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일.
드디어 긴 주말이 끝나고 아카데미에 가는 날이 되었다.
시험도 끝. 축제도 끝.
당분간은 평화로운 아카데미의 일상이다.
물론 내가 평화롭지는 않을 거다.
할 게 워낙 많으니까.
"나 간다. 집 잘 지켜."
"응. 갔다 와~."
릴리아나가 잡던 컨셉은 하루 만에 끝났다.
회인 줄 알았는데 치킨이 배달오자 바로 날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울부짖더라.
그때 상태창을 봤더니 '이건 실패다. 하지만 엄마가 비장의 방법을 알려줄 거야!' 라고 하던데 엄마랑 대체 무슨 연락을 한 거야.
마왕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는데 이상한 걸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한 달에 한 번 뿐인 기회를 낭비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거다.
기숙사를 나와 A클래스를 향해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엄청나게 부담이었다.
솔직히 시선은 익숙해졌지만, 주말 사이에 나에 대한 여론이 너무 시끄러워져서 거짓말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사람 전부가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몇 백명의 시선이 쏟아지는 건 좀 그렇다.
"이야아아~ 유명인 다 됐네. 이호연 씨."
그때 내 옆에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김영한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항상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게 누가 보면 만화 주인공인 줄 알겠어."
"에휴. 놀리려고 왔으면 저리 가라. 힘들다."
"그냥 같이 가자고 온 거지. 오늘 시험 성적 나오는 날인데 기분 풀어.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역사를 바꾸는 날이잖아."
"뭔 개소리야 또."
애는 맨날 어디서 이상한 정보를 주워듣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너랑 다르게 정보를 주는 인맥이 없다고.
"흐으음~. 반응을 보니 진짜 모르나 보네."
"나는 너처럼 인맥이 없거든?"
"관심이 없는 거겠지. 일단 알았어. 강의실이나 가자."
우리 둘은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A클래스로 향했다.
그리고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약속한 듯이 서로의 무리로 갈라졌다. 나와 김영한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다.
강의실 끝에 앉은 루시와 루미는 오랜만에 봐도 참 반가웠다.
"안녕."
"하이하이. 호연이 너 몸은 괜찮아?"
"응. 당연하지."
"호연 씨.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나는 자연스럽게 루시와 루미 사이에 앉았는데, 내 자리 위에 편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건 뭐야?"
앞뒤로 돌려봐도 딱히 표시되어있는 게 없다.
"저희가 왔을 때부터 있었는데 호연 씨한테 주는 거 같아서 내버려 두고 있었어요."
"흠."
생도들의 자리는 자유지만 거의 고정이다.
친한 친구들 끼리 앉아있다보니 자리를 옮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나한테 온 게 맞겠지.
나는 편지를 열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 이호연 님. 점심시간에 혼자 옥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
"진짜네."
근데 왜 옥상으로 오라는 거야? 혹시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봐봐, 뭐래?"
"비밀이야. 비밀."
"칫."
"루시. 남의 편지를 보면 안 되지."
"장난이야 장난. 설마 내가 저것까지 보려고 하겠어?"
표정이 누가 봐도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뭔진 몰라도 점심시간에 옥상에 가봐야겠다.
드르륵-
"오래 쉬어서 그런지 다들 얼굴이 좋군."
강의실의 앞문을 열고 김진혁 교수가 들어왔다.
항상 무표정의 올백 머리 김진혁은 오늘따라 참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테러의 뒤 수습 때문이겠지.
"후우. 오늘 전달 사항은 딱히 없다. 테러에 관한 일들은 추후 제대로 공지할 거고, 특정 생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아카데미 측에서 정보를 모은 후에 확실히 대처할 거다. 그리고 너희들이 기대하는 성적 발표는 오늘 점심시간이다."
"으으...."
"난 엄마한테 죽었다."
성적 발표 소식에 생도들은 죽는소리를 냈다.
나는 슬쩍 구석에 있는 남다은을 바라봤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56 ]
- [ 성욕 : 19 ]
- [ 식욕 : 42 ]
- [ 피로도 : 26 ]
현재 상태 : 1등이 확정되면 다희랑 외출권도 준다고 했는데, 어디로 놀러 가지?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이지만, 몇 번 보다 보니 대충 표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는데, 저건 기분이 좋을 때 짓는 표정이다. 나한테 지갑을 받을 때도 저 표정이었다.
'빨리 점심시간이 됐으면 좋겠네.'
성적 발표도 하고, 누가 날 불렀는지도 보고 싶었다.
