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념회 당일에도 문수린의 손은 쉬는 법이 없었다.
아래 사람들을 시켜도 될 텐데, 웬만한 사안은 모두 자신이 직접 처리하려고 하는 문수린의 강박증 때문에 생긴 상황이다.
문수린은 서류를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으며 도장을 찍었다.
"확인했고, 그다음은 보안업체에서…."
"회장님!"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던 문수린은 옆에 있던 서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회장님. 이호연 생도가 보러 왔어요."
"응? 호연이가?"
문수린은 그제야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몇 시간 전에 와있던 메시지에는 이호연이 학생회에 놀러온다는 내용이 써있었다.
겨우 메시지 한 줄로 지금까지 일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옆에는 수십장의 서류들이 쌓여있었다.
이걸 처리하려면 적어도 1시간 이상은 필요했다.
문수린은 서류를 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다녀오세요."
그때 서기가 서류를 번쩍 들었다.
"… 응?"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너희들…."
학생회 임원들은 각자 자기 몫의 서류를 챙겨가기 시작했고, 책상에는 어느새 서류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렇게 일하시면 큰일 나요. 하루 정도는 놀다 오세요."
서기의 말에 다른 학생회 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문수린의 행실 덕에 이들도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도와주고 싶었다.
"… 응. 고마워."
활짝 웃은 문수린은 재빨리 자신의 옷 상태를 살피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남은 학생회 임원들도 화기애애하게 웃기 시작했다.
"회장님은 너무 꼼꼼해."
"서류도 우리가 몇 번이나 확인한 건데, 성실하게 하나하나 꼼꼼히 보시잖아."
"근데 있잖아. 요즘 회장님 진짜 귀엽지 않아?"
"맞아… 오늘도 사복 입고 오셔서 깜짝 놀랐지 뭐야. 역시 호연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
꺄르르-
학생회 임원들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고, 동시에 서류를 넘기면서 도장을 찍었다.
그들이 몇 번이나 검토한 사안이기에 이번에는 대충 넘겨가며 확인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와 10년 넘게 일한 보안업체의 인원 추가 문제도 그렇게 별 일 아닌듯 넘어갔다.
'힘드네….'
예상은 했지만, 오늘 만난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루시루미 쌍둥이부터 릴리아나와 남다은 자매에 교수 두 명까지.
몸을 저렇게 혹사시켰으니 피곤할 수 밖에.
그래도 이제는 학생회에 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엘리스는 안 왔나?'
하긴 이런 곳에 참여할 성격은 아니긴 하지.
원작에서도 엘리스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했다.
일 때문에 억지로 돌아다녔을 뿐이다.
딸깍-
"아직도 답장이 없네?"
스마트 워치를 열어봤지만 문수린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엄청 바쁜가보네.
하지만 답장을 기다리고 갈 순 없다. 나도 바쁜 몸이라고.
파티장을 가로질러 학생회로 가는 길에는 여러 생도들이 놀고 있었다.
조용히 식사하는 생도도 있었고, 술 먹고 노래하며 주변의 이목을 끄는 관종들도 있었다.
'힘도 넘쳐. 아주.'
- 흐흐. 오늘은 내가 쏜다!
- 어차피 무료 아니야?
나는 시끌시끌한 파티장을 지나 학생회에 도착했다.
학생회 생도들은 천막 주변에서 편하게 쉬고 있었는데, 문수린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서기 선배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음?! 후배님, 웬일이야?"
"인사드리려고 왔죠. 고생하실까 봐."
다들 노는 걸 보니 역시 당일에는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축제나 운동회 같은 걸 할 때도 사고가 터지지 않는 이상 관리부는 조용한 법이다.
"잘 왔어. 잘 왔어. 앉아서 과일 좀 먹을래?"
"감사합니다. 근데 회장님은 어디 계세요?"
"회장님은 서류 작업하는 중이야. 우리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굳이 눈으로 확인하셔야겠다 하셔서."
"아… 메시지도 보냈는데 답장을 안 하시더라고요."
근데 왜 수린 누나만 일하고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학생회의 구조가 비정상적이다.
한 명의 능력에 집단이 좌우되는 건 좋지 않다.
이러다가 수린 누나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일은 누가해.
"아하, 저 바깥에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한 번 회장님한테 말해볼게."
서기 선배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학생회실로 들어갔고, 나는 학생회를 빠져나와 벤치에 앉았다.
사실 친한 선배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계속 있기 좀 어색했거든.
