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00화. 1대1 결투 (6)
남다은은 백아영과 메디컬 체크를 끝내고, 대기실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방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왜 그랬지…?'
여동생과 통화를 보여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변덕이었고,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남에게 기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아…."
정적에 휩싸인 대기실에서 남다은은 천장을 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착한 사람이었는데.'
마트에서도 그렇고, 자판기에서도 그렇고 착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번 결승이 끝나고, 성적이 나오면서 조가 바뀌면 끝날 관계겠지.
남다은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1등…."
당연히 이호연도 1등이 하고 싶을거다. 결승까지 올라왔는데 당연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1등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남다은에게는 여동생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아…."
백아영이 눈치를 보며 내 대기실로 들어왔다.
"왜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들어와요? 아영 씨."
"그냥…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결승전 시작까지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물론 빨리 한 번 하려면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도 결승은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하고 싶었다.
"일단 메디컬 체크만 해주세요. 시간이 얼마 없어서 다른 건 못하겠네요."
"응, 알았어…."
백아영은 가벼운 검사를 하나씩 하면서 흘깃흘깃 나를 바라봤다.
딱 봐도 무언갈 원하는 눈치에 나는 괜히 여지를 줘봤다.
"스읍… 몸이 약간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어, 어디가?!"
"아, 착각이네요."
"으응…."
백아영은 시무룩해하며 다시 검사를 이어갔다.
'어이가 없네.'
도대체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 거야.
백아영을 놀려먹으며 메디컬 체크를 마쳤다.
"검사 끝났어. 결승 힘 내."
"고마워요."
날 응원해주는 백아영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있으니 나도 마음이 좀 그랬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87] (+0.4)
- [ 성욕 : 73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결국 안 해주는구나…
"아영 씨. 이번 주말에 봉사하러 갈 거죠?"
"응, 별 일없다면 가야지."
잘됐네. 만날 시간이 애매했는데 보육원에서 만나면 될 것 같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그, 그럴까. 하지만 또 거기서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알았어요. 많이 이상한 짓은 안 할게요."
"응…."
백아영은 그래도 주말에 보자는 말에 시무룩했던 표정을 풀었다.
많이 이상한 짓을 안 한다는 말은 신경도 쓰지 않나보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87] (+0.4)
- [ 성욕 : 73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보육원, 좋았어…! 근데 사진은 안 찍으면 좋겠다….
사진은 진짜 싫어하는구나.
이제 정말 찍지 말아야 하나?
하긴 이제 협박 자료가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알아서 강간당하려고 찾아오는 수준인데 굳이 자료가 필요할까.
[잠시 후, 1학년 1대1 결투 결승전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관람객분들은 착석해주시고, 질서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 이제 선수대기석으로 가봐야 해요."
"응.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네. 주말에 봐요. 아영 씨."
나는 백아영과 인사를 하고 선수 대기석으로 향했다.
[이번 1대1 결투는 1학년의 경기인데도 이례적인 관심이 쏠려있는데요! 그 중심에 있는 생도 두명이 맞붙습니다! 한 번도 실기 성적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남다은 생도와 급부상한 초신성 이호연 생도의 대결입니다!]
오글거리는 말투로 나와 남다은의 커리어를 읊고 있는 해설자의 해설을 들으며 기다리다 보니, 스태프가 다가왔다.
"이제 올라가시면 돼요."
"네엡."
대련장에 올라가는 길에는 결승인 만큼 관람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는 남다은의 모습도 보였다.
관람객들의 함성 소리와 커다란 해설을 들으며 대련장에 섰다.
스르륵-
마력 방벽이 올라오며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앞에 서 있던 남다은도 나와 눈을 마주쳤다.
"힘내라."
"응. 꼭 1등 할게."
남다은은 내 응원에 웃으며 답해줬다.
[5, 4, 3, 2, 1, 시작!]
시작 신호가 울리고도 우리는 서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다은은 모든 경기에서 선공을 가져갔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운영하려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마력을 끌어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혈액이 온몸을 순환하는 게 느껴졌다.
남다은도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자 검을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잠시만.
두근. 두근. 두근.
남다은이 전투태세를 갖추자마자, 내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 이 정도라고?
펠릭스를 상대했을 때보다 빨랐고, 오우거를 마주쳤을 때보다 무거웠다.
익숙해진 줄 알았던 전투 감각이 아직 모자라다는 듯 내 몸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느려진 듯 급격히 감각이 예민해지고, 온몸이 전투를 위해 가다듬어졌다.
"… 기권을 하니 마니 할 문제가 아니었네."
