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만에 병원 밖으로 나왔다.
나가기 전에 검사를 한 번 더 받아야 했고 밤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외출증을 끊고 나서야 나갈 수 있었지만 충분히 만족이다.
이미 문수린에게 연락은 끝났다.
파티장에 조사 본부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테러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조사를 하고있는 걸 보니 이번 테러가 엄청나긴 했나 보다.
아무래도 고위 VIP들이 휘말린 점까지 고려해서 확실하게 조사하는 거겠지.
'수린 누나도 볼 겸 조사 도와주고... 기숙사에도 갔다가, 루시와 루미 만나고... 임솔 교수님은 못 보겠네.'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획도 짜놨다.
파티장에 도착하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린 누나!"
앞에서 날 기다리는 문수린에게 다가갔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이 눈에 띄어서 바로 찾았다.
"호연아! 몸은 괜찮아?"
문수린은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마치 오래 못 본 친누나 같았다.
"당연히 괜찮죠. 누나 도와주려고 왔어요."
"고마워. 사실 내가 파티장을 많이 돌아다녀서 그만큼 증언할 것도 많았거든. 네가 왔으니 좀 편해지겠다."
문수린은 내가 반가운지 싱긋 웃었다.
"저만 믿으세요. 저만."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조사처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시간 뒤, 온몸의 힘을 빼앗긴 채 조사실을 빠져나왔다.
"누나. 나 죽어요...."
"으구, 고생했어. 이거라도 마셔."
문수린은 그 느낌 다 안다는 듯, 익숙하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꿀꺽 꿀꺽.
수분이 들어가니까 좀 낫네.
확실히 고위 인사들 중에 사상자가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판데믹에서 이 정도로 많은 수의 마인을 동원한 게 처음이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분류된 것 같다.
투입된 인력도 어마무시하다.
그 덕에 조사를 받는 내내 모든 기운이 빠져버렸다.
특히나 결계에 대해서 어찌나 묻던지 원.
어떻게든 천재 마법사 컨셉으로 빠져나오느라 힘들었다.
'이런 큰 사건이 원작에는 왜 없었을까.'
분명 나비효과는 맞는데… 확실하게 집히는 곳이 없다.
찰칵찰칵!
파티장에는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기자들도 많이 있었다.
"아직 시끄러운가 보네요. 기자들이 있는 걸 보면."
조회수에 목숨을 거는 기자들이 아직도 여기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첫날엔 저거보다 더했어. 기자 반, 조사 인원 반이었거든."
"아하...."
생각만 해도 어지럽네.
기자들한테 시달린 경험이 있다보니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일단 좀 쉬고 있어. 나도 개인적으로 조사할 게 있어서 남아있는 거라 가볼게."
"네네. 다녀오세요."
문수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벤치에서 쉬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호연 생도.... 안녕하세요."
익숙한 고양이상의 여인이 내 옆에 앉았다.
"아, 민예지 씨. 안녕하세요."
"후우. 대체 첫 만남 같은 인사를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안 그래도 이번엔 제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예지 씨."
민예지도 여기 있었다니.
하긴 전투 인력들은 조사할 게 많은 만큼 오래 있었을 거다.
아마 계속 있는 건 아니고 왔다 갔다 하면서 조사를 받았겠지.
"고마우면 길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거 어때요?"
"어... 그건 좀…."
최대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를 만나면서 길드 활동까지 할 순 없다.
"조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요. 너무 칼 같아. 호연 생도."
민예지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날 편하게 대했다.
'보기보다 잔망스럽네.'
철혈 길드의 팀장치고 사람이 참 가볍다.
하지만 저 말이 맞긴 하지.
고맙다고 말로만 해서 뭐해.
"어... 그럼 조건이라도 들어볼까요. 아니면 길드 가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행해보는 것도 괜찮고."
굳이 길드에 들어가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협력관계가 되는 것도 방법이니까.
"그럴까요? 그럼...."
그렇게 민예지와 사업적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되고, 길드 가입이 아닌 다른 조건을 들어주려고 했던 그때. 사람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호연 생도. 노블레스 길드의 조건도 한 번 들어주게. 철혈 길드에게 밀리지 않을 거야."
"저기요. 지금 철혈 길드하고 협상하고 있잖아요!"
민예지가 대화에 끼어든 남자를 보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우리, 우리 투사 길드에게도 기회를 줘!"
"이 새끼들, 아니. 이 사람들이 상도덕이 없나!"
"싸우지 마세요. 예지 씨. 잠시만. 아...."
이 미친놈들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데 생도 앞에서 이러는 거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쌍욕을 박을 수도 없으니, 나는 조용히 민예지가 사람들을 제압하는 걸 기다렸다.
*
그리고 같은 시간 파티장에서,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 남성이 있었다.
"하아... 씨발 새끼들. 다 나한테 맡기고 도망갔네."
바이어 길드의 길드장. 박민규였다.
평소에 워낙 높은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여기서도 잡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결국 박민규는 며칠 동안 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그 덕에 길드의 일은 처리하지도 못했다.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으하, 저 미친년. 성격 좀 죽여야 한다니까. 영입 방해했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드네."
"그러니까. 이호연은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돼."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박민규는 눈을 찌푸렸다.
'뭐지? 이호연?'
조사 현장에서 저렇게 사람들이 몰릴 이유가 없을 텐데.
의구심을 느낀 박민규는 그 방향으로 향했다.
그쪽에는 민예지와 이호연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민예지가 고개를 숙이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상황을 모두 지켜본 박민규는 감을 잡았다.
'이호연 영입 시도구나!'
지금 한창 대세인 천재 마법사 이호연.
