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마인(3)
* * *
약 한 달 후에 중간고사가 끝난 뒤.
검은 왕의 계시가 펼쳐진다. 교수들은 이 결계를 해제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나 결계 마법을 가장 확실하게 부술 방법은 결계의 축을 무너트리는 것. 주인공과 그 일행은 애쉬와 더스트를 쓰러트리고, 결계를 무너트리고 히어로 아카데미의 평화를 지켜낸다.
여기서 이야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첫 번째는 배드 엔딩. 애쉬와 더스트의 합공을 이기지 못해, 지는 엔딩이다.
두 번째는 애쉬와 더스트가 도주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쉬와 더스트는 끈질기게 플레이어를 괴롭히며 온갖 지랄맞은 짓거리들을 해댄다.
세 번째는 애쉬와 더스트를 쓰러트리고 학원의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해도 되지만, 굳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룰 필요는 없다. 사건이 벌어지면 피해가 매우 크기도 하고.
나는 바지 주머니에 반지를 넣었다.
윤채린을 데리고 강당에서 나왔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구슬은 총 세 개. 처음 구슬이 어디 있냐에 따라서 패턴이 7가지 갈래로 변한다. 두 번째 구슬의 위치는 아까 전, 강한남이 갔던, 부실. 세 번째 위치는 옥상이었다. 다른 것들이라면 헷갈릴 수 있었으나, 기억하고 있던 위치였다.
나와 윤채린은 빠르게 이동했다. 푯말에 강한 남자라고 쓰여 있는 곳이었다. 헬창들이 잔뜩 모인 장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땀 냄새가 나는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지?"
"어. 여기야."
쾅!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채린이 부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아니, 노크는 왜 안 하는데.
"뭐, 뭐야!"
"빌런인가! 빌런이 쳐들어왔나! 드디어 내 근육을 뽐낼 때가 왔군...!"
한 호흡도 되지 않았건만 여기저기서 상체를 탈의한 근육질의 남성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수가 10여 명. 그 광경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행여나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운 광경이었다.
"윤, 윤채린? 네가 왜!? 서, 설마 이 부실을 접수하러 왔나?"
강한남이 덜덜 떨면서 물었다.
"아니, 우린 지금 송라희 교수님의 부탁으로 잠시 이곳에 왔어. 너희들의 단련을 방해한 것은 미안하지만, 잠깐 실례 좀 할게."
윤채린이 당차게 앞으로 지나갔다. 송라희 교수님의 부탁이라는 말에 애들이 재빠르게 길을 비켜주었다. 자칫 윤채린에게 밉보이면 교수님에게 밉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할게."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근육을 뽐내는 역겨운 광경을 지나쳐 부실에 오른쪽으로 향했다. 2번째 창문에 위치한 화분. 이름 모를 자줏빛의 꽃이 있었다. 강당에서와같이 몸속의 마력을 돌렸다. 보랏빛의 번개가 손을 감쌌다.
쩌저적.
쉴드 채로 화분을 부숴버린 후, 구슬을 챙겼다.
"무슨...?"
관련 특성이라도 있는지 구슬의 힘을 느끼고 날카로워진 눈을 한 소년이 한 명 있었다. 특성을 슬쩍 보니 역시나 관련 이능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스텟 수치가 나보다 낮았다. 힘이 높지만, 민첩, 체력, 마력이 별로였다. 특성과 나름 시너지가 좋아 한순간 출력은 뛰어나나 그뿐이었다.
"그럼 다들 열심히 운동해."
강한남과 이별하고 윤채린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이 저녁노을에 황혼빛으로 물들었다. 꽤 운치가 있는 장면이었다. 나는 옥상 문에서 전진하고 오른쪽으로 일곱 걸음 이동한 뒤, 화분을 부수고 검은 구슬을 챙겼다.
콰직.
구슬 두 개를 부쉈다. 목걸이 하나랑 귀걸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 검은 박쥐의 목걸이, 검은 전갈의 귀걸이.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 독사의 반지를 꺼냈다.
