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저도 파티에 참여 하려고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실.
조용한 방안에서 문수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수린은 미뤄뒀던 파티에 참여 신청을 하고 몸을 의자에 눕혔다.
온 몸에 일로 인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원래 지금은 휴식을 즐기다가 일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호연아...."
손에 있는 스마트 워치에선 백아영의 인터뷰가 재생되고 있었다.
문수린은 불안한 듯 몸을 떨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나도 조금만 빨리 움직일 걸...!"
다행히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인식이라는 게 있다.
백아영은 누가 봐도 사귀고 있는 걸 티 내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작 사귀는 게 아니라면.... 성녀님이 내 경쟁자라는 뜻이다.
경쟁자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자신도 노력해야 한다.
문수린은 스마트 워치를 들었다.
음성 녹음 파일에 들어간 문수린은 [이호연 사랑]이라는 파일을 터치했다.
이호연은 만날 때마다 몰래 녹음하고 편집해놓은 결과물이었다.
- 수린 누나... 사랑. 해요. 정말이에요.
높낮이까지 편집해놓은 음성 파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으응... 호연아."
문수린은 이호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경쟁자가 한 발 앞서나가긴 했지만, 아직 괜찮다.
어떻게든 만회하면 된다. 어떻게든.
*
루시루미 쌍둥이와 놀다가 기숙사에 돌아왔다.
오늘 저녁도 당연히 치킨이었다.
"스칼렛."
"네, 호연 님?"
치킨을 열심히 뜯는 릴리아나를 내버려 두고 스칼렛에게 말을 걸었다.
"만약 너한테 바이어 길드의 정보를 빼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괜히 궁금해졌다.
이런 업계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강효린 박사가 남다은의 여동생인 남다희를 구하기로 한 지도 벌써 삼일이 지났다.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영 소식이 없다 보니 내일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으음... 저번에 봤을 때는 방비가 엄청나서 뚫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이럴 때는 길게 보고 접근해야 해요. 예를 들어 위장취업이라든가, 원래 직원으로 변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
"오... 너였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역시 스칼렛은 일 얘기를 할 때 갑자기 똑똑해진다.
"저라면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저런 방식은 의심당하지 않기 위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한국 지부장님이 어떻게 조사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실력이 좋으실테니 정면 돌파를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럼 시간도 단축될거에요."
"너희들은 서로 정보 공유 안 해?"
스칼렛은 같은 길드인데도 나보다 정보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저도 강효린 박사라는 사람이 있는 지도 몰랐거든요.
"흠, 신기하네."
이해는 안 되지만 나름대로 정보 길드의 규칙이 있겠지.
어쨌든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이거다.
스칼렛도 꽤 능력 있는 편이다.
그런데 그 스칼렛이 한 달이나 걸리는 일을 일주일 만에 처리할 수 있을까?
처음엔 걱정이 없었는데 목요일 밤까지도 연락이 없다보니 걱정이 점점 늘어갔다.
"혹시 일을 맡겨놓고 중간에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러 찾아오면 민폐인가?"
"달갑진 않지만... 민폐는 아니에요. 그건 고객의 권리니까요."
오케이.
내일 찾아가 봐야겠다.
재촉하는 진상 손님 같아서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급한 마음이 앞섰다.
"스카웃. 네가 해줄 일이 생각났어!"
우리 대화를 듣던 릴리아나가 갑자기 닭다리를 들고 소리쳤다.
"네? 어떤 일인가요."
"우리 집 주변 치킨집을 돌면서 어디가 제일 위생적인지를 찾아내자. 그럼 거기서만 시키면 되잖아."
"오... 그런 방법도 있군요."
"... 치킨 컨셉은 이제 좀 버리면 안 되냐?"
대체 저걸 언제까지 밀 속셈이지?
하지만 내 바람과 다르게 릴리아나는 진심인 듯 했다.
릴리아나는 스칼렛과 함께 지도를 보며 치킨집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래. 알아서 놀아라.
네가 좋다면 나는 상관없단다. 릴리아나.
"내일 찾아가서 독촉이나 해야지."
남다은은 아직도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었고, 접촉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독촉 밖에 없었다.
