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648)

*

꿈틀-

남다은과 이호연이 사라지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창고에서 박민규의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읍…."

하아. 하아.

의식이 있는데도 몇 시간이나 몸을 일체 움직이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민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캬악… 퉷. 시체도 처리하지 않고 가다니, 이래서 초짜들은 안 돼. 후우…."

자신 같은 베테랑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하니까 초짜인 거다.

박민규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품속에 있던 검을 꺼냈다.

검 면에 혈관이 비치는 검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 기분은 나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어디선가 인연이 닿아 얻은 마인화 아티팩트.

이 검에 찔린 뒤 24시간이 지나면 마인으로 변한다.

그 사이에 얻은 어떤 상처도 치료되기에 예비목숨으로 챙겨놓았던 아이템인데, 이제야 사용한 것이다.

"찢어 죽여주마. 이호연… 남다은. 이 창녀가…."

박민규는 검 손잡이를 부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방금 마인으로 변했기에, 아직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응이 끝나는 순간 당장 도주해야한다.

"어떻게 이런 거까지 알고 있었을까요… 참 신기하네요."

"스칼렛이 모르면 나도 모르죠~."

그때, 박민규의 뒤에서 처음 듣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야! 씨발!"

또각- 또각-

금발의 미녀와 깔끔한 정복을 입은 흑발의 여성이 천천히 박민규에게 다가왔다.

"아이리스 길드의 한국 지부장… 아니다. 실험체한테 소개를 해서 뭐 하겠어요."

"그게 무슨 개소… 끄으읍!"

박민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아귀가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럽습니다. 쓰레기. 지부장 님. 데려가시죠."

"네~. 고마워요. 스칼렛."

강효린은 박민규의 마력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S급… 까진 아닌가? 그래도 마인화 하면서 올라간 체급을 생각하면 애매하지만 S급 타이틀을 줄 수 있겠네요."

"프, 푸하. 자, 잠시만. 대체 이게 무슨…!"

박민규는 마인으로 변한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간신히 스칼렛의 손아귀를 벗어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모습을 본 강효린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와 동시에 박민규의 몸이 작은 가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데려갈게요."

"그, 그만둬! 그마안!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마인화까지 했다고. 딱 한 번만…."

"괜찮아요. 살려는 드릴 거에요. 나름 비싼 돈을 줬으니 죽여달라고만 하지 마세요. S급 마인은 오래 버티는 실험체가 되어주겠죠?"

"끄으윽! 이 개새끼들이 왜 나한테……."

박민규는 이 순간 정말로 모든 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평생 감옥에서 썩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만큼 괴상한 실험을 온 몸으로 받을테니까.

고통스럽지만 죽지 않고, 자살도 못하는 실험체로 평생 썩게될거다.

꾸르르륵-

변기 물이 내려지는 소리와 함께 박민규는 아티팩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좀 쓰다가 팔아먹어야겠네요. 음~ 좋아."

강효린은 기분좋게 가방을 툭툭 쳤다.

"… 고생하셨습니다. 지부장님."

"에이, 고생은 스칼렛이 했죠. 저는 헐값에 좋은 소재를 구했는데요."

스칼렛은 이호연의 말을 따라 뒤처리를 하러 온 과정에서 만난 강효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리스 길드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업무 중 같은 길드를 만날 때를 대비해 눈에 띄는 곳에 징표를 붙이고 다니는데, 강효린에게 지부장의 표식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호연 님은 어떻게 지부장을 알게 된 거지?'

엘리스에게 받은 의뢰권은 어디까지나 엘리스 개인의 보답이었기에, 아이리스 길드원들이 알 수 없었다.

사실 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의뢰권을 뜯은 게 좋은 행위는 아니었으니까.

그걸 모르는 스칼렛은 이호연의 인맥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역시 줄을 잘 잡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 요즘은 뭐 하고 다녀요?"

"… 엘리스 아가씨의 개인적인 업무입니다. 저도 여기서 강효린 님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 지부장이실 줄도 몰랐고요."

스칼렛과 강효린은 초면이 아니었다.

정보 길드에서 얼마 없는 젊은 여자끼리 친해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업무상으로 떨어지다 보니 몇 년이나 못 봤지만, 예전에는 친분이 있었다.

스칼렛이 아이리스 길드원이라는 자리에서 안주하는 동안 강효린은 지부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으흥. 그런 것 치곤 이호연 생도하고 꽤 재밌게 사는 것 같던데. 뭐. 저는 개인의 업무는 존중해요. 바이바이. 스칼렛."

"… 예."

