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97화. 1대1 결투 (3)
[곧 8강이 시작됩니다. 관람객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하나 보네. 나도 가볼게. 본선 열심히 해."
"네. 감사합니다. 오늘 시험 다 끝나고 연구실로 찾아갈게요."
"응. 알았어."
곧 시작한다는 방송에 임솔은 관람석으로 돌아갔다.
마법 연구 얘기를 열심히 하다보니 오늘 연구실로 찾아간다는 약속까지 해버렸다.
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이제 몇 경기 남지 않았다.
8강에서 4경기를 하고, 준결승전 이후에 바로 결승전이다.
아마 8강을 진행하고 점심시간 이후에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진행될 거다.
[첫 번째 경기는 A클래스의 김영한 생도와 A클래스의 정연주 생도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시죠!]
첫 경기는 김영한이었다.
다음 경기가 내 경기니까, 저기서 김영한이 이기면 준결승에서 나랑 붙게 된다.
16강에서는 상대가 약하다 보니 김영한의 능력을 보질 못했는데, 이번에는 좀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경기가 진행되고, 김영한은 특이한 스킬을 사용했다.
들고 있는 검에 가시가 돋아나며 정연주라는 여자를 결투 내내 압도했다.
"검이 엄청나게 멋있긴 한데… 뭔가 느낌이 없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상위권 생도 느낌이었다.
평범한 생도들 중에서는 강한 편이지만, 남다은이나 엘리스같은 최상위권과는 결이 다르다.
'저 정도면 내가 쉽게 이기겠는데?'
걱정을 덜어내고 내 경기를 준비했다.
김영한의 경기가 끝나면 10분 정도 쉬고 바로 내 경기로 들어가니, 슬슬 몸을 풀고 선수 대기석으로 가야 한다.
똑 똑 똑.
"이호연 생도님. 경기 준비하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타이밍 맞게 스태프가 날 데리러 왔다.
나는 다음 경기를 위해 스태프를 따라 선수 대기석으로 이동했다.
[경기 끝! 승자는 A 클래스 김영한 생도입니다!]
김영한의 무난한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그리고 이제 다음 경기가 난데…
"하필 상대가 이 새끼네."
대진표에는 도진혁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요즈음 내가 너무 유명해져서 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진 않지만, 예전에 쓸데없이 부딪혀오던 A클래스의 망나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척하면서 여자나 꼬시려고 했는데, 하필 여기서 만나버렸다.
이기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냥 불편하고 귀찮았다.
"이호연 생도. 이제 경기 들어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벌써 10분이 다 지났네.
나는 결투를 위해 대련장으로 향했다.
[다음 경기느으은! A클래스 이호연 생도와 A클래스 도진혁 생도의 결투가 있겠습니다! 두 명 모두 엄청난 유망주인데요. 굉장히 기대가 되는 경기입니다!]
분위기를 띄우는 사회자의 언변과 관람객들의 함성이 합쳐져 귀가 웅웅 울렸다.
나는 1학년 생도석을 둘러보며 루미를 찾아서 손을 흔들어줬다.
루미는 살짝 손을 들고 흔들다가 주변의 시선에 다시 몸을 움츠렸다.
VIP석에서도 교수들이 모여있는 곳을 둘러보자 임솔의 얼굴이 보였다.
임솔에게도 손을 흔들어줬다. 임솔은 나를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 앉아있던 고양이상의 미인이 더 신나서 양손을 흔들며 내게 인사해왔다.
"저 사람은 누구야?"
예쁘긴 한데 처음 보는 사람이다.
임솔이 옆을 보며 뭐라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워낙 멀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차피 이제 대련장에 올라가야 했으니, 고개를 돌리고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내 앞에는 도진혁이 서 있었다.
역시나 내게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요즘 유명해졌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쳐부숴줄테니."
"…."
얘는 왜 이럴까.
생각해보면 내가 얘한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잘 나가는 내가 아니꼽나?
원작에서는 실력도 없는 게 A클래스로 올라왔다고 시비를 걸지만, 나는 처음부터 A클래스였잖아.
"야, 너 나 싫어하지?"
"그래. 싫다."
해설자가 나와 도진혁의 활약상과 승자 예측같은 걸 떠드는 동안, 도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왜 싫어하는데? 내가 너한테 피해를 주길 했냐? 아니면 네 욕을 하고 다니길 했냐? 다 네가 한 거잖아."
