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 아... 아흡."
백아영은 몇 시간이나 지속한 사람들과 대화에 지쳐서 잠시 구석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할 생각이었는데, 거짓말처럼 폭발소리가 들리며 테러가 시작됐다.
다행히 옆에 남자 헌터 한 명이 같이 있었지만...
"아영 씨. 끄윽, 도망쳐...."
남자 헌터는 마인들의 합공에 온몸이 꿰뚤렸다.
백아영의 힐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마인이었다.
"여, 영호 씨... 으윽."
인간이 아니라 살점이 되어버린 남자를 처리한 마인들의 다음 목표는 백아영이었다.
- 끄륵... 키킥
- 성녀... 성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마인들에게서 백아영은 달아났지만, 수십 명의 마인들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결국 선두의 마인이 백아영의 뒤에서 정장을 잡아 뜯었다.
"꺄, 꺄악! 아악!"
서걱-!
날카로운 손톱이 백아영의 몸을 햘퀴면서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 아악... 하윽...."
백아영은 그대로 주저앉으며 피가 줄줄 흐르는 등을 치료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인들이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여기서 끝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죽기 싫었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못 한 게 너무 많았으니까.
백아영의 마음과 다르게 마인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백했을 텐데.'
이제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백아영도 인지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호연이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줄 알았으면, 시도라도 해볼걸.
눈물 한줄기가 백아영의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후회와 슬픔, 고통, 애증 여러 감정이 섞인 눈물이었다.
"죽기 싫어... 호연아."
백아영은 다가오는 마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호연의 이름을 불렀다.
- 끄르륵...
- 성녀... 죽여....
마인들의 손길이 백아영에게 점점 다가왔고, 죽음을 직감한 백아영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밖에서 느껴지는 강한 빛 때문에 밝다고 느낀 것이다.
백아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 끄아아아아아!
자신의 앞에 있던 수십의 마인들이 불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영 씨. 누구 맘대로 죽어요. 내가 있는데."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아영은 고개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대는 여유로운 미소.
하지만 그런 미소와 다르게 이호연은 누가 봐도 다급하게 달려온 듯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구하러 왔어요. 잘했죠?"
두근. 두근.
"...."
이호연의 얼굴을 본 백아영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백아영은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고백을 간신히 참아냈다.
고백이라도 할 걸이라고 후회했지만, 마인들과 싸우는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요. 금방 끝날 테니까."
백아영은 마인들과 싸우는 이호연을 바라보며, 콩닥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좆될뻔 했네.'
거의 모든 결계를 파훼하고 나서야 백아영을 찾아냈다.
파티장내의 결계들을 대부분 내가 역산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사이에 만난 헌터 중 한 명이 백아영을 구석에서 봤다는 정보를 준 덕에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파티장 중앙에서 남은 마인들과 싸우며 남은 결계를 역산하고 있을 거다.
나는 백아영이 있는 구석으로 혼자 달려와서 지원이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마인들을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인의 숫자는 많았지만, 각자의 능력들은 허접했다.
룬의 결계를 역산하면서 마나를 많이 쓰긴 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마나량을 늘린 결과가 여기서 나왔다.
아직까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
화르륵-!
마인들을 불태우며 백아영에게서 떨어뜨린 후, 백아영의 상태를 파악했다.
눈에는 닭똥같은 눈물이 맺혀있었는데, 얼굴은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금방 끝날 테니까."
상처가 크긴 했다. 등 쪽에 옷이 찢겨나가면서 뼈가 보였으니까.
하지만 백아영의 실력이면 저 정도는 괜찮다. 금방 치료할 수 있을 거다.
- 끄륵… 끼끽….
우드득-
내 불꽃으로 순식간에 마인들을 제압했다.
불타는 시체더미들을 보다가 백아영을 챙겼다.
"아영 씨. 괜찮아요? 일단 치료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위험 요소는 거의 배제했다.
백아영을 챙겨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뭐지. 이 뭔가 까먹은 느낌은?
"으응. 호연아, 고마…."
슉-!
두근.
내 사각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카강-!
다행히 빠르게 반응해 코튼 가드로 막아냈지만, 방금 공격의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백아영이었다.
저벅. 저벅.
괴상한 해골 가면을 쓴 괴한이 스산한 검을 든 채 어두운 사각에서 튀어나왔다.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왜 매일 나한테만 이러는데.
