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연과 헤어진 루시는 루미에게 찾아가기 전 미용실에 들렀다.
이제는 루미와 같은 흑발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손님 아까 오셨던 분 아닌가?"
"아하하... 맞아요."
몇 시간만에 다시 온 루시를 미용사가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루시는 웃으며 눈을 피했다.
"... 뭔가 어색하네."
머리 색이 푸른색인데 단발이라니 느낌이 조금 어색했다.
미용실에서 나온 루시는 계속 고민했다.
루미에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이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할 좋은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너무 꼬여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머리를 짧게 자른 이유부터, 이호연과 관계한 일 까지 설명하려면 너무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더 시간을 끌긴 싫었다.
루미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결국 루시는 무작정 루미의 기숙사로 향했다.
띠링-
서로의 방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쌍둥이였기에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루미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
"응. 나 왔어."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 예쁘다."
"... 고마워."
루시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입을 우물쭈물했다.
가슴에 담긴 말은 너무 많았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조립해서 꺼낼 수가 없었다.
"있잖아. 루미...."
결국 고민 끝에 입을 여는 루시를 보며 루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호연 씨 일이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
"루시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항상 호연 씨에 대한 고민이었어."
"...사실은."
루시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느꼈던 소외감.
그리고 모텔에서 나오는 둘을 발견한 것.
그래서 같이 사귀자는 말에도 둘을 믿지 못한 일.
결국 루미로 변장하고 이호연을 찾아간 일.
이호연에게 고백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까지.
루시는 마음속에 있는 감정과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다 쏟아냈다.
루미의 반응이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언젠가 말해야 하는 일이었다.
"미안해. 이제 절대 의심하지 않을 거야. 루미도 이호연도... 둘 다 좋아하니까."
하지만 루시의 걱정과 달리, 루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잘했어. 루시."
"...아니야. 미안.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으응. 괜찮아. 루시. 난 너랑 호연 씨가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기뻐."
"루미...."
쌍둥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이미 둘에게 쌓인 신뢰는 이런 잘못으로 부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루미도 화가 나지 않았다.
"루시, 호연 씨랑 하는 거... 좋았어?"
"무, 무슨 말이야!"
루미는 웃으며 루시를 바라봤다.
자신도 처음 경험했을 때 저런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언니가 된 것 같았다.
"다음에는 셋이 해보자."
"루, 루미...."
루시는 루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순수하던 동생의 입에서 셋이 같이 한다는 말이 나오다니.
"호연 씨도 좋아하지 않을까...? 경쟁자들을 이기려면 우리도 노력해야 해...."
"... 맞아. 응. 생각해보니 루미 말이 맞아."
하지만 루시도 이어지는 루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호연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쟁자들을 이기려면 우리만의 무기를 사용해야한다.
"응, 힘내자. 루시...!"
"우리가 이길 거니까. 루미."
둘은 눈을 마주치고 살짝 웃었다.
이렇게 진지해지는 게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 쌍둥이는 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전의를 다졌다.
*
한편, 이호연이 켄타우로스를 본 다음날 이호연의 방.
릴리아나는 방으로 방송을 하러 갔고 스칼렛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조용한 거실에서 남다은은 TV를 보며 남다희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쉬고 있었기에 남다은은 하루종일 남다희와 시간을 보냈다.
- 신영 길드에 대한 폭로와 내부고발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최근 용기를 내 내부 고발을 한 바이어 길드의 박민규 길드장에 대한 인터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함께 보시죠!
- 안녕하십니까. 바이어 길드의 박민규....
"어, 언니. 민규 아저씨 아니야?"
"...."
남다희는 익숙한 얼굴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TV에서는 박민규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남다은도 바이어 길드의 속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다.
더러운 일들을 뒤 맡아 하며 대형 길드들의 어두운 일면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중 제일 거대한 고객이 신영길드였다.
- 혹시 이번 폭로를 하기 전에 걱정은 없으셨나요?
- 물론 있었습니다. 대형 길드를 적으로 돌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국민들에게 이런 어두운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 동시에 협회에서도 내부 고발자인 바이어 길드를 보호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요. 저희 방송국도....
아마도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양지로 올라가려는 계획일 거다.
항상 구질구질한 일을 그만두고 더 큰 명예와 부를 얻기를 원했던 사람이니까.
협회도 이번 기회로 관련없는 척을 위해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다희야, 다른 곳 볼까?"
"응. 언니."
남다은이 TV를 돌리기 직전, 박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선의, 선행으로 가득 찼으면 하는 마음에....
띡-
- 오늘의 코너! 남녀생활 탐구입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언니."
"응."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가득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남다은은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느 샌가부터 남다은의 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마치 깨진 독처럼 채워도채워도 어딘가로 감정들이 빠져나갔다.