강효린이 손을 휘휘 저으며 떠나고, 남은 스칼렛은 입맛을 다셨다.

'들킨 건가.'

저 의미심장한 웃음은 분명히 자신이 업무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는 걸 아는 거다.

이호연의 이름이 나온 것까지 생각하면, 모든 사실을 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강효린의 성격상 남에게 말하고 다닐 성격은 아니지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호연을 만날 때는 나름대로 조심했는데도 들켰으니까.

자신의 은신술이 꽤 높은 경지라 해도 세상에는 언제나 자신보다 높은 경지가 있다.

'당분간은 좀 떨어져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제 노는 건 끝이다.

스칼렛은 엘리스를 생각하며 천천히 창고에서 빠져나갔다.

*

카페든 영화든 놀이동산이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건 얼마짜리야?"

"이게… 얼마더라. 거기 메뉴판 보면 나와 있을걸?"

"메뉴판? 아항. 헉…. 이거 한 접시면 리액션이 몇 개야?"

릴리아나가 광어회 두 점의 가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가 아니라 코스로 나오는거야."

"아… 그래도 비싸!"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박민규에게 복수를 끝낸 후. 

혹시나 울적해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남다은과 남다희, 릴리아나까지 데리고 풍미당으로 외식을 하러 왔다.

문수린이 자주 데리고 왔던 그 식당이다.

언제 한 번 남다은을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생겼으니 바로 데려왔다.

바이어 길드가 없어진 만큼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 오늘 내가 살 테니까."

"고맙습니다. 호연 오빠."

"잘 먹을게. 맛있지. 다희야?"

"응. 언니언니. 이거 언니도 먹어."

솔직히 남다은의 상태를 걱정했는데, 다행히 풀 죽거나 하진않았다.

오히려 이제 남다희와 마음대로 놀러 다닐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밥 먹고 카페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자."

참고로 놀이동산은 릴리아나와 남다희가 골똘히 고민해서 나온 결과다.

"좋아! 호연 오빠랑 릴리아나 언니랑 스칼렛 언니도 같이 가는 거야?"

"응. 당연하지."

"냠냠. 그러고 보니까 스칼렛은 어디 갔어?"

"개인적인 일이 있다고 해서 못 왔어. 이따가 합류할 거야."

나는 뒤처리를 하고 있을 스칼렛을 생각하며 광어회를 입에 집어넣었다.

음.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리는 게 비싼 값을 하긴 하네.

'이번 일에 스칼렛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바이어 길드 잠입부터 뒤처리까지 스칼렛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스칼렛이 없었다면 일이 얼마나 복잡해졌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

이번엔 어떻게든 보답해줘야지.

"언니. 근데 우리 왜 밖으로 놀러 가?"

"음… 이제 그래도 돼. 호연이랑 내가 다 처리했거든."

"우와! 이제 호연 오빠랑 언니랑 같이 놀아주는 거야?"

"응. 당연하지."

남다은은 남다희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언니로서 못해줬던 걸 모두 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럼 이제 언니랑 호연 오빠랑 사귀어?"

"… 어?"

"큭."

하지만 동생의 돌발질문은 상상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남다은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남다희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보며 병실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보니 원래는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인데도 저렇게 순수한 면모가 있어서 귀여웠다.

저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좋을텐데….

"그… 그럴걸?"

잡생각을 하던 나는, 곧 들려오는 남다은의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뭐?"

"아, 아닌가. 아니면 말고."

남다은은 붉어진 얼굴로 소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젓가락질을 하는 오른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뭐야? 언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오빠가 말해줘! 둘이 사귀어?"

"음…."

나는 슬쩍 남다은의 눈치를 살폈다.

남다은은 신경쓰지않는 척하며 이쪽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참고로 릴리아나는 자기 몫의 갈비찜을 먹고도 부족해 대화중이던 내 갈비찜을 슬쩍 훔쳐갔다.

뭐… 남다은이 저렇게 나와주면 고민할 필요는 없지.

"응. 그렇게 됐어. 다희야."

"우와! 대박! 언니~! 이제 호연 오빠 집에서 평생 살아도 되겠다. 그렇지?"

"… 응. 그러게."

부끄러워서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다은을 보며,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 점심시간.

"흐음…."

식사를 끝낸 엘리스는 강의실 책상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요즈음 생각지 못한 고민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엘리스가 바라보는 화면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의문의 괴수 켄타우로스. 프랑스의 골칫거리인데요. 엄청난 힘과 속도를 가진 이 몬스터는 프랑스 정부가 전력을 다해 처리하고 있는….

바로 켄타우로스.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지능이 있는 몬스터다.