단순히 느껴지는 기세부터 아까 허접한 마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긴장감에 몸이 움찔움찔했다.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투 감각이 발동된 것이다.
'이거… 이길 수 있나?'
오랜만에 뜨거워진 전투 감각이 위험하다고 내게 알람을 보내왔다.
피부에 직접 다가오는 따가운 마력과 살기는 지금까지 만났던 적 중에서 가장 강했다.
심지어 나는 백아영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아까 저 해골 가면의 목표는 분명 백아영이었으니까.
이유는 몰라도 백아영을 노리고 있는 거다.
"호, 호연아. 도망쳐. 도망쳐야 해."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백아영도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꼈는지 긴장한 듯했다.
"저 정도면 S급 헌터 수준이야. 목표는 나니까 일단 사람들을 불러오면…."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이… 이건 그런 상황이…."
백아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아마 너무 강한 적을 만났으니 과도하게 긴장했을 거다. 내가 죽을까 봐 겁나기도 할 거고.
지금은 확신을 줘야 한다.
나는 해골 가면과 대치하며 슬쩍 눈을 뒤로 돌렸다.
"어떻게든 살려줄 테니까. 그냥 보고 있어. 백아영."
"ㄴ, 너…."
놀란듯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백아영을 내 등 뒤로 숨기고 해골 가면을 관찰했다.
검을 들고 있는 게 근접해서 싸우는 모양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내 심장은 멈추지 않는 8t 트럭처럼 빠르게 뛰었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주위의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고양감이 올라왔다.
몸 안에 남은 마력은 1/3 정도.
길게 승부를 봐선 승산이 없다.
'누가 판이라도 짜준 것 같네.'
마침 최근에 얻은 스킬도 순간강화 스킬 이다.
주인공에게 이 정도로 판을 깔아주면 해내야지. 그게 주인공이니까.
마지막 남은 마력을 불태우며 몸을 뜨겁게 달궜다.
내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해골 가면도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원래 마인들은 끄륵끄륵 거리면서 자기 힘을 주체를 못 하는데, 저렇게 조용한 걸 보니 확실히 강한 놈이다.
'개안'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눈동자가 해골 가면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파악했다.
관절의 이동 경로부터 마력 흐름까지 파악하면, 어디로 공격이 날아올지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공격에 마력을 담는다면 경로또한 파악할 수 있다.
카가가각---!
순간 해골 가면의 몸이 흐릿해졌다. 나는 동시에 코튼 가드로 온몸을 방어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해골은 내 사지를 노렸지만, 검격은 내 방어막을 때릴 뿐이었다.
해골 가면은 공격이 막힌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참격을 이어갔다.
'가속'
타닥-
캉!
온몸이 찌릿해지는 살기가 느껴졌다.
바람 같은 칼날이 다섯 번.
정확히 내 급소를 노려왔다.
"흐읍…!"
개안을 사용한 채 가속까지 했는데도 전부 피해내지 못했다.
팔뚝을 스쳐 지나간 검격으로 오랜만에 피를 흘렸다.
소름돋는 감각이 팔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나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해골 가면의 틈을 노려 마법을 만들어냈다.
까드드득-!
해골 가면의 발부터 얼음이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마법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해골 가면도 바로 마력을 일으키며 발목 위까지 얼어붙는 걸 막았다.
나도 이걸로 끝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잠시 시간을 끌었다는 점이다.
방금 격돌로 알았다.
해골 가면에게는 신경전 정도였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 정도로 힘의 차이가 심했다.
'이대로 가면 무조건 진다.'
욱신.
몸에 순환하는 마나를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내 마나 회로가 넓어지며, 마나의 출력이 올라갔다.
'블러드 비트.'
마나를 팽창 시켜 마나 회로를 넓히는 스킬이다.
기본 수치는 30% 강화에 1분 지속.
지금은 모자란 수치다.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출력을 더욱 늘렸다.
마나 회로가 억지로 늘어나며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다.
더럽게 아프지만, 참을 수 있다.
[뚜렷한 정신력]은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도 키워주는 모양이다.
진짜 뒤질 것 같은데도 움직일 수 있었다.
'딱 10초다.'
지금 강화는 딱 10초 정도.
10초 동안은 해골가면보다 조금 앞설 수 있다.
