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우...."
피곤하다 피곤해.
어젯밤 남다은과 관계를 끝낸 후 릴리아나가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상대해주느라 혼났다.
그러다가 남다희가 돌아오며 잠잠해지나 싶더니, 밤에 침대로 숨어들어왔다.
결국 밤 늦게까지 릴리아나와 몸을 섞었다.
"으응...."
"쯧."
내 옆에서 몸을 꿈틀거리는 릴리아나의 엉덩이를 주물주물 만졌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침대 위로 비추는 기분나쁜 아침햇살을 커텐으로 가리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금요일.
아카데미에 복귀하는 날이다.
귀찮지만 할 일은 해야지.
거실로 나오자 먼저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일어났구나."
"응. 너도?"
언제 일어났는지, 남다은은 이미 생도복까지 갖춰 입고 탁자에 앉아있었다.
"같이 가려고 기다린 거야?"
"그것도 있고. 나는 혼자 못 나가."
"어? 아. 스칼렛이 없구나.'
무슨 말인가 했는데 곧 이해했다.
원래는 스칼렛이 데려다줬겠지. 여긴 남자기숙사니까.
남다은이 남다희를 챙기는 동안 나는 바로 세안을 시작했다.
"하으음, 오늘은 오빠랑 나가?"
남다희는 하품을 하며 남다은과 준비를 시작했다.
"응. 그럴 거야."
몰려오는 졸음에 얼굴을 찌푸린 남다희는 남다은이 챙겨주는 옷을 입고 내 뒤를 따랐다.
"언니, 우리 문으로 나가도 괜찮아?"
"괜찮을걸?"
"... 설마 지금까지 창문으로 나간 거야?"
"응!"
"...."
스칼렛 얘는 대체 창문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어느 정도 기숙사를 벗어난 뒤, 남다은은 남다희를 데려다주기 위해 부설 학교로 빠졌다.
"아카데미에서 보자."
"알았어."
"빠이빠이 오빠!"
"바이바이."
남다은 자매를 보내고 아카데미로 걸어갔다.
룬의 결계는 더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연예인 처음 보나.'
장난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니까 연예인 병이 자동으로 생길 정도다.
하지만 적당한 관심은 필요하다.
유명한 남자가 여자의 호감을 사기 쉽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유명세는 많을 수록 좋다.
어차피 계속 룬의 결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이호연~."
그때 누군가 내 뒤로 다가왔다.
익숙한 귀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내게 달려오는 루시와 뒤따라오는 루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호연! 같이 가~."
"안녕하세요. 호연 씨."
쌍둥이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카데미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그러게."
이렇게 같이 등교하는 게 얼마 만인지.
오랜만이라 어색한 등굣길을 셋이 같이 걸으니 좀 편한 기분이었다.
루시와 루미는 내 양옆에 서서 걸었다.
"몸은 괜찮아? 걸어도 돼?"
"당연히 괜찮지."
"마법도 다 쓸 수 있으세요?"
"응. 오히려 더 좋아졌을걸?"
잡담을 하며 걷다 보니 내 양옆에 있는 루시와 루미의 어색한 팔을 발견했다.
원래는 나랑 살짝 거리를 두고 걸었는데 딱 붙어있는 것도 그렇고, 계속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움찔거리는 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루미]
- [ 호감도 : 99 ] (+ 0.5)
- [ 성욕 : 85 ]
- [ 식욕 : 25 ]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팔짱… 끼어도 될까? 아니, 아닌 것 같아….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99 ] (+ 0.1)
- [ 성욕 : 85 ]
- [ 식욕 : 35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손이라도 잡아야 하나? 안돼. 아직 그 정도는… 아니, 할 거 다 했는데 손 정도야….
'고민하는 거구나.'
팔짱인지 손인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나랑 연인인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이제 사귀는 사이니까.
귀엽네.
사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좀 그렇긴하지만... 뭐, 나중에 친구끼리 반가워서 했다고 하면 되겠지.
나는 고민하는 둘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팔짱 낄래?"
"네, 네?"
"어, 어…."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루시와 루미는 똑같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계속 팔 움찔거리던데,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루미. 할래?"
"나, 나는 못 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 그럼 나도 안 할래."
루미는 붉어진 볼로 내 눈을 피하다가 살짝살짝 나를 흘렸고, 루시는 아예 나보다 걷는 속도를 높였다.
음, 멍석을 깔아주면 잘 못 하는 타입들이야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살짝 열어놓은 팔을 다시 닫았다.
*
"그다음은 어떻게 계산하면 되는지 생각해보자고. 먼저 마력 감도를 파악해야 해."
"흠…."
오랜만의 이론 수업이지만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필기를 하는 척하며 앞으로 할 일을 생각했다.
아카데미에도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히로인들을 공략할 시간이다.
'일단 루시랑 루미는 거의 끝났어.'
둘 다 호감도가 99까지 올라왔다.
큰 사건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뭔지 대충 짐작은 간다.
쌍둥이와 같이 사귀는거니까, 언젠간 해야지.
'다음은 엘리스랑 수린 누나. 그리고 임솔 교수님.'
엘리스는 곧 마사지를 시작할 거니까 괜찮다치고.
문제는 수린 누나와 임솔 교수님이다.
'문수린 공략의 열쇠인 스토커 사건이 사라져 버렸어.'
원래 부회장 신동민이 문수린의 스토커가 되며 정신적으로 몰린 문수린을 구해주는 스토리인데, 신동민이 그 전에 폭사해버렸다.
얼마 전에 실종상태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진짜 죽은건지 도망친건지 모르겠네.
'살아있다면 지금쯤 반응이 올텐데.'
