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준비(4)
* * *
오빠?
내가 잘못 들은 건……아니겠군.
“오빠라고 할게요. 꼬우면 그쪽도 반말하세요. 아니다. 전 반말이 더 편하니까, 그냥 반말로 하세요.”
“……그래.”
“좋네.”
이연아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단번에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탑에 대해서는 대충 말하자면 탑은 시간 축을 꼬아서 각 시간대에 있는 애들을 납치해요. 제가 다니고 있었을 때, 제 시간대에 있던 아카데미 인원 다섯 명을 납치했어요.”
“그렇다면?”
“네, 마나가 개방되지 않은 시대의 ‘학생’들과 시우 오빠, 합쳐서 총 30명의 인원이 탑에 있었어요.”
나는 입을 벌리려다가 말았다. 마나가 개방되지 않은 시대라면 문자 그대로 학생일 텐데.
“뭐, 아무튼 거기서 고생을 좀 많이 했어요. 성장 가능성이 뛰어난 30인을 모았지만, 대부분이 학생이었거든요. 인성이 개차반인 녀석도 있었지만, 그래도 힘을 지닌 아카데미 학생들이 워낙에 강해서 괜찮았어요.”
“그럼 나는?”
“오빠는…….”
이연아는 나를 보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당시 30명이 전이한 시점에서 오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어요. 그리고 오빠는 그때 당시 어마어마한 중상을 입고 있었어요.”
“……내가?”
“네, 마수왕의 목을 날리기 직전, 오만한 용이 나타나서 영웅들을 모조리 ‘몰살’했다고 했었거든요.”
“…….”
“그리고 오빠는 오만한 용이 날린 일격을 막다가 죽기 전까지 갔었고. 어찌어찌해서 ‘탑’의 입장 조건을 채워서 그쪽으로 끌려갔어요. 그래서 탑에서 오빠는 거의 1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
“그래서 저도 좀 의아하기는 해요. 원래대로라면 오만한 용을 막는 게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삼왕이 마수왕을 잡는데 개입했다던가, 오빠가 기린의 정수를 얻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연아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시우 오빠는 굉장히 사람을 막대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
“저를 훈련한다는 명목으로 진짜로 때리더라고요. 처음에 딱밤으로 이마를 때리고. 나중에는 막막 말로는 하지 못 할 짓을 막 하고.”
심통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19금 쪽으로 이야기한 거 아니에요. 진짜로 사람을 물리적으로 굴렸다니까요? 거짓말 안 하고 왼쪽 팔이 너덜너덜한데, 포션으로 치유하면서 바로 훈련했어요. 훈련 내용은 뭔지 아세요? 제가 중격일 때, 상격 요정 한마리 잡아와서 협박하더라고요. 요정한테 저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면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내가 요정한테 협박했다고?”
“네, 칼을 들면서, 이미 멸종했던 요정인 다크엘프였나? 아무튼, 그 엘프 원래 요정왕이 아니면 명령을 안 듣는다고 그랬는데, 그걸 막 쥐어팬 다음, 말을 듣게 했었다니까요.”
“내가 요정족을 협박했다고? 왕의 말이 아니라면 듣지 않겠다는 요정족을?”
“네, 그랬다니까요. 티타니아가 그걸 봤으면 진짜 손발을 벌벌 떨면서 오빠를 때렸을지도 몰라요.”
세계수로 콰악하고.
이연아가 손을 벌리며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 해줄 말은 있나?”
“아, 있어요. 여기에 시우 오빠는 안 그런데 제가 만났던 시우 오빠는 고자였어요.”
“……뭐?”
“진짜 고자 새끼라고요.”
이연아가 억울했는지 쌍심지를 키며 말했다.
“마음속으로 욕한 게 백번은 넘을걸요? 눈치는 평소에 비상하면서 여자 쪽으로 들어가면 없는 척하지, 은근슬쩍 유혹해도, 대놓고 유혹해도 너는 내 동생 같은 아이다. 혹은, 너를 이성으로 생각한 적 없다. 라면서 말하고. 그거 여자한테 얼마나 심한 말인 줄 알기는 해요?”
얼마나 억울했는지 말에서 억울하다는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혹시 어떤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서 한 여자만 바라보고 있어서, 그녀를 위해 정조를 지킨다든가…….”
내 말에 이연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그래서 지금 여자 몇 명이에요.”
이연아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뒤로, 나는 이연아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탑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탑에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물건이나 스킬이나.
그리고 질투의 뱀은 어떻게 되었는가 등등.
‘그래도 방향은 잡을 수 있었군.’
이연아에게 말을 듣지 않았다면,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할 뻔했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정말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빴다.
부모님에게 소개해 줄 여자들을 모으고, 장소를 만들고, 탑에 갈 인원들을 꼬시고.
“타, 탑에 들어간다고?”
정숙한 처녀가 기함했다.
“거기에는 그 무식한 질투의 뱀이 있지 않은가? 나는 싫다.”
“너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말은 안 했는데.”
“…….”
정숙한 처녀를 강제로 데려오고.
“탑이라…….”
