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원영신(3)
* * *
나는 나른하게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 원념같은 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원영신의 권능 중 하나. 상대의 목숨을 거둘 때 상대의 힘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신의 힘을 거절했다.
‘원영신의 힘이 탁해질 위험이 있지.’
상대를 죽이면 강해지지만, 순수한 힘이 변질한다. 내 상태에서 굳이 무신의 힘을 탐낼 이유도 없고.
조용히 몸을 관조했다. 태산을 무너트릴 근력이 느껴졌다. 수 킬로미터를 한순간에 돌파할 속도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상격이었다.
나같은 케이스는 굉장히 특이하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존재해서도 안 된다. 원영신의 상태가 되어서 알 수 있었다.
공허.
이 힘은 대단히 위험한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은 내 예상 밖에서 나온 힘이었다.
뇌신, 허뢰, 신염.
그리고 생명의 마나.
이것들을 합쳐서 공허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위의 것을 융합해서 만든 힘은 정확하게는 ‘통로’였다.
천수, 천의 가면, 지식열람.
그리고 유아독존.
세개의 특성과 고유 능력에서 끄집어지는 힘을 이끌어내는 통로.
애초에 원영신의 힘도 필요 없었다. 바닥날 때까지, 힘을 썼다면 통로로 공허의 힘이 왔을 테니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티타니아, 에니스, 하메르가 보였다.
에니스와 하메르는 전후처리를 위해서 도시 쪽으로 날아갔다. 티타니아가 내 쪽으로 오려고 해서 막았다.
지금은 전후처리에 집중하자.
……알겠다.
티타니아가 가진 동화.
세계수와 연결되어서 사용하는 생명의 마나는 위급한 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삼왕은 돌려보냈다.
비염 옆에 윤채린이 보였다.
“……뭐야, 너 언제 그리 강해졌냐.”
윤채린이 눈을 좁히며 나를 바라봤다.
“보이는 걸로는 아직도 상격으로 보이는데…….”
“상격 맞아.”
“진짜? 아직도 최상격에 못 올랐다고?”
“어.”
아직은 상격이 맞다.
나는 공허라는 힘을 얻고, 여러가지 능력들이 나를 보조하고 있으니까.
다른 특성들 때문에 수십 개의 특성을 고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초월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원영신 같은 게 있었다.
일종의 편법에 불과했다.
평평한 바위에 주저앉았다. 힘이 빠진 것은 아니다. 그냥 진이 빠졌다고 해야 되나.
‘운이 좋았다.’
마치 누군가가 짜 놓은 것처럼.
엘도르가 나타났고, 마왕의 힘을 가진 구체를 본 순간 원영신을 각성했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없었어도 삼왕이 있던 덕분에 괜찮았겠지만.
짐작가는 것은 대충 둘.
‘천신이거나. 혹은……이시우거나.’
내가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윤채린이 내 옆에 앉았다.
“지쳤냐. 지쳤으면 여친 어깨에 좀 기대던가.”
나는 사양하지 않고 윤채린의 어깨에 기대었다. 말랑말랑한 피부가 머리에 느껴졌다. 풋풋한 백합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얘 이렇게 지친 것도 또 처음 보네. 가슴 만질래?”
윤채린이 가슴을 내밀었다. 만질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네.”
신기한 어투로 말하면서. 흐뭇한 감정과 사랑스럽다는 듯한 손길로 내 머리를 만졌다.
그렇게 있기를 잠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됐냐?”
아쉬운 목소리가 담겼다.
“응. 고마워.”
“고맙긴 무슨.”
윤채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피식 웃었다.
“그런데 최상격은 언제 될 거야. 빨리 안 따라오면 먼저 올라간다?”
“얌마. 지금 내 나이에 상격이면 여기저기서 침을 질질 흘릴 유망주거든?”
“그래도 나보다 약하잖아.”
“너는 내 남자니까 괜찮아. 밤에는 내가 더 세잖아.”
나는 어처구니 없어서 웃었다. 밤에는 자기가 더 강하다고?
“얌마. 그때는 내가 봐준 거야. 그, 뭐냐. 남자는 여자한테 빨리 간다고 하면, 자신감이 뚝 떨어져서, 봐준 거거든!”
윤채린이 박박 우기기 시작했다. 봐준다는 게 보빨했다고 기절할 수 있는 거였나.
그래도 이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윤채린 덕분에 정신이 꽤 괜찮아졌으니까.
“이제 가도 돼. 나는 남은 정리를 해야 돼서.”
“정리?”
“응, 정리.”
윤채린을 보내고.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 이시우
근력 : 65
민첩 : 65
체력 : 65
마력 : 60
고유능력 : 천상천하 유아독존(Ex)
특성 : 지식 열람(S+), 천수(S+), 천의 가면(S+), 오버로드·개(S+), 태극지체·극(S+), 하늘을 굽어보는 눈(S), 불가해한 감각(S), 대신관(S), 변강쇠(A++), 성검의 주인(A+), ■■(C)
오른 스텟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특성 부분이 변한 게 있었다.
