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648)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0.8)

- [ 성욕 : 95 ]

- [ 식욕 : 45 ]

- [ 피로도 : 75 ]

현재 상태 : 대체 왜...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거야. 왜....

"… 아영 씨."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혀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직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요?"

"왜, 왜 그러는데 …."

백아영은 거의 흐느끼며 날 치료하고 있었다.

타이밍은 지금이다. 고백을 꺼내기에 너무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뒤의 말을 꺼낼 순 없었다.

내 눈앞이 아득해졌으니까.

'설마 지옥에서 눈을 뜨진 않겠지.'

제발 병실에서 눈을 뜨면 좋겠다. 백아영의 호감도도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힘을 다해 플래그까지 꽂아놨으니, 설마 안 떨어지겠지?

- 호연아… 호연아!

나는 백아영이 울고 불며 내게 매달리는 걸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호연아… 호연아…!"

백아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호연의 가슴에 매달렸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이호연이 쓰러진 건 마력 탈진이나 버프 스킬의 후유증이 겹쳤기 때문일거다.

순식간에 화력이 두 배는 강해졌으니까.

백아영은 마나를 아끼지 않으며 치유의 빛을 쏟아냈다.

등에 있는 상처가 아물고, 그 후엔 몸 내부를 치료했다.

'마나 회로가 엉망이야.'

도대체 어떤 스킬을 사용한 건진 몰라도, 이 정도면 마나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꽤 긴 요양이 필요할 것이다.

"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백아영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단순 섹스 파트너를 위해 이 정도로 해줄 수 있을까?

물론 해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호연은 그렇게 착해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때는 확실히 챙겨가는 사람이다.

'...정말 날 좋아해서?'

혹시 정말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그런 뉘앙스가 담긴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제 이호연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백아영은 참지 않기로 했다.

이호연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상관없다.

더이상 커져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백아영의 인생에서 이호연이란 존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무조건 이어져야 할 사람.

사랑이란 단어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애정하는 사람?

사모하는 사람?

친애하는 사람?

경애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 

사실 어떤 말을 쓰든 백아영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참지 않을 것이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스윽-

백아영은 치료를 이어가면서 이호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여유로운 표정이 아닌 괴로움에 눈을 찡그린 얼굴.

그래도 처음보다는 편해 보이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남성적인 눈과 갸름한 턱라인, 오뚝하게 솟은 코와 생기있는 입술.

무의식적으로 이호연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살짝 습기 있는 부드러운 입술은, 백아영의 혼을 앗아가기 충분했다.

백아영은 무언가에 홀린 듯 얼굴을 점점 밑으로 내렸다.

둘의 입술이 맞닿기 직전,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

급히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핀 백아영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발견했다.

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티장에 온 VIP들과 손님들의 얼굴을 되짚어봤지만, 저런 얼굴은 없었다.

그 말은 즉… 적이란 소리였다.

꿀꺽.

백아영은 이호연의 몸을 뒤에 숨긴 채 붉은 머리의 미녀와 대치했다.

치료를 멈출 수 없었기에, 이호연의 몸에 한 손을 대고 있는 상태였다.

미녀에게 느껴지는 기세는, 아까의 해골 가면 이상.

긴장한 백아영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에요."

"……."

붉은 머리의 미녀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훑더니, 백아영 뒤에 숨은 이호연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네."

"…읏!"

동시에 백아영의 호흡이 느려졌다.

어느새 이호연의 옆에 다가온 붉은 머리의 미녀를 막으려 했지만, 몸의 움직임 자체가 0.5배속을 한 것처럼 느려졌다.

이호연의 얼굴을 만지는 레베카의 손을 막으려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게… 무… 슨…."

"아… 치료 중이었구나. 흠. 이대론 안 되겠지?"

레베카는 백아영을 둘러싼 룬의 결계를 해제했다.

백아영의 몸이 제대로 돌아오고, 부족한 호흡이 한 번에 느껴진 백아영은 엎드려서 구역질을 했다.

"커흡…! 콜록콜록, 케흑!"

"미안해. 힐러인 줄 알았다면 내버려 둘걸."

"다, 당신은 누구예요…."

백아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이호연을 최대한 가렸다.

시간을 1초라도 벌 수 있다면 지원이 올지도 모르니까.

어떻게든 레베카의 시야를 가리며 백아영은 이호연의 몸 위에 엎드렸다.

"연인인가 보네…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레베카는 이호연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은 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작은 짐승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일어나면 꼭 전해줘. '과거의 일족에서 찾아왔으니 회복하면 다시 찾아가겠다.' 라고. 알았지?"

"… 네."

레베카는 그 말만을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계속 주시하던 백아영은, 레베카가 사라지고도 한 참 후에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백아영은 고민했다. 

과거의 일족이라니, 이호연은 대체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는 걸까.

"… 여보."

물론, 어떤 과거를 품고 있더라도 품어줄 준비는 끝나있었다.

지이잉-

"여기! 여기 성녀님이 있다! 이호연 생도도 있어!"

그때 주변의 룬의 결계를 역산한 헌터들이 몰려왔다.

다들 몸에 잔 상처들이 있었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게 바깥도 상황이 엄청났던 모양이다.

"아영아! 괜찮아?!"

백아영은 제일 앞에서 달려오는 민예지를 보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익숙한 얼굴이 있으니 계속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며 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예지야… 흑. 흐으윽…."

"응응… 괜찮아. 이제 안전해."

백아영은 민예지에게 안기며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

어둡다.

여긴 어딜까.

서걱- 서걱-

무언가를 칼로 베는 소리가 들려온다.

… 혹시 지옥인가?