샤오메이가 내 말을 들은 뒤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은 제안이네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탑에 들어간다면요. ‘탑’의 보상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차륵부채를 한번 접은 샤오메이가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아이는……?”
샤오메이가 내 옆에 있는 정숙한 처녀를 보며 물었다.
“비밀을 지켜준다고 하면 말해줄 수 있어.”
“으음,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아요. 이시우 님을 믿으니까.”
샤오메이가 야릇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확실히 이시우 님의 제안은 끌리네요. 다만 기간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그 정도야 뭐.”
샤오메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승낙했다.
“저도 가능합니다.”
아야네도 확답이 바로 나왔다. 지나가던 도중에 강한남이 움찔거렸다.
“탑에 대한 보상도 탐나는 편이지만, 이시우 님한테 신세를 진게 굉장히 많아서요. 근데 제가 가도 될까요? 저는 아직도 중격에 못 들었는데.”
“괜찮아. 어차피 탑에 들어가면 다 성장하니까.”
아야네도 승낙했다.
‘이걸로 멤버는 얼추 구성된 건가.’
나는 그란데힐에게 향했다. 티타니아의 집무실로.
안으로 들어가니 느릿하게 홍차를 마시면서 츄리닝 복을 입은 채로 무릎을 모은 채 의자 위에 앉은 티타니아랑 눈이 마주쳤다.
그러기를 1초. 한순간에 세계수의 드레스를 입고, 동화하여 머리색과 눈을 초록빛으로 바꾼 티타니아가 나에게 말했다.
“그, 그대는 본녀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 으레 부부 관계란…….”
“……미안.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나는 티타니아를 내버려두고 그란데힐을 끌고 가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란데힐은 내 이야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오메이 님하고 아야네 님을 데려가신 다라.”
그란데힐이 아주 조금, 샐쭉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알다시피, 샤오메이의 능력은 인재를 보는 데에 뛰어나잖아. 그리고 아야네의 단절은 키우면 좋으니까.”
“그렇군요. 우선 ‘그렇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숙한 처녀를 데려가는 것은.”
“괜찮아. 생각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서.”
“나는 펫이 아니다!”
정숙한 처녀의 말을 무시하면서 나는 그란데힐에게 윤채린에게 부탁해서 받은 최면 어플을 받았다.
“그건…….”
“최면어플에 내 힘이 담겨 있다고 했지? 말 잘 들으면 이걸 줘서 힘을 줄게.”
“……뭐, 뭐냐 그 물건은. 왜, 왜 내 권능이 죄다 이상한 것들에게 오염된 거지?”
“오염됐다고?”
정숙한 처녀는 눈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보, 본녀의 환상 권능이 이상한 것들에게 오염됐지 않았나! 봐라!”
정숙한 처녀의 말에 나는 ‘눈’으로 어플을 바라보았다.
‘이건…….’
나는 신음했다.
천상의 마.
나는 다른 여자들의 고유 능력은 자주 쓰지만, 이것만은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천상의 마가 가진 효과가 내가 가진 특성들을 모조리 ‘천마’에 걸맞게 뒤바꿀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거악의 권능도 뒤틀었어…….’
이것도 뒤바꿀 정도로 집념이 강하다니. 조금 질렸다.
‘가면’에 익숙해져서인가. 최면 어플에서 묘한 울림이 있는 것 같았다. 천의 가면으로 바라보자 이상한 대사들이 흘러나왔다.
악! 그날의 역겨웠던 윤채린과의 추억!
아쎄이! 우리는 그 역겨운 년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진정한 남자만이…….
라이라이차차차!
“…….”
뭔가 엿보면 안 되는 심연 같은 것을 본 기분이었다.
“왜 그러 십니까?”
“……아니야. 아무튼 탑 이야기는 이것으로 됐고…….”
나는 그란데힐을 바라봤다.
“이번 주 토요일 날에 부모님한테 인사 드릴건데 올래?”
“가겠다.”
어느새 나타난 티타니아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내 부군을 낳아주신 분이라면 다, 당연히 본녀가 가야지. 한국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좋은 인상을 따지 못하면 결혼을 못한다는 문화가 있지.”
그건 아니다.
저건 그냥 티타니아가 심각할 정도의 드라마 중독자라 잘못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숙한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야. 부모님은 내가 말하기에 뭣하지만, 꽤 개방적이신 분이라.”
“예, 맞습니다. 이시우 님의 부모님들은 정말 좋으신 분들입니다.”
내 말에 그란데힐이 거들었다.
“그걸 어떻게…설마 보, 본녀를 제치고 부군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린 건가?”
경악해하는 티타니아.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쪽에서 그런 정보들을 들었을 뿐.”
아마도 윤채린이나 이지아가 살짝 귀띔해준 것 같다. 내가 그란데힐을 아껴서 그런 것일 테지.
그리고.
토요일 당일. 근처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을 전세를 내고 부모님에게 여자들을 소개해주겠다는 내 계획은 깨졌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영웅을 키워내신 부모님을 뵙고 싶었거든요.”
“가히 업적이라고 봐도 좋다. 혹시 경호가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 일족의 게으름 벵이들을…….”
“당신들이 왜 여기에……?”
공허의 왕과 용왕이 난입했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