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4 304화. 아이리스 길드로 (2)
- 오랜만에 여기 있으니까 느낌 되게 이상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아침.
나는 엘리스의 집 앞에서 엘리스를 기다렸다.
목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실버 체인 목걸이가 걸려있었는데, 지옥의 마법으로 목걸이로 변한 릴리아나였다.
지옥의 마법을 사용해, 주변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와 소통하고 있었다.
- 우리 비행기 타는 거야? 나 처음 봐.
"주인 있는 비행기니까 가만히 있어야해. 너는 서큐버스니까 잡히면 바로 해부당할걸."
-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누굴 바보로 알아.
물론 릴리아나의 변신 마법은 수준이 높아서 나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
아마 까불지만 않으면 들킬 걱정은 없겠지.
- 어제 다희가 프랑스의 바게트가 먹고 싶대. 집 앞 빵집이랑 맛을 비교해보겠다는데.
"그래? 기억해놔야겠네."
남다은과 남다희는 같이 아카데미로 향했다.
철혈 길드에서는 아카데미에서 모인다고 한다.
다행히 철혈 길드의 체험은 하루하루 끝날때마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남다희를 혼자 둘 위험은 없었다.
사실 남다희가 아니더라도 나없이 남다은과 남다희만 내버려두는게 불안하긴 하지만, 사실 남다은도 나만큼 강해졌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난 별 생각 없이 훈련 좀 하라고 말했을 뿐인데, 알고 보니 집에 있는 시간 빼고 모두 훈련장에 쓴다고 한다.
대체 내 말을 왜 그리 잘 듣는 거야?
- 그래서 어제 다은이랑 다희가….
"잠시만. 열렸다."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기다리는 엘리스가 보였다.
바로 옆 집이지만 뭔가 더 좋아 보인단 말이야.
이게 정원 관리의 힘인가? 할 거 없다는 릴리아나한테 정원 관리나 맡겨볼까.
"왔네?"
엘리스는 마당 한 가운데에서 스마트워치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고,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 몸은 좀 괜찮아?"
"… 몸? 아, 응. 상태가 좋아. 확실히 점점 좋아지는 게 느껴져."
내가 마력에 익숙해지고 강해질 때마다 마나 마사지의 효과도 엄청나게 늘어난다.
사실 처음에는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어쩌면 금방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시기가 너무 빠른 것도 안좋으니 적당히 조절하겠지만.
"이제 왔어. 늦었네."
"뭐가?"
우두두두-
엘리스의 말에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엘리스의 주변에 큰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 소형 비행기 한 대가 마당에 착륙하고 있었다.
영화 같은 걸 보면 흙이 막 흩날리던데, 비행기에 마력 처리가 되어있어서 깔끔히 착륙했다.
보통 생각하는 전세기보다는 작았고, 오히려 전투기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어차피 마법으로 이동하는 시스템일 테니 외관은 큰 상관없겠지.
"타."
엘리스는 머리를 넘기며 익숙하게 비행기의 손잡이를 잡고 올라탔다.
"… 멋있네."
- 그러게. 멋있어. 그리고 엄청 빠를 것 같아.
"비행기말고 엘리스 말한 거야."
나도 엘리스를 따라 비행기에 탔다.
내부는 그렇게 넓지 않았지만 좁지도 않은, 적당히 쾌적한 크기였다.
게다가 시트가 우리 집 침대보다 푹신하다.
얼마나 비싼 거야 이거.
"… 비행기 엄청 좋네."
"그래?"
"응. 난 처음 타보거든."
"흐음."
엘리스는 스마트 워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숨기려 했지만,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내 눈에 확실히 잡혔다.
"세바스 찬. 출발해줘. 아, 여기는 내 비서야."
"처음 뵙겠습니다. 이호연 생도님. 세바스 찬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이 노인네는 예전에 날 미행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저렇게 말해오는 걸 보면 역시 프로라고 해야겠지.
저런 뻔뻔한 자세를 나도 배워야할텐데. 난 너무 착해서 힘들다.
우웅-
- 오, 오? 난다. 날아!
곧 공중에 뜬 비행기는 흔들림 없이 비행을 시작했다.
*
"도착했습니다. 편한 여행 되시길."
"고마워."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이리스 길드의 빈 부지에 내렸는데, 바로 옆에 길드의 본 건물이 떡하니 서 있었다.
정보 길드 주제에 이렇게 대놓고 영업을 한다는 점에서 길드장인 아이작의 역량을 알 수 있다.
- 뭐야. 이게 끝이야? 엄청 작네?
난 머릿속에 울리는 릴리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면을 쳐다봤다.
확실히, 건물은 겨우 5층이었다.
물론 화려한 외관과 깔끔하고 세련된 장식은 멋있었지만, 프랑스의 대표 길드라기엔 이펙트가 부족했다.
보통은 더 휘황찬란한 걸 생각한단 말이지.
"따라와. 안쪽으로 가자."
"응. 근데 이게 본건물이야?"
"맞아."
"생각보다 작네? 길드원들이 엄청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고 나서야, 혹시 내가 모르는 엄청난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거부반응 없이 대답해줬다.
"아. 진짜는 지하에 있거든. 위로 올라온 건 그냥 눈속임이야."
"지하? 왜 지하에 지은 거야?"
"그편이 공격을 막기에 더 편하니까."
"…."
역시 무서운 세상이구나.
나는 엘리스의 뒤를 따라 건물에 다가갔다.
건물 곳곳에는 가드가 서 있었는데, 정문에 서 있는 가드는 엘리스를 보자마자 정자세를 취하더니 경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편히 쉬셨습니까! 이봐! 여기 엘리스 아가씨 들어간다!"