임솔 교수는 히로인은 아니지만, 점수가 히로인 급으로 높다.
무조건 공략해야한다.
그런데 약간 비지니스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사실 펠라까지 해버렸으니 약간 선을 넘으면 바로 진전이 될 것 같은 사이지만 서로 그 선을 넘기 어려운 느낌이다.
교수와 제자라는 두꺼운 선이 있으니까.
물론 임솔과는 아직 할 게 많이 남았다.
마법 박람회도 그렇고, 논문도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했다.
문제는 문수린인데….
'일단 오늘 찾아가 봐야지.'
당연히 문수린 뿐만이 아닌 다른 히로인들도 포함이다.
다음은 내 전투력에 대한 고민이다.
전투력.
정확한 수치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에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단순 전투력은 S급 헌터 정도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원작의 중후반부. 주인공의 무력수준이 S급헌터 정도 된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파워 인플레 때문에 점점 강한 적들이 나오지만… 일단 당분간은 위협을 받을 걱정이 없다고 봐도 되겠지.
전투력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상태창.'
---------
??? : ???
---------
어느 순간부터 내 상태창이 열리질 않는다.
???라는 이상한 표식만 뜰 뿐이다.
물론 히로인 상태창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 상관은 없지만 내 스탯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좀 귀찮았다.
정확한 마력 스탯을 체크할 수 없었으니까.
"아… 모르겠다."
스탯이 중요하냐. 여자가 중요하지.
???라고 쓰여 있는 걸 들여다봐서 뭐 해.
어차피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이해 안 되는 일 투성이다.
해소도 안 될 사소한 의문은 빨리 넘겨버리는 게 낫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루시루미와 무슨 대화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사각사각-
엘리스는 던전의 마력 밀도를 계산하는 수업을 필기하고 있었다.
미리 예습했는데도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평가를 받는 이곳에서 성적을 유지하려면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다.
'근데 왜 쟤는 저러고 있냐고….'
상식을 무시하며 지루한 표정으로 펜을 굴리며 수업을 안 듣는 1등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이호연.
이론 수업마다 저러고 있는데 전 과목 만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운 사람.
"…."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엘리스가 공부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엘리스 자신의 만족.
본국에서 아이리스 길드 후계자 엘리스에게 보내는 기대.
그리고 언니에게 받고 싶은 인정.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게 선천적 마력 장애의 치료였다.
선천적 마력 장애만 없었으면 자존감이 낮아지지도 않았을거고 강박감도 없었을거다.
예전이었다면 1등을 뺏기면 화가 났겠지만 지금은 성적에 대한 강박감을 꽤 내려놨다.
선천적 마력 장애의 치료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게 저 1등이라 문제지만.
"아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자 엘리스도 펜을 내려놨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 밥을 먹으러 가야 한다.
밖에서 기다리는 세바스 찬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주변에 있는 생도들의 말소리가 엘리스의 귀로 스며들었다.
- 이호연 쟤는 오랜만에 보니까 더 잘생겨진 것 같아.
-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긴 해.
- 근데 원래 쌍둥이랑 저렇게 친했나?
- 셋이 붙어 다니기로 유명했잖아.
- 그래…? 근데 저렇게 가까웠나 싶어서.
- 그런가. 좀 많이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걸러 듣기엔 귀에 계속 걸리는 이호연이라는 이름.
엘리스는 슬쩍 이호연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호연은 루시루미 쌍둥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호연. 오늘 끝나고 뭐해?"
"음, 교수님도 뵈러 가야하고. 학생회도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하… 다행이네. 우리도 일이 있거든. 그치 루미?"
"… 응. 다행이야."
"뭐야. 나 빼고 이상한 거 하려고 하는 거지."
확실히, 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육체적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할까.
사이에서 흐르는 기류가 달라졌다.
루미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밖에서는 친구였을 뿐 저렇게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뭔가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걸까.
"…."
몰래 구한 영상에서 보이는 루미의 얼굴이 강의실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은밀한 곳에서 보여야할 여자의 얼굴.
그게 강의실에서 보이니까 왠지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때 이호연이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엘리스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 기회야.'
이호연에게 집으로 오라는 말을 해야 한다.
스마트워치로 연락하면 되지만 루시루미와 떠드는 모습을 보다 보니 직접 말로 전하고 싶었다.
강의실 밖으로 나간 엘리스의 시야에 이호연의 뒷모습이 잡혔고, 엘리스는 속도를 높여 다가갔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엘리스는 바로 말을 걸었다.
"이호연."
"응?"
오랜만에 가까이서 이호연의 얼굴을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 오늘 우리 집에 와."
"오늘?"
"응."
약간 당황하는 이호연의 반응에 엘리스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이호연에게 아무리 여자가 많아도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 점이 중요했다.
'자신이 주도하는 관계.'
'바람을 피더라도 정실 한 명만 있으면 된다.'
어릴 적부터 엘리스는 그런 가치관이 박혀있었다.
바람둥이인 아버지를 내버려 두는 어머니에게 항상 듣던 말이기 때문이다.
- 어차피 저 사람의 가슴에 있는 건 나인데, 바람 쐬기 정도는 허락해줘야지.
말도 안 되게 관대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기에 저런 인식이 박히게 되었다.
그래서 엘리스는 자신의 호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패배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호연이라는 꽃에 모이는 벌들.
그 수많은 벌 중에 한 마리가 되는 것 같았다.
"으음. 알았어. 오늘 갈게."
"기다리고 있을게."
할 말을 끝낸 엘리스는 뒤로 돌아 강의실로 돌아갔다.
관계를 주도하고 있는 느낌.
원하던 흐름에 엘리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