도진혁은 침묵했다.
"혹시 별 이유 없이 나에 대한 증오가 막 올라오고 그래? 얼굴만 봐도 죽이고 싶고 그러냐?"
"… 부정하지 않겠다. 네 얼굴을 볼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도저히 못 참을 만큼."
"흠."
저 반응을 보니 진심 같은데.
진짜 악역으로 설정돼서 그런 건가?
도진혁은 원작에서 악역이다.
그렇기에 스토리가 비틀어진 지금도 내게 악역이 되야하는 운명인 것이다.
가장 공략하기 쉬운 히로인인 문수린이 나를 보기만 해도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처럼, 얘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방향이 다를 뿐.
[1대1 결투 8강전 두 번째 경기,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커리어들을 열심히 읊고 계시던 해설자님의 말이 끝나고, 결투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그래. 열심히 해봐."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서 얘를 구원해줄 생각은 없다.
그냥 압도적으로 처바르다 보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알아서 숨겠지.
[5, 4, 3, 2, 1. 결투 시작!]
도진혁의 몸에서 마력이 치솟았다.
유형화한 마력이 도진혁의 몸을 감싸며 전신에 쉴드를 두른 형태로 변했다.
엄청난 방어력과 육체 능력으로 실행하는 육탄전이 저놈의 특기였다.
발에 힘을 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도진혁의 속도는 꽤 빨랐지만, 예측하기 쉬웠다.
두근.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그래도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도진혁이라 전투 감각이 조금은 반응했다.
'개안'
나도 전투태세를 갖추며 도진혁을 마주했다.
빨리 끝내주는 게 격의 차이를 보여주기 좋겠지.
화염구들을 소환하며 내게 다가오는 도진혁을 견제했다.
도진혁도 나름대로 화염구를 피하며 내게 다가와 주먹을 날렸지만,
쿵!
오우거도 뚫지 못한 내 코튼 가드를 도진혁 따위가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윽!"
오히려 공격한 도진혁이 반동에 당황할 정도였다.
화르륵-!
반동에 밀려난 도진혁을 공격해봤지만, 확실히 방어력 하나는 엄청났다.
온몸을 두르고 있는 일렁거리는 마력이 쉴드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예 약한 놈은 아니야.'
하지만 저런 방어력만 높은 놈을 상대하기 딱 좋은 스킬이 있었다.
나는 몸 주변의 마력을 가속하며 역습을 준비했다.
도진혁도 이상함을 인지하고 내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준비는 끝났다.
내게 뻗어오는 오른 주먹의 궤도를 읽고 고개를 숙이며 동시에 도진혁의 눈에 약한 불꽃을 터트렸다.
"크읏!"
사람은 순간적으로 눈이 부시면 뒤로 빠지게 되어있다.
'가속'을 이용해 도진혁을 따라가며, 손에 나선의 마력을 응축시켰다.
도진혁은 무너진 신체 밸런스를 되돌리기 위해 억지로 몸을 비틀었지만, 더블 캐스팅으로 도진혁의 뒤에 불꽃 기둥을 소환했다.
당황한 도진혁이 뒤로 빠지던 몸을 강제로 아래로 숙였다.
아예 굴러서 자리를 피할 생각인 것이다.
자신의 방어력을 믿고 한 번만 버틸 생각이었나 본데, 내 '스파이럴'은 오우거의 방어력도 뚫어냈다.
"끄아아악!"
몸을 피하던 도진혁의 등에 스파이럴을 내리꽂았고, 그 충격으로 한 번에 세이프티 설정이 발동되었다.
만약 마력 필드 안이 아니었다면 즉사할 정도의 충격이란 뜻이다.
[경기 끝! 승자는 A 클래스 이호연 생도입니다!]
심판의 판정이 떨어지며 내 승리를 확정 지었고, 신이 난 사회자는 분위기를 띄웠다.
곧 대련장의 마나방벽이 사라지고, 관람석의 함성이 내 귀를 때렸다.
"와아아아-!"
"이호연! 이호연!"
슬쩍 VIP석을 보니 임솔 교수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교수님, 제자가 이렇게 강합니다.'
이게 뭐라고 괜히 자랑스럽네.
도진혁은 아직도 쓰러져있었다.
신체에 피해가 없더라도 고통은 그대로 전해지니, 등이 찢어지는 고통을 그대로 느꼈을 거다.
좀 불쌍하긴 하다.