'근데 메시지도 못 볼 정도로 일이 많은데 기다려서 되는 건가?'
어떻게든 되겠지.
안 나오면 그때 생각하면 된다.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곧 학생회 천막이 걷히고 익숙한 우리 학생회장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식 행사인 만큼 단정하게 생도복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문수린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저번에도 한 번 봤던 옷인데, 배꼽이 보이는 흰색 크롭티에 청바지였다.
모범생 문수린의 이미지와 맞지 않게 몸 선이 드러나는 옷차림이다.
그때 습격을 당하면서 찢어진 걸 봤는데, 수선이라도 한 걸까.
다른 히로인들처럼 여러 옷을 입진 않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이제 막 꾸미는 걸 배워가는 사람 같아서 더 귀여웠다.
생도복이 평소 모드라면 이건 필살기 느낌이다.
"호연아, 많이 기다렸어?"
내게 다가오는 문수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에요. 누나 엄청 바쁘시네요. 일 많은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으으응. 괜찮아. 다 끝냈어."
문수린은 엄청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8 ]
- [ 성욕 : 35 ]
- [ 식욕 : 85 ]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다행이다. 덕분에 호연이랑 놀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도와준 건가?'
지금까지 메세지 답장이 없었던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수린 누나의 호감도가 꽤 높긴 하지만, 맡은 일을 덮어놓고 날 만나러 올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해도 되겠지.
"누나, 옷 엄청 예뻐요."
문수린은 내 말에 싱긋 웃었다.
"근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아니면 그냥 누나랑 놀려고?"
그리고 몸을 숙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놀아달라고 달라붙는 강아지 같아서, 나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 누나가 꽤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네. 저 좀 놀아주세요."
*
나와 문수린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갈까요. 아, 누나 밥 먹었어요?"
"으음… 아니."
"역시 그럴줄 알았어요."
밥을 먹었으면 답장은 했겠지.
분명 일에 빠져서 밥도 까먹었을 거다.
"일단 밥 먹고 뭘 하든지 해요."
"응. 챙겨줘서 고마워."
문수린은 기쁜 듯 내 옆에 붙어왔다.
- 안녕하세요! 회장님!
"안녕? 재밌게 놀고 있어?"
역시 학생회장은 인싸여야 하는 걸까.
문수린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 세례를 받으며 걸어갔다.
오전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교수님들도 꽤 많이 보였는데, 인사 세례는 교수님들도 빠지지 않았다.
"어머, 수린 생도랑 호연 생도네요."
"이야,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인재들. 아주 잘 어울려요."
손에 술잔을 들고 있는 교수들이 우리를 보고 아는 척을 해왔는데, 지금까지 잘 받아주던 문수린이 갑자기 몸을 멈췄다.
"네, 네? 가, 가, 감. 감사…."
"감사합니다. 교수님."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기 시작한 문수린 대신 대답하고, 빨리 자리를 피했다.
더 있다간 이 누나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우리는 대충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뷔페 형식으로 되어있는 파티장에서 음식을 가져오고,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나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아서 대충 먹는 시늉만 했다.
집중해야할 것은 대화다.
문수린 공략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니까.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주제를 툭툭 던져보면서 느낀 게 있다.
일단 스토킹 사건으로 공략하기는… 솔직히 말해서 망했다.
누나가 너무 밝아졌다.
초반에 과로로 쓰러질 것 같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범인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건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공략에 필요한 중요한 열쇠가 없어졌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8 ]
- [ 성욕 : 45 ]
- [ 식욕 : 50 ]
- [ 피로도 : 60 ]
현재 상태 : 슬슬 어두워지면 노래가 나올 텐데….
문수린의 호감도는 88까지 올라왔지만, 아무리 공략이 쉬운 누나라고 해도 이벤트는 있어야 한다.
일단 사귄 후에 천천히 호감도를 높이며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내게는 없으니까.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그냥 예뻐서 쳐다봤어요."
"무, 무슨… 호연이 너, 장난치면 혼난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참 귀엽긴 한데 말이야.
'이사장하고 접촉해야 하나.'
문수린의 이벤트도 스토커 사건 하나가 끝은 아니다.
아직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벤트가 남아있다.
아내의 복수를 위해 마인이 된 문수린의 아버지에 대한 스토리.
문제는 아무 배경없이 이사장과 만나서 저 얘기를 꺼낼 수 없다는 거다.
'원작에서 문수린의 아버지가 나오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리는데.'
복잡하네 진짜.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끊어냈다.
