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삼왕
* * *
우리는 전후처리로 한참을 바쁘게 보냈다.
무신 혁월과 전대 요정왕 오베론을 물리친 것보다 더 바쁘게.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고, 신성력으로 그들의 신체를 재생시켜 줬다.
다만, 벌레에게 신체를 반쯤 파먹혀서 정신에 이상이 생긴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
“으악! 바퀴, 바퀴벌레 떼가 내 몸을 먹어치우고 있어!”
“진정해! 벌레는 모두 죽었어! 젠장, 마법사가 화염구를 쓰고 있다! 전사 놈들 뭐하나! 놈을 듀얼로 구속해!”
근처에 벌레만 지나가도 불로 태워서 난리를 버리니.
‘그럴만하긴 한데.’
바퀴한테 온몸이 갉아 먹히다니. 비위가 상했다.
“시, 시우야, 괜찮아?”
윤승하가 나를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적당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몸을 움직였다.
감각을 활성화한다. 땅 바로 위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 위에 건물이 있으면 염력으로 건물을 띄운다.
“와, 엄청 정교하네. 저런 거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위험할 수 있는데.”
윤승하가 옆에서 말하면서 정령들을 소환했다. 윤승하의 품에서 냐옹하고 우는 보라돌이가 중력의 힘으로 건물을 드는 것을 도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감사를 표했다. 적당히 고개를 숙인 뒤, 아이와 여성을 일으키고 근처에 있는 영웅을 불러 피난처로 안내했다.
나는 한 번 더 훑어봤지만, 이 근처에 인기척은 없었다. 전부 피난 갔거나, 전부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
“이제 거의 끝인가?”
“응. 우리가 맡은 구역은 여기가 끝이야.”
눈의 힘을 주고 먼 곳을 쭉둘러봤다. 다른 곳의 상황도 정리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쉬고 있을래? 아직 정리 안된 곳에 갈려 하는데.”
“다른데에 갈려고? 나도 갈게.”
“괜찮아. 계속 전투만 해서 힘들잖아. 조금 쉬고 있어.”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투에 피로가 쌓여있었던 건지 윤승하는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하를 쉬게 두고, 나는 나머지 사람들을 도우려고 떠났다.
***
밤.
우리 일행은 근처 호텔로 왔다. 미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 그런지 서비스도 좋았다.
나는 호텔 라운지를 잠깐 구경하다가 윤채린에게 갔다.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하이 웨스트 반바지를 입은 윤채린.
“올, 뭐야. 오늘은 동생 안 놀아줘?”
“승하는 피곤하잖아. 중간에 계속해서 정령 소환하던데.”
“나도 피곤하거든.”
윤채린이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래도 곯아떨어지지는 않았잖아.”
“그렇기는 하지. 평소에 승하가 단련을 안 해서 그래.”
나는 어처구니없어했다.
그치만 윤채린 입장에서 맞는 말이기도 하다. 윤승하는 뭐든 곧잘 배워서. 단련에 투자를 크게 쏟지 않는다. 그래서 기초 체력이 부족하다.
“그것보다.”
윤채린이 팔을 뒤로 넘기고는 머리를 올렸다.
“어때?”
윤채린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뻐. 평소보다 더.”
“어허. 영혼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예뻐.”
“푸핫.”
윤채린이 밝게 웃었다.
“그럼 데이트 갈래?”
“데이트? 그럴까?”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럼 잽싸게 한국에 갔다가 올까? 미국은 지금 좀 그러니까.”
“그러자.”
미국은 오베론과 혁월이 치른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뉴스에서는 종일 도시 하나가 괴멸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미국의 대통령은 마인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고 더 원을 앞세우며 마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나와 윤채린은 근처에 워프 게이트를 통해서 몰래 한국으로 왔다.
서울은 너무 눈에 띄니까 근처 지방에 내려갔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퐁탄시티.”
“야…….”
윤채린의 난데없는 공격에 나는 당황했다.
그래도 그 뒤는 순탄했다. 평범하게 로맨스 영화를 보고.
“흑흑, 저 나쁜 자식. 어떻게 남자가 돼서 여자를 버릴 수 있지? 여자는 거기다가 다른 남자 잡아서 헤어진 남자의 자식을 그 남자에게 키우게 하다니.”
“남자가 쓰레기네.”
조금 찔리는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보고 난 뒤, 근처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했다.
“여기 A코스로 두 개 주세요.”
“계산은 내가 할게. 학생회 경비로 하면 되거든.”
내가 본거지로 있는 곳에 횡령을 두 눈으로 목격했거나.
아무튼 재밌었다. 카페에서 평범하게 수다를 떨고, 빙수 집에 가서 오래오 빙수를 시켜먹고 다시 미국으로 가는 길.
“아, 아쉽다.”
“그러게.”