깨진 독의 유일한 조각은 동생인 남다희.
다희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인 이호연.
그와 있을때도 조금씩 감정이 되살아났다.
이호연 덕분에 박민규의 손아귀에서 벗어 낫지만, 아직도 이렇게 기숙사에 갇혀있어야 하는 신세였다.
자신과 남다희는 쫓기고 있었으니까.
선의. 선행. 도움. 기여. 봉사.
박민규가 지껄였던 단어들이다.
남다은은 저딴 허상은 믿지 않았다.
저런 좋은 단어들이 진작 세상에 퍼졌더라면 자신과 동생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다.
남다희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이어갔을 것이고, 남다은도 성적에 목숨 걸지 않으며 평범하게 아카데미를 다녔을 거다.
"아~ 이 개새끼들 진짜! 왜 내가 져야 해! 왜!"
방에서 들리는 귀여운 목소리.
서큐버스라는 릴리아나의 목소리였다.
"...."
예전에는 항상 무감정하게 살았던 남다은이지만, 이상하게 여기 사람들과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좋은 것도 많이 알려주고, 이호연에게 보답도 할 수 있게 해준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 남은 답답함은 여전했다.
스스슥-
그때, 천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타닥-
남다은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앞에 스칼렛이 서 있었다.
언제봐도 놀랄 정도의 기술이었다.
스칼렛은 머리를 정리하고 남다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은 양. 잘 쉬고 있었죠?"
"네. 무슨 일이세요?"
"박민규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했죠?"
"...네?"
"따라오세요. 다은 양."
스칼렛의 입에서 나온 박민규라는 이름을 듣고, 남다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다은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있던 돌덩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후우... 끄으읍."
나는 조용한 병실에서 혼자 명상을 하고 있었다.
어제 백아영에게 이상한 말을 들은 이후로 원작을 떠올리며 계속 고민해봤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과거의 일족... 과거의 일족?"
그때는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그 상황을 넘어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스칼렛에게 내 뒷조사를 시켜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의 뒷조사를 시키면 날 엄청나게 의심할 테니 그만두기로 했다.
이건 조금 천천히 해결해도 될 문제다.
백아영은 이미 공략이 끝났고, 어차피 이해해준다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직접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필요하면 자기가 찾아오겠지.
과거의 일족이라고 했으니, 나에게 해를 끼칠 거 같진 않기도 하고.
어쨌든, 마력 회로가 많이 회복되었고 퇴원도 가까워졌다.
그럼 이제 슬슬 밀렸던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남다은이다.
물론 다른 히로인들도 중요하지만, 박민규는 빨리 처리해야 한다.
바이어 길드는 내버려두면 무슨 귀찮은 짓을 할지 모르고, 그래야 남다은과 남다희의 운신이 자유로워질 테니까.
사사삭-
익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내가 호출한 스칼렛이었다.
"호연님. 무슨 일... 음?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신 건가요?"
"응. 거의 치료가 끝났어. 다른 애들은 뭐 하고 있어?"
"남다은 양과 다희 양은 기숙사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릴리아나님은 방송을 하고 있고요."
"그래.... 내가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스칼렛에게 미리 언질을 준 적이 있다.
남다은과 남다희를 내가 데리고 있다는 소문을 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이어 길드장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전하라는 것도 미리 얘기해놨다.
언제든지 내가 명령할 때 움직일 수 있도록 말이다.
"남다은 양과 관련된 일이라면, 준비가 끝났습니다."
역시 에이스답게 준비는 끝난 모양이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아."
아예 퇴원하고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유명해졌다.
지금은 내가 입원 중이기에 나에 대한 관심이 좀 적다.
하지만 퇴원하고 나면 엄청난 관심이 쏟아질 거다.
차라리 그 전에 일을 처리하는 게 낫다.
"그럼 바로 움직일까요?"
"음.... 아니. 잠시만. 남다은한테 직접 물어보자."
"다은양한테요?"
"응. 괜히 나 혼자 생각했다가 이상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생일 선물을 줄 때도 물어보고 주는 타입이다.
남다은의 의사를 확실하게 알고 행동하는 게 낫다.
복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상대가 파멸하기만 하면 되는 것과 자기 손으로 직접 끝내고 싶은 것.
직접 물어보긴 뭐한 주제지만, 나에겐 상태창이 있다.
유도질문으로도 어느정도 답을 찾을 수 있을거다.
"그럼, 바로 다은양을 데려오겠습니다."
"응. 아직 외출 가능 시간이 아니라서."
나는 창문 밖으로 나가는 스칼렛을 보며 명상을 시작했다.
남다은에게 할 질문도 생각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