.

'적대하기도 싫은데.'

아이린은 엄청나게 강해서 지금의 내가 덤비기엔 애매하다.

게다가 아이리스 길드의 중역이자 엘리스의 친언니인 아이린과 굳이 대립을 하기도 싫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언니…!"

"어머, 오랜만이야. 엘리스."

응접실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엘리스가 들어왔다.

통화가 이제야 끝난 걸까.

엘리스는 내 옆에 서서 아이린을 노려봤다.

기분나쁜 표정의 엘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 손님을 데려가면 어떡해."

"무슨 소리야 엘리스. 호연이는 아이리스 길드의 손님인데."

"…."

"그나저나 호연이, 엄청 멋있더라. 마음에 들어."

"… 그래서 어쩌라고."

"왜 그렇게 얼굴이 굳었어. 오랜만에 보는 언니인데. 아무튼, 다음에 보자 호연아. 나머지 길드 안내는 부탁할게. 엘리스?"

아이린은 나한테 인사를 한 뒤 엘리스의 어깨를 톡톡 치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 후우."

유리로 바깥을 보자 세바스 찬과 스칼렛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엘리스한테 잔소리라도 들은 걸까.

떠나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보며 심호흡을 하던 엘리스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휙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너, 언니랑 무슨 얘기 했어."

"아무 얘기도 안 했어. 그냥 켄타우로스에 대한 얘기 정도? 널 많이 걱정하시더라."

"내가 말했지. 절대 저 외모에 빠지면 안 돼. 알겠어? 저렇게 웃는 거 다 여우라니까. 절대. 절대 안 돼!"

"안 빠져."

"거짓말. 벌써 눈이 갔어. 반한 거지."

엘리스는 싸늘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 진짜 아니야. 애초에 너희 언니랑은 오늘 처음 봤는데 어떻게 반해."

"너만큼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언니는 건드리면 안 돼."

엘리스도 참 힘드네.

평소에 자존심이 강한 엘리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언니에 대한 열등감이 눈에 보일 정도.

그래도 주눅들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차분하게 엘리스를 진정시켰다.

"나라고 예쁜 여자만 보면 눈 돌아가는 게 아니야. 너도 예쁜데 가만히 있잖아."

"… 나보다 언니가 더 예쁘잖아. 성격도 더 좋고."

"성격 나쁜 걸 알긴 아는구나.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외모는 최고야. 성격은 몰라도."

"…."

엘리스는 내 말에 입술을 깨물고 우물쭈물하다가 눈을 피하고 뒤로 돌았다.

"… 따라와. 오늘 길드장님은 못 온대. 숙소로 데려가 줄게."

- 쟤 귀 빨개졌다. 창피한가 봐.

역시 칭찬은 언제나 효과가 좋구나.

난 귀가 붉어진 채 걸어가는 엘리스의 뒤를 따라갔다.

*

배정받은 숙소는 꽤 넓었다.

예전에 살던 아카데미의 기숙사와 비슷한 크기.

즉 릴리아나가 나오기 최적화된 장소였다.

나는 룬의 결계를 치고 주변이 안전한지 확인한 후에 목걸이를 두드렸다.

퍼엉-

연기와 함께 튀어나온 릴리아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하아, 하아악… 더워. 그 여자는 왜 바로 앞에 있는 숙소를 못 찾는 거야?"

"고생했다. 혹시 더웠어? 말도 못했을 텐데 답답했겠다."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목걸이가 온도를 느낄 리가 없지."

덜컹-

릴리아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흰 반팔티에 숏팬츠라는 캐쥬얼한 복장이었는데, 저럴 거면 그냥 츄리닝을 입고 오지.

물론 피곤했으니 이해는 한다.

나도 침대에 걸터앉으며 릴리아나의 탱탱한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 있는 여자가 있다는 건 행복하구나.

"이따 나가서 맛있는 거나 사 먹자."

"헉. 좋아. 나는 빵이 먹고 싶은데."

"그래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먹는 거로."

애들 선물 거리도 좀 생각할 겸, 구경이라도 가야지.

외국은 처음이라 나도 설렌다.

"아, 생각해보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네. 좀 찾아보고 나가자."

"내가 찾아볼게!"

전세기를 이용해 앞마당에 바로 착륙했으니, 주변 지리를 모른다.

릴리아나는 스마트 워치를 두들기며 파리의 빵집을 타령하고 있었는데, 여기가 파리는 맞을까.

똑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익숙한 마력반응.

이건 스칼렛의 마력이었다.

"들어와!"

내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스칼렛이었다.

스칼렛은 아까 그 프로페셔널한 오피스 걸의 복장을 한 상태였다.

"호연님. 저희의 환영은 재밌게 즐기셨는지요."

"그래. 덕분에 잘 놀았다. 원래 아이리스 길드는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게 규칙이야?"

"글쎄요. 저도 호연 님이 좋아할 만한 외모라서 안내역에 뽑힌 거라서요. 안내역은 처음이었습니다."

"… 아이작 씨가 고른 거야?"

"네."

"괜찮은 선택이다. 야."

그 아저씨 보는 눈이 있네.

바람둥이라서 예쁜 여자도 잘 알아.

"그나저나 잘 왔어 스칼렛. 너도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릴리아나랑 맛있는 곳 가려고 했는데, 추천 좀 해줘."

"스카웃! 난 빵집이 좋아. 바게트가 먹고 싶어!"

"제가 프랑스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프랑스에도 풀코스가 있냐?"

학교 후배가 고향에 오면 풀코스로 쏘겠다길래 3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내려갔더니 '이제 뭐 하고 놀까요?'라는 말을 들은 후로 저런 말을 싫어하지만, 스칼렛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풀코스는 역시 유흥이야! 서큐버스의 유흥 능력을 보여줄게!"

"닥쳐. 릴리아나. 너 잡히면 해부라니까."

"유흥은 힘들지만, 식사는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좋다 좋아. 역시 토박이가 있어야지."

오늘 풀코스로 즐길 수 있겠구나.

"아, 근데 갑자기 바게트 먹기 싫어졌엉. 여기 치킨은 없어? 명색에 프랑스인데 바게트 치킨 같은 건?!"

"릴리아나. 차라리 바게트로 하자. 좀."

몇 십분이나 메뉴에 대해 토론하던 나와 릴리아나는, 결국 스칼렛이 추천하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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