“근데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네. 진작 이렇게 놀걸.”
“……네가 자꾸 꼬셔서 그렇게 된 거잖아.”
“아니, 근데 내가 자꾸 스킨쉽을 해서 그렇게 된거잖아. 맨날 막, 허리 만지고 손가락 음란하게 만지면서.”
윤채린이 샐쭉한 눈으로 나를 봤다.
화재를 돌려야 했다.
“사진 찍을래?
“사진? 좋지. 이 누님을 예쁘게 찍어봐.”
윤채린이 브이자를 그리며 얼굴에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는 반대 쪽 손은 하이웨스트 청바지에 손을 올렸다.
“어때? 잘 찍혔어?”
“어. 엄청 예쁘게 나왔네.”
평소의 윤채린이라기보다는.
윤채린의 엔딩에서 볼법한, 미래의 윤채린이 섞인 느낌이었다.
발랄하면서도, 뭐든지 받아줄 것 같은 상냥함이 반반 섞여 있는 표정.
“헐.”
윤채린은 사진을 보고 입을 막았다.
“후, 이시우. 항상 감사해라.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애인 중 하나로 둘 수 있다는 것을.”
“고맙다.”
“그럼 슬슬 갈까?”
“그러자.”
나는 워프게이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다가 윤채린한테 제지당했다.
“거기 말고.”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호텔이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는 곳을.
“…….”
“원래 데이트의 끝은 이런 거야.”
나는 얌전히 윤채린에게 끌려갔다.
***
다음 날.
“…….”
나는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A++로 올랐던 변강쇠가 다시 A+로 내려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억울했다. 지금에서야 변강쇠의 진화 특성인 색즉시공이 없어도 괜찮기는 하지만…….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여왕님께서 요정왕 님을 호출했습니다.”
“그래?”
“네. 다른 왕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럼 바로 가야겠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란데힐이 내 쪽으로 와서 옷깃을 여며 줬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수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세계수의 안으로 가면서 나는 그란데힐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같이 고요하지만, 그 안에 자그마한 불안함이 느껴졌다.
‘왜지?’
왠지 덩달아 불안해졌다. 세계수의 안쪽으로 향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응. 있다 봐.”
“…………예.”
굉장히 긴 공백.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러는 걸까.
문을 여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하메르, 에니스, 티타니아.
“어서와~.”
“왔군.”
“……하아.”
에니스, 하메르, 티타니아 순서로 반응이었다.
하메르는 평소에는 나른한 표정을 지었는데, 지금은 뭔가 긴장한 느낌이었다.
에니스는 뭔가 흥미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고.
티타니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무심코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왜……?’
나는 다시 한번 티타니아와 에니스, 하메르를 봤다.
감각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지난 시간, 우리는 회의를 거쳤다.”
“응. 요정왕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서 말이야~.”
에니스가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우리도 걱정을 좀 했다. 혹시 그대가 우리를 싫어하지 않을까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대의 지난 행적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안심했지 뭐야~.”
감각이 시뻘건 신호등처럼 경종을 울려댔다.
“그리고 그 회의는 오베론을 치기 전에 결정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대가 너무 뛰어난 탓에 결정된 일이지.”
티타니아가 한숨을 푹쉬었다.
그러나 천의 가면에 비친 그녀의 감정은 묘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티타니아의 성벽이 뭐였지.’
티타니아와 관계를 맺을 때, 다른 여자와 성관계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흥분해야 할 일은 지금 없어야 했다.
에니스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분홍빛 가득한 눈으로 나를 봤다.
하메르를 봤다.
긴장하면서도 핑크빛 감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티타니아를 봤다.
새까만.
그러면서도 분홍빛의 감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갑자기…….”
“어떤 중요한 일이길래. 인류의 미래 전체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 그럼 취소해.”
에니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신의는 세계가 안정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 그대의 헌신은 세계가 기억할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이번으로 죽을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대가 가진 공허는, 이곳에 있는 삼왕만이 품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티타니아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보이드 드래곤이란, 최강의 용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공허족이 최초로 공허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하는 거야~. 공허족의 아버지가 되는거지.”
‘어떻게 하지.’
티타니아와의 섹스.
지금까지 내가 졌지만, 미국에 오기 전에.
티타니아와 그란데힐을 상대하면서 티타니아의 약점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아니 확실하게. 다음에 티타니아와 한다면 내 승리를 점칠 수 있다.
그러니 티타니아와의 섹스가 내가 불리하다라는 소리는 되지 않는다.
‘근데 세 명이란 말이지.’
세명.
세명이다.
티타니아를 이제 겨우겨우 이길 수준에서 티타니아 급의 여자가 세명이 덤볐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이기냐 지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베론과 혁월 조차도 나에게 이런 긴장감을 주지 못했는데.
나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떠올렸지만.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