엘리스의 아이리스 길드도 프랑스에 국적을 두고 있기에 손실이 꽤 컸다.

겨우 몬스터 하나 때문에 손실이 나는 상황 자체가 웃기지만, 그만큼 현지에선 심각한 사태였다.

"… 본가에 가봐야 하나."

아카데미가 아무리 중요해도 아이리스 길드가 먼저였다.

"아니야. 가서 뭐 할 게 있다고."

어차피 엘리스 한 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오히려 아버지의 신경이 자신한테 분산되면 도움이 아니라 민폐다.

-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엄청난 비리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온 바이어 길드인데요. 쌓아왔던 이미지와 달리 뒤에선 마약이나 성매매, 불법 아티팩트 등 엄청난 불법자금을 운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동시에 바이어 길드장인 박민규는 실종되었으며, 전문가들은 해외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이 사람 인상은 참 좋았는데."

바이어 길드장은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순해 보이는 아저씨였지만, 자신을 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던 기억이 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이호연도 퇴원했구나.'

엘리스는 다시 마사지를 시작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마사지사를 고용했다고 보고 하라는 말을 전했는데, 아빠한테 아직도 아무 말이 없었다.

세바스 찬이 내 말을 잊었을리는 없으니 일때문에 바쁜 모양이다.

'오히려 좋네.'

잔소리는 늦게 들을수록 좋지.

엘리스가 잡생각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그때,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찰랑거리는 흑발이 당당하게 강의실에 들어왔다.

'남다은?'

꽤 오래 아카데미에 안 나와서 바이어 길드와 함께 범죄라도 가담했나 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나오나 보다.

'사정이 있었겠지.'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떠올렸다.

'바이어 길드 소속 길드원들은 모두 조사를 끝냈다고 했잖아.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 걸 보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거고… 바이어 길드가 사라졌으니 지금은 아무 소속도 없는 거 아니야?'

저번에 얻은 정보에 따르면, 남다은은 오히려 바이어 길드에 약점을 잡힌 상태였다.

약점이 잡혔다보니 범죄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불안했지만, 그런 가능성이 없다면 영입 1순위의 인재였다.

예전부터 계획했던 남다은 영입.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예 계약했던 길드가 사라져버렸으니까.

마침 강의실에 둘밖에 없었으니, 엘리스는 다시 남다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크흠. 다은아, 오랜만이네?"

공적인 일에서 나오는 엘리스의 목소리는 자신이 직접 들어도 귀여웠다.

"응."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남다은은 갑자기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엘리스는 방긋방긋 웃으며 남다은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고마워."

남다은은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나와서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혼자 다니는 생활이 익숙했지만, 지금은 이호연의 기숙사에 지내면서 사람의 따뜻함을 조금은 알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엘리스에게 감사를 느꼈다.

'생각해보니 호연이에게 보답하게 된 계기도 엘리스였어.'

엘리스가 별 생각 없이 던진 견제가 남다은의 마음을 바꿨으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남다은은 그게 견제인지도 몰랐다.

"저번에는 고마웠어."

"응? 뭐가?"

"꽃집에서 해준 충고가 도움이 많이 됐어."

"충고?"

엘리스는 남다은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민했지만, 꽃집에서 충고 따위 한 적이 없었다.

이호연의 뒷담화를 하긴 했는데… 설마 그건 아닐 테고.

'아무렴 어때.'

고맙다고 하면 그냥 받으면 된다.

굳이 따지고 들 필요도 없다.

"응응.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바이어 길드랑 계약이 끝났잖아."

"그렇지. 바이어 길드가 사라졌으니까."

"…… 응."

엘리스는 순간 온몸에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남다은의 말에 담긴 바이어 길드에 대한 혐오가 자신에게도 옮는 것 같았다.

'얘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런 쓰레기 같은 길드장 아래에 있었으니 여러 부조리를 당했을 거다.

엘리스는 남다은을 딱하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길드, 아직도 올 생각 없어? 대우는 최고로 해줄게. 어디를 가도 여기보다 좋은 조건은 못 받을 거야."

정보 길드의 강점은 은밀함뿐만이 아니다. 

엄청난 자금력이다.

엘리스는 자신이 있었다.

다른 길드들과 영입 경쟁을 시작하면 조건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는데, 남다은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안. 안 될 것 같아."

남다은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엘리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순 없다.

자신의 소속은 이제 자신이 정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이호연이 정할 문제였다.

"… 어, 응. 그래."

'뭐가 그렇게 문제길래 저렇게 대답하지?'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엘리스는, 머쓱함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에는 여전히 영업용 미소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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