변강쇠에 +부호가 하나 더 붙었다. 곧 진화할 거라는 징조였다.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게 아니었는데.’
아니, 시간상으로는 1년이 걸렸으니, 오래 걸린 것도 아닌가.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렸다.
그리고.
“정숙한 처녀.”
이곳에 존재할 리 없는 존재를 불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지?
마치 정숙한 처녀와 내가 무엇인가로 이어져 있는 듯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무신이 죽기 전에 어렴풋하게 들렸던 목소리였다.
“무신이 마지막에 사도라고 했었지. 너는.”
맞아. 나는 지금 네 사도가 되었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정숙한 처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제 마왕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건가?”
맞아.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정숙한 처녀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좋지 않다.
남아 있는 거악은 그렇게 되면 둘이다.
오만한 용.
그리고 탑에서 꼭꼭 숨어서 이연아에게 죽을 날을 기다리는 질투하는 뱀.
‘둘이 된다면 마왕도 곧 나설 텐데.’
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원래의 힘을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왕에게는 별문제는 되지 않는다.
나는 윤채린과 윤승하를 바라봤다. 저 둘은 정말 빠르게 강해졌다. 다만, 문제는 그 수준으로 마왕을 견제할 수 없다.
‘남은게 오만한 용. 그리고 마왕.’
질투하는 뱀은 이연아가 쓰러트릴 것이다. 근데 문제는 하필 무력이 가장 강한 용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삼왕과 내가 합쳐보면 용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마왕이 거슬린다.
“탑은 어디까지 올랐지?”
10층. 이제 마왕이라 자칭하는 쓰레기를 치우러 갈 거야.
“되찾은 무력은?”
궁금해?
정숙한 처녀가 말끝을 늘렸다. 마치 놀리듯이.
전성기보다 좀 더 세진정도? 이 정도면 나 혼자서 오베론을 막을 수 있을 느낌인데.
“오만한 용은?”
나보고 죽으라고? 그 무식한 놈은 삼왕하고 이연아에게 맡기는 게 좋을걸.
부정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삼왕하고 이연아, 그리고 전성기보다 강해진 정숙한 처녀면 해볼만 할 것 같은데.
“몽중화를 쓰면?”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몽중화를 쓰는 동안은 막을 수 있지.
반대로 말하면 몽중화가 끝난다면 못 막는다는 소리였다.
“탑에서 나올 수 있나?”
못 해. 저기 천상에 있는 색녀가 나를 막고 있거든.
“……여신?”
푸핫.
내 말에 정숙한 처녀가 비웃었다.
아, 미안. 너무 웃겨서. 여신이라고? 그게? 뭐, 어떤 의미로는 순결하기는 하지.
짙은 비웃음을 담은 말.
근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질투하는 뱀은 이제 곧 죽을 것이고. 무신이랑 오베론도 죽었으니, 오만한 용과 마왕이 활동할 텐데.
“막아야지.”
나는 도시를 봤다. 그새 방송국에서 온 이들이 영웅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다만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더 원이 말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왔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설마 거악을 두 존재나 쓰러트리다니.”
“네, 뭐.”
나는 더 원의 얼굴을 살폈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나 안 보이나.
“혹시……미국에 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는 한국이 좋아서요.”
“한국은 좋은 나라죠. 불세출의 영웅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하니까요. 그 영웅들을 외국에 수출하는 조건으로 정말 많은 돈을 벌어들이니까요.”
다만, 혹시나 한국에 실망한다면 기억해주십시오라고 더 원이 덧붙였다. 굉장히 익숙한 한국어였다.
“하지만 미국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지켜야 할 땅은 넓지만, 이시우씨가 바라는 것 대부분을 미국은 이뤄줄 수 있으니까요.”
나는 더 원을 바라봤다.
“네, 그럼 기억만 해두겠습니다.”
“그래 주면 감사하죠. 아 참, 혹시 미국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근처 시청으로 가서 이걸 보여주십시오.”
더 원이 품에서 증표를 하나 꺼냈다.
“저를 상징하는 증표입니다. 이걸 이시우 님에게 맡겼다고 말해놓을 테니, 미국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어 드릴 테니까요.”
더 원은 그것으로 용무가 끝이라는 듯, 도시로 들어갔다.
더 원.
마왕의 빙의체 중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그런데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나는 당황한 채로 하메르와 에니스를 바라봤다.
“저번에 우리는 말 놓기로 했지 않은가. 편하게 말해도 좋다.”
“왜 이렇게 된 거야.”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아, 내가 혹시 한국말을 잘못한 건가.”
하메르가 갸웃거렸다. 에니스가 옆에서 웃었다.
“아니야~다들 섹스라고 한다면 다 알아듣는다고. 종족의 장으로서의 의무를 우리에게 조금 나눠준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지?”
“뭐, 그런 거다.”
“순순히 애를 낳아라? 라는 느낌이지~.”
나는 티타니아를 바라봤다. 티타니아는 애써 내 시선을 모른 체 하면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으면서 마법을 걸었다.
“좋아. 반드시 임신하는 마법은 잘 걸어졌고.”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