남다은은,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 중 가장 강했다.
*
'강해.'
남다은은 눈이 금색으로 물든 이호연를 보며 생각했다.
평범한 생도들과는 격이 다르다.
확실히 이기려면, 힘을 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판단을 마친 남다은은 검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아직 어디서도 공개한 적이 없는 스킬.
[공간 지배]
남다은의 권능 [공간 지배]를 그대로 표현한 고유 스킬이다.
대련장 내부에 마력을 퍼트렸다.
이 공간 안에서라면, 남다은에게 더이상 거리는 무의미했다.
'빠르게 끝내는 게 나아.'
남다은을 중심으로 일렁거리는 공간과 검에 맺혀있는 자줏빛 기운.
원작 게임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아온, '공간참'의 준비태세에 이호연의 입이 벌어졌다.
'아니, 공간참이 가능하다고?'
남다은이 숨겨놓은 힘을 드러냈다.
내 전투 감각의 기세를 읽고 빠르게 승부를 보려는 속셈이다. 길게 전투를 끌고 나갔다가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걸 막고 싶은 모양이다.
'그만큼 날 인정하는 건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애초에 힘을 얼마나 숨기고 있었던 건지 감도 안 잡힌다.
공간참은 스토리 중후반부에 나오는 스킬이다.
즉 1학년 말이나 2학년 초, 남다은에게 실기 1등을 뺏을 무렵에 등장하는 기술인데 벌써부터 익히고 있었다.
이호연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숨을 고르며 공격에 대비했다.
[공간 지배]는 말도 안 되는 효과를 가진 만큼 마력 소모가 매우 큰 스킬이다.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이쪽이었다.
한편,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남다은의 장기였다. 남다은의 속도와 파괴력을 마법사들은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호연은 보통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했다. 자신의 [공간 가속]과 비슷한 스킬을 사용하며 마법사답지 않은 민첩함을 보였고, 쉴드 마법은 이상할 정도로 단단했다.
남다은은 이호연의 틈을 노리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이호연은 남다은의 움직임을 대비해 방어적인 포지션을 취했다.
틈을 보며 남다은에게 견제용 화염구를 날린 그 순간.
남다은이 검이 이호연에게 쇄도했다
파앙-!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다은의 움직임에 반응한 이호연은 코튼 가드를 펼치면서 검을 막아내고 역으로 마법들을 발동시켰다.
지면에서 솟구치는 불꽃 기둥과 허공에서 터지는 폭발에 남다은은 뒤로 물러서며 태세를 정비했다.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호연은 당황하지 않고 마법을 이어갔다.
수많은 화염구와 화염창이 남다은을 향해 쏘아졌다.
'아직 공간참을 쓸 생각은 없는 건가.'
남다은은 이호연의 생각을 유도하고 있었다.
남다은에게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다고 확신하는 그 시점에, 공간참으로 끝내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호연은 공간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블 캐스팅의 한 자리는 언제든지 방어할 수 있도록 남겨놓았다.
남다은도 생각보다 틈을 주지 않는 이호연에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호연은 더블 캐스팅이 가능해. 어째서 마법을 하나만 사용하는 거지?'
확실히 이기기 위해 계속 틈을 보던 남다은이지만, 이호연은 도통 틈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걸 파악한 듯했다.
그렇다고 다가가려고 하면 거리를 벌리며 마법을 쏘아댔고, 억지로 뚫어내자니 이호연도 순간 가속 류 스킬을 가지고 있어 역습이 부담이었다.
'어쩔 수 없어. 뚫어내야 해.'
[공간 지배]의 사용이 더 길어지면 공간참을 사용할 기회가 적어진다
공간참은 확실할 때 사용하면 무조건 승리가 보장되는 수였다.
그렇다면 틈을 만들어내면 될 일.
더블 캐스팅을 하지 않고선 못 버틸 만큼의 공세를 펼치면 된다.
남다은은 날아오는 이호연의 화염구를 절반으로 가르며 그사이로 뛰어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남다은의 검격을 막아내며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여유롭던 남다은이 이렇게 공세를 펼친다는 건 슬슬 부담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호연으로서도 마력량이 부담이 되고 있지만, 남다은은 그걸 모르고 있다.
불리한 건 다급한 남다은이었고, 저렇게 억지로 다가온다면 이호연에게도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시도해봐야겠지만… 통할 것 같아.'
남다은은 전투 내내 이호연의 '가속'과 '스파이럴'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범한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과 다르게 역습을 대비하고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스킬이라면 남다은도 대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남다은과 공방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