혹시 바이어 길드에 이호연이 온다면... 순식간에 날아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박민규는 곧 생각을 접었다.
철혈 길드에서도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데, 자신이 내밀 협상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 잠시만.'
아니, 잘 생각해보니 있었다.
20대 남자가 참을 수 없는 유혹인 성욕.
바이어 길드에겐 노예 계약서로 묶인 남다은이 있었다.
남다은은 어차피 곧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의 것이니 처음은 줄 수 없다. 하지만 충분히 즐긴 후라면... 이호연에게도 빌려줄 수 있다.
같은 학년이니 그 아름다운 얼굴은 충분히 알고 있을 거다.
사회적 시선이 있는 만큼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할 순 없지만 아무도 없는 지금은 슬쩍 찔러볼 만 하다.
'생각해보면 저 자식 덕분에 남다은이 1등을 놓쳤지. 큭. 바이어 길드에 온다면 보답으로 안게 해주마.'
박민규는 민예지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이호연은 피곤한 듯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이호연 생도. 안녕하세요. 저번 파티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죠?"
"... 안녕하세요. 분명, 바이어 길드의 박민규 씨였죠."
"예에... 기억하시는군요."
'남다은 때문이다. 분명해.'
일개 중소 길드장인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이유는 남다은 뿐이다.
박민규는 이 협상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과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화를 맞춰주는 이호연은,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이 새끼가 왜 나한테 말을 걸지?'
이호연은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박민규를 상대했다.
"이야, 역시 천재 마법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네요."
"아하하…."
"그리고 저번 파티에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
'뭐지…?'
뜬금없는 박민규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의외로 대화는 잘 흘러갔다.
박민규는 정말 연기를 잘했다.
착해 보이는 아저씨 인상에,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적당한 목소리 톤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며 대화한다.
하긴 이 정도 사회생활 능력은 돼야 더러운 뒷일을 하고 다니지.
나도 그 더러운 속내를 몰랐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거다.
적당히 대화를 거절할 수 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민예지 씨와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나요?"
그리고 그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아, 감사하게도 길드 가입을 제안해주셔서요."
"오… 그럼 이제부터 철혈 길드의 이호연으로 볼 수 있겠군요."
박민규는 정말 축하하는 듯 손뼉을 치며 푸근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거절했어요."
"의외네요.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나 보네요? 생도라고 계약금을 너무 싸게 불렀나 보죠? 이호연 생도는 이미 현역 헌터급일텐데요."
"그런 문제는 아니고… 그냥 별로 길드 가입 생각이 없어서요."
"아하. 하긴, 민예지 씨는 여자다 보니 호연 씨가 마음에 드는 조건을 내밀기 힘들 수도 있겠네요."
"… 네?"
"실제 헌터 업계에서는 돈이나 아티팩트 말고도 제공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요. 특히 남자 헌터에게는… 여자라던가?
박민규는 말을 꺼낸 뒤에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푸근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바로 실수였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요. 이런 얘기는 별로죠?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헌터 업계의 실태를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미친놈이 연기하는 거 봐라.'
나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살이다.
그런데 40이 넘은 아저씨가 허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박민규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날 속이고 있다.
'여자… 여자. 잠시만, 설마…?'
바이어 길드의 여자라고 하면… 집히는 게 하나밖에 없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없는걸 알고 있었지만, 박민규에게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니요… 그런 얘기도 나쁘지 않죠."
최대한,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야비해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없으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하… 하긴 이호연 생도도 남자니까요. 그런 얘기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죠."
박민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계약서였다.
"1학년에서 유명한 남다은 생도. 이호연 생도도 알죠? 바이어 길드와 종신 계약을 맺었어요. 그리고… 사실 저와 은밀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스폰서 같은 거죠."
스폰서라는 단어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남다은의 동생을 인질로 잡아놓고 스폰서라니.
누가 들으면 남다은이 자진해서 창녀가 된 줄 알 거 아니야.
그게 자기 딸뻘인 여자아이한테 할 짓인가?
"우리 잠시만 솔직해지자고요. 바이어 길드에 오면… 남다은을 이호연 생도 마음대로 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여동생까지요. 이게 다은이 여동생의 사진인데, 아주 예쁜 게 미래에는…."
"그만. 잠시만요."
박민규는 품에서 남다희의 사진까지 꺼내며 내게 보여줬다.
아주 제대로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으니까.
"네? 이호연 생도?"
"제가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이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거로 하죠."
"아니요. 금방 끝…."
박민규가 뒤에서 말을 이어갔지만, 무시하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가속'
아예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고 마법까지 썼지만,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 아, 나 마나 못 쓰지."
마나를 일으키려 했던 반동으로 온몸이 욱신거림이 찾아왔다.
순간 내가 환자인 걸 까먹을 정도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누나한테 인사도 못 하고 나왔네."
문수린에게 인사는 해야 했는데.
하지만 다시 갔다가 박민규를 마주치면 화를 참기 힘들 것 같다.
[뚜렷한 정신력]으로도 커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화를 참을 순 있지만, 아예 티 나지 않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래도 건진 게 아예 없진 않아.'
박민규는 아직 남다희가 사라진 걸 모른다.
남다은도 그냥 아카데미에 돌아갔겠거니.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러면 뭐… 나쁘지 않네.
구역질 나는 대화를 하면서도 얻은 게 있으니 다행이다.
돌아가기 전에 문수린에게 적당한 변명 메시지를 남겼다.
- 나 : 누나. 병원 외출 시간이 끝나서 먼저 들어갈게요. 다음에 봐요.
잠시 스마트 워치를 지켜봤지만 조사 때문에 바쁜지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