벌떡-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

새하얀 천장이 날 반겼고, 나는 흰색과 초록색이 섞인 괴상한 옷을 입고있었다.

옷에는 철혈 병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아…."

다행이다.

지옥이 아니라 병실이었구나.

투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옆을 돌아보자, 입을 떡 벌린 백아영이 손에 과도를 들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엔 껍질이 반 정도까진 사과가 떨어진 상태였다.

"아영 씨…."

"…드디어 일어났구나."

백아영은 내 얼굴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저 혹시 오래 잠들어 있었어요?"

설마 한 달 동안 잠든 상태였거나 하진 않겠지?

"아니, 하루 정도 잠들어 있었어."

"아… 다행이네요."

"일단 일어났다고 연락을 해야 해서, 잠시만 기다려줘."

백아영이 전화로 어딘가에 전화하는 동안, 나는 히로인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0.8)

- [ 성욕 : 90 ]

- [ 식욕 : 55 ]

- [ 피로도 : 85 ]

현재 상태 : 여보… 깨어나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히 호감도가 100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플래그를 꽂고 쓰러지길 잘했네.

'호감도 100….'

여러 사건들이 겹쳐지며 이뤄진 호감도다.

히로인의 호감도가 최대치에 달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나도 약간은 긴장한 상태였다.

"네가 쓰러지고 엄청나게 난리였어. 나한테 오기 전에 여러 헌터들한테 들렸다며? 다들 네 얘기뿐이더라. 걱정하는 분도 많았어."

"아…."

경황이 없어서 모든 결계를 쑤시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

"파티장에 있는 거의 모든 헌터가 너를 천재 마법사라고 인식했으니, 남는 장사네?"

백아영은 후후 웃으며 다시 사과를 깎았다.

… 아니 이게 맞나?

물론 여유로운 건 좋다. 

울고불고 하는 거보단 나으니까.

그런데 호감도 100인데 이상하게 평범하다.

'아….'

그제서야 나는 사과를 깎는 백아영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걸 발견했다.

"몸은 괜찮아? 일단 외상은 다 치료했어. 마나 회로는 엉망이라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백아영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봤는데 상태는 좋았다.

등에도 어색한 감각이 없는 게 치료가 잘 된 것 같았다.

"역시 아영 씨. 성녀님 답네요."

잘 치료된 몸에 만족하고 있는데, 백아영은 등을 신경 쓰는 날 보며 입을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왜 그랬어?"

"네?"

"왜 나 대신 칼을 맞은 거야. 분명 내가 맞았어도 괜찮을 걸 알았잖아. 근데 왜…?"

"…."

백아영이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눈이 떨리는 게, 어떤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아영 씨."

"왜 그랬냐고… 왜… 네가 그러면 나도 참을 수 없어지잖아… 그래놓고 나만 이렇게…."

참아왔던 말을 마구 쏟아내는 백아영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렇게 만든거니까.

이제 그만할 때가 됐지.

"아영 씨. 좋아해요."

나도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어?"

"좋아해요. 당신."

"거, 거짓말하지 마. ㄸ, 또 이상한 플레이를…."

화악-

나는 백아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내 몸으로 잡아당겼다.

내 품에 안겨 얼굴이 빨개진 백아영은 내 눈을 피하다가 슬쩍 눈을 마주쳤다.

"아영 씨. 저 되게 나쁜 놈인 거 알죠. 다 알면서도 아영 씨 덮치고, 괴롭히고, 다른 여자랑 노는 놈이에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근데요. 그래도 좋아하는 걸 어떡해요."

내가 말을 할 때 마다 백아영의 눈이 빨개졌다.

참 쓰레기 같은 말이지만… 호감도 100이면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통할 것 같더라.

물론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이런 놈이여도… 받아줄 거죠?"

내 진심이 담긴 말에 백아영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 흑. 왜, 왜 이런 쓰레기한테 반한 거야. 흑."

퍽- 퍽-

"쓰레기… 강간범… 바람둥이…."

가슴을 때리는 주먹보다 울면서 내뱉는 말이 더 가슴을 찔렀다.

백아영의 주먹에 담긴 미약한 힘마저 사라질 때 즈음, 나를 때리려던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봤다.

"여보, 사랑해. 당신을 언제나 1등으로 생각할게."

"… 사랑해요. 사랑해요. 여보… 흑. 줄곧 기다려왔어요."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원래라면 내가 더 꽉 끌어안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 백아영에게 기대는 형태였다.

이 꼴을 보니 회복까지는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내 품에서 울던 백아영은 잠시 나를 밀어내고 눈물을 닦아냈다.

"여보는 울보."

기뻐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참는데, 눈에는 눈물이 나는 게 귀여워서 백아영을 놀렸다.

"… 조용해. 여보."

백아영은 스마트 워치를 두드리며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백아영입니다. 이호연 생도가 일어났는데, 아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집중 치료와 관리에 들어가야해요. 지금부터 면회인이나 간호인의 출입을 금지해주세요."

"… 여보?"

갑자기 저게 무슨 말일까.

나는 멀쩡한데.

"네. 지원은 필요없습니다. 제가 전력을 다할테니까요. 시간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입니다. 그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백아영은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었다.

정장 블라우스를 벗을 때 쯤에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급하게 변명했다.

"… 여보, 아니 아영 씨. 제가 그… 힘이 하나도 없어서… 지금은…."

"괜찮아요. 여보. 제가 알아서 할게요."

"…."

사냥감을 바라보는 요염한 눈빛으로 날 주시하는 백아영을 보며… 나는 쥐덫에 걸린 쥐가 된 현실을 인정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