그거라도 열심히 해야지.
*
마법 교수들의 연구실이 모여있는 마도관.
그 중 2층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임솔의 연구실에서 백아영과 민예지, 임솔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당연히 백아영이었다.
"너 이호연 생도 좋아하지. 응? 맞지?"
민예지가 백아영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그 얼굴에는 재밌는 일을 찾았다는 미소가 가득했다.
"...."
백아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미 스마트 워치로 오는 연락들은 다 무시하고 있다.
누가 봐도 오해하게 말해놓고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라고 말할 만큼 백아영의 낯짝이 두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쁘지 않은 오해라서 그냥 내버려 뒀다.
"솔아, 너도 얘기 좀 해봐. 응? 대박 사건이잖아!"
민예지는 임솔의 팔을 두드리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하아. 아영아. 왜 그랬어. 이 짐승한테 물어뜯을 먹이를 주면 어떡해."
"미안...."
백아영은 바닥까지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임솔은 그걸 보며 혀를 찼다.
인터뷰를 보고 임솔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됐다.
어제 백아영을 만나러 간다는 이호연에게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파티의 파트너를 하기로 한 건 정말이겠지.
하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닐 거다.
이호연은 별 생각없이 파티에 가기 위해 파트너를 한 거고, 백아영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을거다.
그런데도 어제의 인터뷰는 고의적으로 오해를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 말은, 백아영이 정말 이호연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임솔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거야?"
"...."
임솔까지 질문에 가담하자 백아영도 더 이상 무시할 순 없었다.
"맞지? 28살이나 먹어놓고 20살이랑 사귀려고 하는 거 맞잖아."
민예지는 다시 백아영을 놀리기 시작했고, 백아영도 입을 열었다.
"... 8살 차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와, 솔아. 아영이 말하는 거 봐. 너는 선생님이고 이호연 생도는 제자인데?"
"양호 선생님은 교수 아니야. 직원이야."
"어머, 진짜 푹 빠졌나 보네. 대박."
결국 백아영도 인정했다.
처음으로 남 앞에서 제대로 된 마음을 고백한 것이다.
"하아... 그래. 맞아. 나 호연이 좋아해. 이제 만족하지?"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니까 답답한 마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민예지의 말에 백아영은 온 몸에 털이 곤두섰다.
"솔아. 어떡해. 네 경쟁자가 생긴 모양인데?"
"겨, 경쟁자?"
백아영은 흠칫 놀라며 임솔을 바라봤다.
"경쟁자 아니거든. 아영이 너도 저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해주면 좋아서 계속 하잖아."
"미안...."
백아영은 장난을 치는 민예지를 째려봤고, 민예지는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 상황을 보며 임솔은 고민했다.
'이호연....'
임솔에게 이호연은 아직 귀여운 제자였다.
마법적으로 마음이 통하기도 했고,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마법사기도 했다.
동시에 맛있는 당분 공급원이었다.
"아영아. 내가 확실하게 이호연 생도 꼬시는 법 알려줄까?"
민예지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
"... 뭔데?"
백아영은 민예지에게 기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몸으로 들이대. 20살 남자면 바로 뻑갈걸?"
"...."
"어머, 진짜라니까? 바로 직빵이야."
민예지는 놀림 반 진담 반으로 백아영에게 얘기했지만, 백아영은 시큰둥했다.
'이미 안 통하던데.'
몸으로 넘어왔으면 이렇게 까지 하지도 않았다.
백아영은 '이호연과 만날 때 마다 섹스를 하는 사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참 답답했다.
마음은 고백했지만 육체적 관계까지 말하고싶진 않았으니까.
"솔아. 아영이가 내 말 안 믿어."
"...."
임솔은 진지하게 이호연을 생각하고 있는 백아영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영이한테 들키면 안 되겠네.'
이호연이 연구실에 놀러 올 때 마다 자지를 빨아주는 걸 들킬 순 없다.
물론 그 이유가 연구를 위해 당분을 채워야 한다는 지극히 건전한 이유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100년 정도 일렀다.
그리고 뭐랄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백아영을 보니 가소롭게 느껴졌다.