오전 수업은 현대 헌터학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강효린 교수입니다. 오랜만이에요."
현대 헌터학 담당인 강효린 박사는 깔끔한 옷차림으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뭔가 진짜 오랜만에 수업을 듣는 것 같네.
그만큼 서바이벌과 축제 기간이 길었다.
무려 2주였으니까.
"아, 수업 전에 공지할 게 있네요. 오전 수업이 끝나면 성적 발표가 나올 텐데, 제가 1학년 담당이니까 성적 관련 문의는 제 연구실로 오시면 돼요. 그럼 수업 시작합시다!"
요즘 공부를 하지 않았더니 모르는 내용이 조금씩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시간 내서 책이라도 읽어야겠다.'
수업을 듣는 것보다 그게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듣는 대신 앞으로 계획을 생각했다.
끄적끄적.
노트에 테러라는 단어를 적었다.
테러 걱정은 당분간 없다. 판데믹은 한 번 테러가 있으면 적어도 한 달은 조용하니까.
무차별 테러처럼 보이더라도 나름대로 기간을 두고 치밀하게 빈틈을 찾는 놈들이다.
그러니까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도 음지에서 살아있는 거지.
다음은 히로인.
볼펜으로 딱딱 소리를 내며 히로인이라는 단어를 쳐다봤다.
'히로인들 공략은 뭐... 나쁘지 않지.'
문수린의 멘탈이나 엘리스의 관음증, 루시의 애매한 공략 같은 문제가 조금 있지만, 충분히 풀어나갈 수 있다.
진짜 걸림돌은 슬슬 가까워지는 여자가 많아지면서 서로를 견제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 써서 공략해야 한다.
단순히 연인 관계가 된다고 해서 공략 끝은 아니니까.
모두를 내 여자로 만드는 일은 모두와 사귀는 거랑은 다르다.
'점심에 날 보자는 내용은 뭐였을까.'
그리고 의문의 편지.
아무리 생각해도 히로인들 중에서 그런 행동을 할 여자는 없다.
히로인인 아니라면 남는 사람은 김영한뿐인데, 역시 그런 일을 할 것 같진 않다.
"흠...."
"왜 그래? 어려워?"
"아무것도 아니야."
수업 도중에 날 바라보는 루시에게 고개를 저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걸 생각해서 뭐 하겠어. 그냥 가보면 알겠지.
설마 학교 안에서 적이 날 노리진 않을 테니까.
*
"저, 저랑 사귀어 주세요!"
"...."
왜 긴장했을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제든지 코튼 가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옥상에 왔는데, 처음 보는 여생도가 내게 하트모양이 박힌 편지지를 내밀었다.
아니, 야겜이라고 고백도 이렇게 해야 해?
진짜 너무 싫은데.
너라면 이름도 모르고 말도 안 해본 남자가 고백하면 사귀어주겠냐고.
도대체 현실을 얼마나 모르면 이런 고백을 하는 걸까.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의 말을 뱉었다.
"… 미안해. 지금은 누굴 만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어, 어째서…."
어째서겠냐고. 네 이름도 모른다니까 나는?
충격을 받아서 고개를 든 여자를 자세히 보니 기억이 나긴 한다.
예전에 루시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다.
언제부턴가 같이 안 놀던데, 왜 갑자기 나한테 고백을 하는 거야.
"루시 그년이랑은 그렇게 잘 지내면서 왜 저랑은 안돼요!"
"...?"
갑자기 루시가 왜 나와.
이런 엑스트라보다는 루시가 당연히 중요하지.
히로인이라 중요한 점은 둘째 치더라도, 루시가 얘보다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크다.
"음, 미안. 루시는 그냥 내 친구고… 내가 아직 누군가를 사귀기엔. 좀…"
"너, 너무해! 흑!"
여생도는 내게 내민 편지를 내팽개치고 즙을 짜면서 옥상에서 내려갔다.
"하아,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
애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렇게 하면 내가 받아주겠냐고.
쯧쯧.
나는 한숨을 쉬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이런 데에 시간을 낭비하느라 쌍둥이와 밥을 따로 먹기로 한 게 후회될 정도였다.
5분도 안 걸려서 끝날 거였으면 그냥 같이 먹자고 할걸.
루시루미 쌍둥이는 오늘 학생 식당에서 간단히 먹고 강의실로 간다고 했으니 벌써 밥을 먹고 있을 거다.
나는 별로 배고프지도 않으니 편의점에서 대충 삼각 김밥을 먹으며 점심을 때웠다.