세 개의 장신구는 세트 장신구로 초반에 유용한 장신구였다. 일명 독 저항 세팅. 이 장비가 있으면 독을 전문으로 다루는 애쉬를 공략하기 한결 수월해진다.
"좋아 보이는 물건이네."
"그래봤자 독 저항을 올려주는 물건이야. 너한텐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지."
"흐응."
윤채린이 콧소리를 내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에 대해서 잘 아네?"
"1학년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한 명인데 모를 리가."
"1학년 애들 중에서 독을 쓰는 애는 없는데 말이지. 내가 독에 당한 적도 없고."
"내가 머리가 좋잖아. 대충 유추한 거지."
내 뻔뻔함에 윤채린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곤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가 상대해야 할 빌런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어."
"히어로 아카데미에 잠입해서 이곳에 검은 왕의 계시를 설치할 사람은 마인들 밖에 없지."
"인신공양을 하는 미친 새끼들은 마인들 뿐이니까."
윤채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잠입할 수 있는 존재로 한정하면 그 수는 꽤 줄지. 전 세계를 뒤져도 100명이 채 안 돼. 그리고 화분에 쳐진 결계는……."
"마인의 마력이었지."
"마인으로 한정하고 잠입에 뛰어난 존재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어."
"……."
"애쉬와 더스트."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야."
"중격의 영웅들이야. 중격이라고는 하지만 무력은 보통 중격의 영웅보다 몇 수는 처지지. 하지만 방심하지는 마."
"방심 같은 건 안 해. 게네들에 대해 알고 있어?"
"응. 애쉬는 독에 관한 스페셜리스트야. 온갖 독의 조예가 깊으며, 약에도 일가견이 있지."
"연금술사?"
"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술사라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알기 쉬운 단어를 표현하자면 사천당문. 무?와 독?을 결합하여 상대하기 지극히 까다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다음은 더스트. 더스트는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워."
나는 잠시 더스트를 떠올려 보았다. 그림자 종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대부분의 물리 공격을 무시하는 특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림자 종족의 약점인 빛 속성의 공격은 인간과의 혼혈로 거의 통하지 않는다. 각 종족의 장점만을 물려받았다.
"더스트는 그림자 종족과 인간 사이의 혼혈이야."
"……설마."
"어. 각 종족의 장점만을 취했어. 대부분의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고, 빛 속성 공격에도 거의 면역이나 다름이 없지. 그림자 사이로 이동이 가능하며, 미리 그림자를 심어둔 곳에 이동도 가능해."
"쓰읍."
윤채린이 혀를 찼다. 아마 까다로운 상대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까다롭다. 승산이 보이지 않으면 바로 도망치려 드니까.
"그럼 먼저 그 더스트라는 놈을 노려야겠네?"
"어. 첫째도 더스트. 둘째도 더스트. 더스트의 특징은 알기 쉬워. 한번 타격을 받으면 그림자로 이루어진 몸을 드러내거든."
"아, 진짜 골치 아픈 녀석이네."
윤채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잡아야 해."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놈들이 이번에 탈출한다면 다른 곳에서 더 귀찮은 짓을 할 것이다. 더스트의 그림자 이동 능력과 애쉬의 독의 조합은 그만큼 위험했다. 가능하다면 지금 잡아서 처리하는 게 옳다.
"그럼 애들을 불러 볼까."
핸드폰을 꺼냈다. 은수아, 윤승하, 한종우, 임나연. 톡방에 모두를 초대하고 증거를 입수했다는 톡을 보냈다.
'그리고 얘도 필요하지.'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모를 보험이었다. 이 세계는 불확실하다. 게임처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는 확신이 없다. 그렇기에 보험은 필수였다.
***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전원이 모였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수아, 임나연, 윤승하, 윤채린, 한종우. 보기만 해도 든든한 조합이었다. 한종우가 메인 탱커를 맡고, 윤채린이 딜탱을 겸한다. 나와 임나연, 윤승하가 보조하여, 은수아가 결정타를 날린다.