앞에서 수린 누나가 눈을 깜박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해가 떨어지려고 하네요."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응. 그러게. 슬슬 음악이 나올 거야."
"음악이요…."
문수린은 내게 은은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문수린이 나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히로인들 때문에 선택을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일단 주변에 히로인들이 없다.
그리고 오전에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엘리스를 제외하곤 모두와 시간을 보냈다.
"어?"
노리기라도 한 듯, 이런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몇몇 생도들은 기다렸다는 듯 중앙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수린을 바라봤다.
우리 수린 누나는 여전히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웃겨서 나는 실소를 지었다.
뭐, 혹시 삐지면 또 열심히 풀어줘야지.
"춤, 출까요?"
"응. 응?"
"저랑 파트너 해요. 사실 자신은 없는데, 천천히 해볼게요."
방구석에서 게임만 했는데 어떻게 춤을 춰.
내게 춤은 어릴 적에 할머니 앞에서 춰봤던 개다리춤이 끝이다.
그래도 천천히 하면 되겠지.
"그, 그래. 응! 나만 따라 하면 돼!"
문수린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엄청나게 기뻐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근데 이거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테러의 기미가 안 보인다.
이제 슬슬 터지지 않을까?
띠링- 띠링-
내 생각과 동시에, 문수린의 스마트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 호연아. 잠시만. 네. 학생회장입니다. 네. 네…?"
벌떡-
문수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긋 웃고 있던 얼굴은 긴장한 표정으로 바뀌고, 거세게 떨리는 눈동자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대충 예상하게 해줬다.
"보안 요원 중에 마인이…."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쥔 문수린은 그대로 뛰쳐나가다가, 뒤돌아서 내게 말했다.
"호, 호연아. 미안해. 지금 갑작스럽게 습격이 일어나서… 그, 일단 대피해. 알겠지? 정말 미안해. 나중에 꼭 다시 놀자."
문수린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상황 파악은 빨랐다. 강한 전투 요원이자 현장 지휘가 가능한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갈 생각이다.
"누나.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니, 아니야. 대피해. 무조건 대피해."
문수린은 대피하라는 말만 남긴 채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외곽지역을 향해 달려 나갔다.
"…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내 안전을 위해서 저러는 거겠지만, 어차피 문수린이 죽으면 나도 끝이다.
뚝-
그때 음악이 끊기고, 마이크의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 기념회에 참석한 전 인원에게 알립니다. 마인의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테러 대비 행동요령에 따라 즉시 파티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알립니다. 마인의 테러가….
갑자기 꺼진 음악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대피 경보에 생도들은 혼란에 빠졌고,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로 따라가자.'
나중에 혼나더라도 따라가서 도와줘야 한다.
나도 전투인력으로는 꽤 강하니까.
두근-
하지만 그때,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익숙한 떨림.
전투 감각의 신호였다.
어디선가 내게 진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아…."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아니, 어떻게?
방금 테러가 시작되었으니 아직 이 안쪽까지 마인이 들어올 방법은 없을 텐데.
그리고 들어왔다고 해도, 왜 하필 나야?
- 도망가!
- 뒤에는 마인들이 보안 요원과 싸우고 있어!
도망치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그 중에 나라고?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며, 나는 진해진 마인의 마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 너였냐."
마인이 되더라도 인간일 때의 마력이 조금은 남아있다.
사람의 마력에는 '패턴'이 있으니까.
마인이 되더라도 익숙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건 내가 아는 방식이었다.
쿵!
"꺄, 꺄아악-!"
"마인이야! 도망쳐!"
나와 가까이 오자마자 마력을 개방한 마인.
학생회 부회장 신동민이었다.
날 사사건건 방해하다가 마인과 접촉한 쓰레기.
마인과 접촉한 증거를 찾아낸 수린 누나의 도움으로 사회에서 매장했었다.
대체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아예 마인화한 모양이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엑스트라들을 교육한다고해서 다음부터 아예 안 보이는 게 아니다. 그냥 묘사되지 않을 뿐이다.
초반에 나와 엮였던 엑스트라들은 내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걸 보고는 이제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차피 엑스트라니까 나도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은 계속 나를 귀찮게했다.
지금도 눈앞의 마인에게 느껴지는 기세는 최소 S급 이상이었다.
"…."
그래봤자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일 뿐.
주인공과는 태생부터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찾았다. 이호연…."
섬뜩한 목소리로 마력을 풍기는 신동민을 보며 나는 눈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엑스트라면 엑스트라답게 해라…."
빨리 수린 누나를 지원하러 가야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