짧은 격돌로 또 알아챈 점이 있었다.
해골 가면이 입은 슈트는 불과 얼음 공격에 내성이 있었다.
내 마법이 평소보다 약하게 들어간 게 그 증거다.
불과 얼음에 내성이 있는 옷을 준비했다는 건, 내 마법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점은 오히려 내게 좋게 작용할 수 있다.
나는 숨겨놓은 수가 많거든.
두근.
나는 고통을 참으며 냉기의 마력을 뿜어냈다.
마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은 마법이기에, 냉기가 맞닿은 해골 가면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나보다 강한 해골 가면의 몸을 얼릴 수는 없었기에, 슈트 자체를 얼려버렸다.
움찔움찔 거리는 모습을 보니 저 정도는 금방 풀어내겠지. 얼음 내성도 있으니까.
어차피 내게 남은 시간은 8초뿐이었다.
남은 마력 전부를 오른손에 쏟았다.
어차피 이번 한 방이 안 통하면 끝인데, 굳이 아낄 필요가 없었다.
웅웅-
나선으로 회전하는 바람의 마력이 손 위에서 구의 형태로 뭉쳐졌다.
마력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부었기에, 몸 전체에 피로감이 쏟아지고 눈앞이 빙글 돌았다.
마력 탈진의 전조현상이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해골 가면에게 걸어갔다.
남은 시간 3초.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꽈드드드드득----!
내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스파이럴'이 해골 가면의 심장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해골 가면의 슈트에 걸려있던 얼음 마법이 풀리며 내게 검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그 검이 내게 도달하진 못했다.
검이 내 어깨 부근에서 멈춤과 동시에 해골 가면의 몸이 우뚝 섰다.
- 끄르릅….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해골 가면에게서 옅은 신음소리가 들린 후, 천천히 몸이 무너졌다.
쿵!
해골 가면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절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무릎을 꿇었다.
"호연아!"
머리가 뱅뱅 돈다.
'블러드 비트'의 지속 시간 10초는 이미 끝났고, 내게 남은 건 고통스럽다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만 남았다.
이거 꽤 오래 못 싸우겠는데.
느낌상 후유증이 오래갈 것 같다.
털썩-
내 통제를 벗어난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백아영은 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왜…."
따뜻한 빛이 내 몸을 감싸며 몸의 고통이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마나 탈진으로 인한 탈력감과 블러디 비트의 후유증이 겹친 결과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마나 회로는 아무리 백아영의 치료능력이라도 커버하기가 힘들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면 금방 나아요."
"흐윽…. 흡…."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치료를 하는 백아영을 보며 나는 감사보다 의문을 느꼈다.
'퀘스트 완료가 안 됐어.'
퀘스트 완료 창이 뜨지 않는다.
백아영을 살렸는데도 퀘스트 완료가 뜨지 않는다는 건, 아직 위협이 남았다는 소리다.
삭-!
- 끄르륵….
해골 가면을 상대하기 전에 불태워버린 마인의 시체 사이에서 일어난 마인이 단검 하나를 집어던졌다.
단검을 던짐과 동시에 쓰러지는 게, 지금까지 최대한 힘을 모으다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공격한 모양이다.
"이런 씹…."
아무래도 하나를 제대로 마무리 못 한 것 같은데, 코튼 가드로 막기에는 아예 마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물론 저 가벼운 단검 하나를 맞는다고 백아영이 죽진 않겠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백아영의 몸을 잡아당겼다.
"어?"
그리고 그 무게를 이용해 내 몸과 위치를 바꿨다.
퓨슉-
내 등을 찌른 단검은 다행히 깊게 파고들어 가지 못했다.
"아…."
근데, 존나게 아팠다.
아무래도 독이나 약물 같은 게 묻어있던 것 같다.
전에 오우거한테 일부러 맞았을 때만큼 몸이 찌릿찌릿했다.
[퀘스트 완료!]
좆같은 새끼.
단검을 맞자마자 나오는 퀘스트 완료 창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왜, 왜 나 대신 단검을 맞은 거야."
백아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등에 꽂힌 단검을 보고 더욱 빛을 강하게 내며 힐을 해줬지만, 나는 직감했다.
'아, 이거 기절하겠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이건 더 버틸 수 없다.
"맞아도 위험하지 않았을 거야. 근데 너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