"… 그니까 왜 덤볐어 인마. 쯧쯧."
들것에 실려 나가는 도진혁을 보며 혀를 차 줬다.
*
대련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는 관람석과 달리, VIP석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방금 이호연이 보여준 대련은, 난다긴다하는 VIP들도 입을 다물게 할 수준이었다.
"마지막 마법은 뭐지…? 고유 스킬인 것 같은데, 파괴력이 저게 말이 돼?"
"이제 1학년인 생도의 마나 운용이 아니야…! 저렇게 정밀하게 마나를 응축시킬 수 있는 건 둘째치고, 그 과정에서 손실되는 마나가 하나도 없잖아!"
"순간적으로 몸이 빨라지는 스킬도 있었어. 그것도 고유 스킬 같은데."
한 명이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들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경기 자체는 길지 않았다.
도진혁이 이호연에게 달려들었다가 막히고, 다시 달려들었다가 역습을 당하며 끝.
20초 남짓한 경기였지만 이호연은 그사이에 엄청난 실력을 보여줬다.
"그때 내가 시킨 접촉은 잘 되어가? 뭐? 답장을 안 해줘? 그럼 찾아가서 빌기라도 해 이 새끼야!"
"공식적으로 뒤를 봐주는 길드가 없는데 저 정도의 실력이면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예.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다은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남다은의 실력보다 압도적입니다!"
스카우트들은 길드에 연락하기 바빴고, 길드 장들은 스카우트들을 닦달했다.
이 상황에서 이호연에게 놀란 건 임솔과 민예지도 다르지 않았다.
"… 솔아. 미안한데 사업적으로 말고 길드 영입 건으로는 연락해도 되지?"
"… 마음대로 해."
임솔은 처음 본 제자의 전투력에 놀란 상태였다.
자신이 20살 때보다 강하다.
괴물이라고 불리며 온갖 시기와 질투를 다 받던 그때보다도 제자는 더욱더 강했다.
물론 임솔이 괴물이라고 불리던 건 전투력뿐만 아니라 어떤 마법이든 순식간에 이해해버리는 이해력이 컸지만, 이호연의 마법 재능 역시 임솔과 맞먹었다.
"와, 그나저나 저런 인재를 어떻게 알아본 거야? 솔이 네가 진짜 마법 쪽은 꽉 잡고 있구나."
"내가 지켜줘야 해."
"응? 뭐를?"
제자가 불가사리보다 못한 인간들에게 방해받고 견제받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 한다.
임솔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호연도 걷게 만들기 싫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으음,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이호연 생도가 대답해주려나…."
민예지는 바뀐 임솔의 분위기를 읽자마자 임솔에게 관심을 껐다.
저럴 때 건드리면 안된다는 걸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
"강해…."
다음 경기를 위해 선수 대기석에서 기다리던 엘리스는, 이호연의 경기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호연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강한 상대였다.
"선천적 마력 장애가 있는데도 저렇게 마나를 다루다니, 무슨 방법을 쓴 거지?"
아무리 마석으로 마나를 충당해도, 한 번에 많은 마나를 사용하는 건 부담이 된다.
그런데 이호연은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고급 스킬들을 연달아 사용했다.
저 쉴드도 평범한 쉴드 마법이 아니었고, 몸을 빨라지게 하는 스킬과 마력을 응축시킨 공격 스킬은 당연히 엄청나게 소모가 큰 스킬들일 텐데.
이호연은 마력 장애가 없는 것처럼 마법을 사용했다.
"무언가 비밀이 있어."
집히는 곳은 있었다.
최고급 마석. 혹은 성녀.
둘 중 하나가 선천적 마력 장애를 완화한 게 분명하다.
"최고급 마석에 내가 모르는 활용처가 있었나…?"
최고급 마석을 연구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엘리스의 마력 장애를 고치기 위해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엄청난 돈을 투자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나온 결과가 중하급 마석을 사용하는 거였다.
그리고 성녀에게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협회에 돈만 내면 성녀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성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선천적인 병은 내 치유 마법으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성녀는 잊고 있었는데, 어쩌면 최근에야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성녀랑은 나중에 접촉하면 되고… 최고급 마석도 다시 연구해봐야 하나…."
엘리스는 세바스 찬에게 최고급 마석에 대해 연구했던 내용을 보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리자, 이호연은 관람석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예의도 바르네…."
엘리스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호연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