"응. 오랜만이네."
과연 아이리스 길드의 후계자다운 환영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엘리스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건넸는데, 엘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줬다.
1층 로비를 지나서 사람이 조금 적어졌을 때, 슬쩍 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뭐 하면 돼?"
다른 사람이라면 헌터들과 만나서 어떤 체험을 할지 설명이라도 들을 텐데,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니까.
빨리 켄타우로스나 만나고 싶다. 할 일이 한 두개가 아니야.
"뭐하긴. 따라와."
"어디로?"
"5층. 길드장님 보러 가야 해."
"… 역시 그렇겠지?"
그 사람은 좀 무서운데.
"아. 엘리스 아가씨. 길드장님은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그때 우리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세바스 찬이 입을 열었다.
"… 뭐? 내가 왔는데 외출이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으실 겁니다. 그동안 이호연 생도님과 길드라도 둘러보시지요."
"이상하네. 내가 분명 오늘 온다고 말했는데."
엘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아버지인 아이작이 자신이 왔는데 없는 게 심경이 불편한 모양이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엘리스의 스마트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스마트워치를 바라본 엘리스는 슬쩍 날 보며 말했다.
"…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
"어어. 편하게 갔다 와."
또각또각-
엘리스가 어딘가로 사라진 후, 다시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 후아, 이제야 갔네.
"… 왜 조용히 있었어? 말은 해도 되는데."
- 그럼 네가 대답을 못 하잖아!
나는 뒤에 서 있는 세바스 찬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엘리스가 갔는데 저 아저씨는 왜 안 가는 거야.
"이호연 생도님."
"네?"
그때, 내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세바스 찬이 말을 걸어왔다.
"엘리스 아가씨가 안 계신 동안 길드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 그냥 기다릴게요. 금방 올 텐데."
길드 안내는 고맙긴한데, 굳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엘리스랑 돌아다녀도 충분할테고.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 길드 안내원이 있습니다. 스칼렛?"
"아니, 사양이 아니라…?"
나는 의미불명의 길드 안내를 밀어붙이는 세바스 찬의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거절하려다가,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입을 다물었다.
- 스칼렛? 방금 스칼렛이라고 한 거 아니야?
또각- 또각-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림과 동시에 로비에서 한 여성이 걸어왔다.
와이셔츠에 미니스커트와 검은 스타킹.
안경을 써서 지적인 이미지가 돋보였다.
연한 립글로스와 세련되고 기품있는 귀걸이.
완벽한 오피스 미녀의 모습이었다.
사람은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이런 걸까.
아이리스 길드에서 만난 스칼렛은 평소와 이미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진짜 프로 중의 프로 같은 느낌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리스 길드의 스칼렛입니다. 오늘 이호연 생도님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 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안내.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 뭐야? 스카웃이 왜 이렇게 예뻐졌어?
'그러게 말이다.'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대답을 입술을 깨물면서 막았다.
그래도 스칼렛이 저렇게 말해오는 걸 보면, 내게 해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엘리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니 따라가볼까.
*
그 시각 1층 로비의 구석.
"아빠, 무슨 일이야?"
엘리스는 로비에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이작.
아이리스 길드의 길드장이자 자신의 아버지다.
이 사람은 바쁘다고 해놓고 왜 따로 연락을 하는 걸까.
엘리스는 의문을 가지며 아이작의 전화를 받았다.
- 우리 딸. 미안하다. 아빠가 지금 조금….
챙- 콰가가각-
빠드득-
크에에엑-
- 바빠서! 우리 딸 얼굴도 바로 못 봤어. 사실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네.
"… 괜찮아. 바쁜 거 아니까. 근데 왜 전화한 거야?"
엘리스는 전화 너머로 들리는 격렬한 전투 소리를 들으며 화를 가라앉혔다.
급박한 목소리만 들어도 바빠 보였기 때문에 차마 뭐라고 할 순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고.
- 오늘 이호연이랑 같이 왔잖니? 이번에 아이리스 길드에 계약시키는 게 어떨까 해서.
"어? …왜?"
- 왜냐니? 그 친구 정도면 아이리스 길드에 딱 맞는 인재지. 같이 지냈던 너라면 그놈이 괴물인 걸 눈치챌 줄 알았는데.
"알긴 한데…."
이호연이 괴물인 건 확실하다.
아직 생도의 신분이라 한국에서만 유명하지만, 졸업만 한다면 세계를 아우르겠지.
"그게 그렇게 쉽게 계약이 되지 않을거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다 거절당했어."
- 걱정말거라. 지금 스칼렛과 세바스 찬을 붙여서 아이리스 길드가 얼마나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을 거란다."
"지금?"
- 그래…! 아니, 이 미친 괴물 새끼가… 후우, 미안하다. 일이 대충 끝나면 연락하마. 아마 내일쯤 갈 수 있을 것 같다."
"… 알았어."
- 그때 이호연과도 만날 테니까 잘 전해주고, 사랑한다. 내 딸 엘리스."
뚝-
엘리스는 통화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에도 결국 말하지 못했다.
켄타우로스 작전에 함께하고 싶다는 말.
어릴 적부터 과보호를 당한 탓일까, 이런 상황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솔직히 첫 실전이 약간은 두렵기도 하고.
엘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말한 길드 안내.
어릴 때부터 그 멍청한 짓을 본 엘리스는 이호연이 겪고 있을 상황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빨리 가서 구경하자.'
쉽게 볼 수 없는 재밌는 광경이다.
심성이 착한 이호연은 거절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다 지켜보겠지.
엘리스는 모두가 있던 곳으로 총총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