이제 슬슬 성적 발표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중앙복도로 가봤는데, 성적 발표는 아직인 듯 했다.
터덜터덜 강의실로 왔는데 강의실에서 루시와 아까 내게 고백한 여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 언성이 점점 커지는 게 무슨 다툼이 있는 모양이다.
"너, 너... 지금 말 다 했어!"
루시가 주먹을 꽉 쥐고 여생도를 노려봤다.
"왜? 틀렸어? 그때는 있는 욕 없는 욕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달라붙는 걸 역겹다고 하는 게 잘못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더럽고 추해. 호연이가 착하니까 넘어가 준 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대는 거 보기 싫다고."
"나도 알거든? 애초에 우리 사이에...."
대충 들으면서 상황을 파악해보니 펠릭스가 있을 때의 얘기였다.
'루시가 친한 친구들에게 펠릭스 칭찬을 하며 이호연의 뒷담화을 하고 다녔는데 펠릭스가 마인이라는 게 밝혀지자 어느새 이호연과 친해져서 꼬리를 흔들고 있더라.'
둘의 싸움을 요약하면 저런 행동을 한 루시가 역겹다는 거였는데, 난 당연히 루시가 저런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일부러 싸가지없게 대하기도 했고, 루시는 펠릭스에게 마법이 걸려있었다. 그 상태에서 나를 싫어하도록 호감도가 떨어지는 마법을 한 번 더 걸었으니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사자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와, 진짜야? 루시는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루미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쟤도 원래 인성 쓰레기야."
평소에 루시에게 불만이 많았는지, 여자들을 중심으로 루시에 대한 안 좋은 말이 점점 눈덩이 구르듯 불어나고 있었다.
'막아야 하나?'
아무래도 당사자가 괜찮다고 말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아니면,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둘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그때 루시와 내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주변에서 떠들던 생도들도 나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나서야겠네.
"얘들아. 일단 진정해."
일단 상황을 진정시켜야 한다.
여기서 계속 싸울 순 없으니까.
"호연아, 못 들었어? 얘가 네 뒷담화하고 다녔으면서 지금은 실실 쪼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네 옆에 있잖아!"
루시와 싸우던 여 생도가 내게 소리치듯 얘기했다.
아까 내가 고백을 거절한 여생도다. 아까는 사귀어달라고 얼굴을 붉히고 있더니 왜 이렇게 악에 받친 모습이 된 거지?
그리고 너 아까는 존댓말 했잖아. 왜 애들 앞에선 반말하는거야.
"하아... 네가 뭐길래 우리한테 끼어들어. 이미 나랑 루시랑 화해한 일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말하지 마. 다른 애들도 이상한 얘기 퍼트리지 말아 줘."
루시에게 집중돼있는 시선을 없애야 한다.
사실 루시와 이 일을 직접적으로 얘기하면서 화해한 적은 없다.
그냥 흐지부지하게 넘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생도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나는 루시를 데리고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벌벌 떨고 있던 루미도 데려왔다.
생도들도 내가 직접 나타나 말을 하자 자기 자리로 하나 둘 씩 돌아갔다.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이제 말을 꺼내도 되겠지?
"괜찮아?"
평소와 다르게 텐션이 바닥까지 떨어진 루시와 아직 훌쩍거리고 있는 루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
"...."
둘 다 조용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루시는 그렇다 쳐도 루미는 왜 저러고 있지?
"너희도 저런 말 신경 쓰지 마. 나도 하나도 신경 안 써."
"... 응."
"네. 알겠어요."
쩝. 이걸 어떻게 한담.
미친년 하나 때문에 괜히 분위기만 싸해졌네.
저게 요즘 유행이라는 집착녀인가 뭔가 하는 건가?
나는 쌍둥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90 ]
- [ 성욕 : 34 ]
- [ 식욕 : 36 ]
- [ 피로도 : 85 ]
현재 상태 :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더 확실하게 사과했어야 하는데... 혹시 날 싫어하진 않을까?
★ 히로인 상태창
[루미]
- [ 호감도 : 95 ] (+0.4)
- [ 성욕 : 65 ]
- [ 식욕 : 35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루시... 상처 받으면 어쩌지.
'흠....'
루미는 괜찮을 것 같고, 루시만 조금 달래주면 될 것 같다.
피로도가 85까지 올라간 걸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 호연아."
하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루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그, 그 펠릭스 때는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고... 내가...."
[퀘스트 완료!]
루시가 떠듬떠듬 말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눈앞에 뜬금없는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퀘스트라고? 어떤 퀘스트가....'
그때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깨지못한 퀘스트가 하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