이미 자신은 이호연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백아영보다 앞서나간 것 같았다.
'애도 아니고 이런 게 기분이 좋다니.'
임솔은 고개를 저으며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드디어 금요일이 되었다.
당장 파티는 내일이 되었는데, 강효린 박사에게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강효린 박사님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오늘 수업은 던전 연구학을 대신 진행하겠습니다."
심지어 수업도 빠진 걸 보면 바쁜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혹시 도망간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성적이 나오자마자 의뢰권을 사용한 건데, 어떻게 더 빨리하겠어.
만약 남다은을 구하지 못한다면 내 잘못보다 저 쪽 잘못이 크다.
애초에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도 다른 작전을 생각했을 테니까.
일단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효린 박사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똑똑-
- 들어오세요.
다행히 안에 사람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아가자 연구실 의자엔 강효린 박사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일의 진행도에 대해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으음… 그래요. 편하게 앉아요."
강효린 박사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괜히 내 불안감은 더 커졌다.
"당장 내일이 파티인데… 괜찮으시죠?"
"… 솔직히 방비가 생각보다 아주 심하더라고요. 겉으로 보기보다 안쪽은 더욱 심해서 시간이 좀 걸릴거에요. 하지만 한국 지부장의 자리를 걸고 뚫어낼 테니 걱정 마세요."
"…."
저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데 태클을 걸 수도 없고 참.
"제가 기간을 너무 짧게 설정한 탓도 있으니… 힘내주세요."
"아니요. 변명하지 않을게요. 제가 상대를 무시했어요. 아무리 뒷배가 강하더라도 순식간에 뚫어낼거라…… 잠시만요."
강효린은 눈을 찌푸리더니 말을 멈추고 스마트 워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 분 정도 조용히 기다리자, 강효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막 남다은 양이 기숙사를 나왔네요."
"지금요?"
며칠 간 기숙사에 박혀있다가 방금 나왔다면, 파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네. 아마 바이어 길드로 가겠죠."
"…."
바이어 길드로 향하면 당연히 길드장과 마주치겠지.
나는 혹시라도 발생할 돌발상황을 생각했다.
박민규가 남다은을 덮치는 일이다.
"이건 기회네요. 남다은 양이 온다면 제가 파고들 틈이 더 커져요. 당장 일을 처리하러 가볼게요. 이번에 한 실수는 일이 끝나고 꼭 보상할테니 걱정마세요."
"그 보상, 지금 추가 의뢰해도 될까요?"
그 전에는 무기력하게 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 한다.
"추가의뢰요?"
"남다은이 혹시라도 폭주해서 바이어 길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남다은을 막아주세요."
어차피 남다은이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할 우려는 없다.
그런 상황이 되면 참지 않고 다 죽여버릴 테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바이어 길드 자체의 힘은 약하다.
남다은 혼자서도 몰살시킬 정도로 세력이 크지 않다.
하지만 바이어 길드에게 일을 맡기고 있는 여러 대형 길드들은 막을 수 없다.
힘의 차원이 다르고, 동원하는 인력도 많다.
보복을 막기 위해선 남다은을 빼내야한다.
"… 원래는 추가 보수가 필요한데, 알겠어요. 그리고 남다희 양을 구하게 되면 제가 숨기면 될까요?"
"어…."
강효린 박사가 숨기면 안전하긴 하겠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힘들다.
게다가 바이어 길드에선 내 존재도 모르고 있다.
남다희가 사라졌다고 날 의심하진 않을 거다.
"아니요. 제 기숙사로 데려와 주세요."
일단 내 주변에 놓는게 좋다. 그리고 스칼렛과 릴리아나도 있으니, 내가 파티에 갈 때도 나름 안전할 거다.
"알겠어요. 연구실에서 나갈 때 문 잘 닫는 거 잊지 마세요."
사삭-
강효린 박사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바닥으로 쑥 하고 들어가 버렸다.
"와우."
저게 강효린의 능력이겠지.
내 앞에서 보여준 걸 보면 정말 엄청나게 급했나 보다.
나도 빨리 돌아가야지.
연구실의 문을 잠그고, 기숙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