나는 모두가 모이자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니까."
은수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현재 학교에 마인 들이 잠입해 있는데, 그 녀석들이 검은 왕의 계시를 발동해 아카데미를 위협하려는 거지?"
"증거는?"
한종우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부숴놓은 구슬 3개를 꺼냈다. 마기에 오염된 구슬들. 부순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마기에 오염되어 있었다.
"……진짜군."
"은신의 술식을 기막히게 새겼네. 이런 종류의 술식은 들키기 어렵지만 한 번 들키면 마기의 잔재가 오랫동안 남아있지."
윤승하가 구슬을 보며 말했다.
"신고하자. 이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임나연이 드물게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니? 곧 학교 문 닫을 시간이야."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초록빛의 제복에 들고 있는 빗자루. 살짝 귀찮은 표정. 영락없는 청소부 아저씨였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송라희 교수님한테 부탁받은 게 있어서요."
"그렇구나. 언제까지 걸리니?"
상대가 시계를 보았다. 찬스였다. 몸속의 마나를 돌렸다. 뇌령이 번개를 두른 체 몸속을 돌아다녔다. 신경을 하나하나 번개로 자극한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주변의 풍경이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이제 곧 문을 닫아야 할……."
쿠르릉!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전력으로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보랏빛의 뇌광光이 번뜩이며 검에서 솟았다.
그러나 상대도 중격의 영웅 중 한 명. 그가 재빠르게 손으로 막으며 그림자를 둘렀다. 한 수 교환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중격은 멀었다. 나 혼자 그와 싸운다면 5분도 버티기 힘들겠지.
그러나 이곳에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조져!"
윤채린의 말과 함께 뒤에서 마나의 폭풍이 일었다. 검기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임나연. 순백의 갑옷을 두르고 돌진하는 한종우. 주변의 정령들을 소환하며 적을 경계하는 윤승하.
그리고.
고오오오─.
주변의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녀린 팔 끝에, 손아귀에서 마력이 인다. 일곱 빛깔의 휘황찬란한 빛이 엮이며 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지개를 뭉뚱그려내어 만든듯한 검. 칠색검이었다.
보랏빛을 띠는 검은색의 불꽃이 은수아의 주변을 감쌌다. 칠색의 부가적인 효과였다.
그 옆에서 사납게 웃는 윤채린이 보였다. 검은색의 기가 주변에 넘실거렸다.
콰앙!
순백의 갑옷을 두른 한종우가 더스트에게 부딪쳤다. 거대한 소음이 일며, 그 사이로 임나연이 돌진했다.
부웅! 검을 휘두르자 풍압이 동반하며 더스트를 가르려고 했다. 그 순간 더스트가 스르륵, 하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더스트의 특기였다.
잠영.
7초의 쿨타임을 가진 스킬. 자신의 그림자에 숨은 다음 10m 내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 보자마자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더스트가 사라지자마자 임나연에게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보랏빛의 뇌광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더스트가 임나연의 그림자 속에서 솟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가느다란 실 수십 개가 꽈배기처럼 꼬이더니 꼬챙이 형태로 변한 뒤, 나를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낮게 혀를 차며 나에게 향하는 꼬챙이를 내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부우우우웅!
그 순간 공간이 통째로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휘황찬란한 무지갯빛 검이 보였다. 칠색검이 공간을 가르며 더스트를 향해 휘둘러졌다.
"이런 미친!!"
더스트가 칠색 검의 담긴 힘에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은수아가 낮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건 명백히 악수였다.
더스트의 뒤에서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검은색의 기가 응축되며 주변을 잠식해갔다.
웅웅─!
검은색의 파동이 그녀의 손아귀에 모인다. 황혼으로 물든 공간이 어둠이 잠식한다. 파동이 뭉치고 뭉쳐 검은색의 구체가 되었고.
천마신결????
멸겁륜???
그리고.
어둠이 쏟아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