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기린의 둥지(1)
* * *
빌런들이 언제 노려올지 모른다. 이건 꽤 심한 스트레스였다. 내가 나름 방비를 해놨다고는 해도 그들은 아카데미의 온갖 방비를 뚫고 한번 뚫고 들어왔을 정도로 뛰어난 집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으음.'
현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머진 하늘에 비는 것 정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짐가방을 세 개정도 가져오는 이지아와 단출하게 배낭 하나와 바퀴 가방을 가지고 온 김하린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천둥새 둥지 근처에는 '그녀'가 있으니 빌런들이 난입하면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빌어야겠다. 뭐, 별수 있나.
게임 내에서는 생판 남이지만 빌런들을 증오하는 그녀라면 손을 벌려 도와줄 것이다.
"다들 준비는 다 해왔지?"
"응. 다 준비됐어!"
"나, 나도..."
"그럼 출발하자."
우리는 짐을 가지고 출발했다. 목표는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활성화한 워프 게이트였다. 저 멀리서 10m 높이에 푸르스름한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줄지어 있는 학생들. 2학년은 달랐지만 1학년은 기대감이 섞인 표정이다.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아카데미 생활을 하게 되면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극히 적어지니까.
"와, 저 임무는 처음 해봐요."
"생각보다 별거 없으니 너무 긴장하지 마. 긴장하다가 더 실수한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떠들고 있었다. 긴장감과 흥분감이 섞인 목소리들. 1학년들은 처음이니 그들과 안면이 있는 2학년이나 3학년들과 동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 빌런을 만나게 되면..."
"네. 알고 있어요. 학교에서 발급받은 배지에 마력을 불어넣으라는 거죠? 몇 번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중요하니까 말하는 거야. 아카데미 학생들은 언제나 빌런들이 노리고 있으니까……배지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 가장 가까운 영웅분들한테 연락이 갈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도 있었지. 실제로 써본 적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나는 재킷 왼쪽 가슴팍에 붙어있는 배지를 보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어느새 줄이 거의 줄어 있었다.
"어디로 출발하실 건가요."
워프 게이트를 통제하는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오산으로 갈게요."
"넵, 학생증을 제시해 주세요."
미리 김하린과 이지아에게 받아 둔 학생증을 건넸다. 직원이 학생증과 우리를 잠깐 대조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시우 학생, 이지아 학생, 김하린 학생 확인되었습니다. 다들 배지는 소지하고 계시지요?"
"네."
나는 대답하며 재킷 상의에 붙어있는 배지를 보였다. 이지아와 김하린 역시 직원에게 말에 답하며 배지를 보였다.
"아무래도 아카데미 학생들이라고 하면 빌런들이 노리기 때문에 몇 번을 확인해도 부족하죠. 배지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다들 무탈하길 바랍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직원에게 말에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
포탈을 빠져나오니 한적한 시골 같은 장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산은 마정석 공장이 다수 포진해 있어 몬스터들의 습격을 자주 받는다는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경기도라고 하면 다 대도시인 줄 알았는데..."
"완전 시골 같네요..."
이지아하고 김하린이 중얼거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아파트가 꽤 많은 걸 보면 아직 개발 중인 것 같은데.
"일단 숙소부터 잡을까?"
그렇게 일행에게 말하며 핸드폰을 켰다. 아카데미에서 임무를 받고 밖으로 나가게 되면 아카데미에 측에서 제공해주는 호텔이나 숙소들이 있다. 다만 식사는 따로 먹어야 하지만, 장학생은 식사도 무료였다.
"우리가 배정받은 곳이…. 시그니쳐 호텔이네...?"
아카데미에서 제공해주는 앱을 들어가 배정받은 장소를 확인해보니 엄청 좋은 호텔이 잡혀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하루 머무는데 약 100만 원이 드는 곳이었다.
'역시 교장님...!'
재능 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했지만, 재능있는 자에게는 누구보다도 자애로운 인물답게 좋은 숙소를 배정해 주었다. 아마 이 근방에서 잡을 수 있는 호텔 중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
"시그니쳐 호텔이면 엄청 좋은 데 아니야...?"
"어……. 아마 이 근방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 잡힌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가보자."
우리는 핸드폰 지도를 따라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향하면서 많은 것들이 보였다. 대장간, 무기점. 이따금 몬스터의 부산물을 사고파는데도 보였다. 갑옷을 입은 남녀. 활이나 도검 따위들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이런 광경을 보다 보니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게임 속 세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긴 했다. 나는 검을 들고 다녔고, 이지아는 지팡이를 들고 염동력으로 가방을 조종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것보다는 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다.
"…대박. 방금 봤어?"
"어, 어어. 봤어. 존잘 남신..."
바로 내 얼굴에 대한 반응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
"저, 저기…. 혹시 연예인이신가요? 연예인이시면 사인해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여자친구…. 겠지?"
"나도 어디서 꿇리지 않는데 저 둘은 진짜..."
이지아와 김하린에 대한 수군거림.
"혹시 연예인 해볼 생각 없으신가요?"
라고 묻는 사람까지. 그래도 워프 게이트랑 택시 정거장의 거리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대충 택시를 잡고 호텔에 도착해 귀찮음을 덜 수 있었다.
호텔은 굉장히 호화로웠다. 로비가 금빛으로 빛나는 바닥이 깔려 있었고 영화에서나 볼법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살짝 기죽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 카운터로 향했다.
"저기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네,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시우랑 이지아랑 김하린입니다."
"이시우 님, 이지아 님, 김하린님. 네, 확인되었습니다. 801호, 802호, 803호입니다."
놀랍게도 전부 개인실이었다. 남자인 나는 몰라도 김하린하고 이지아는 서로 같은 방일 거로 생각했는데.
키 3개를 받아서 이지아랑 김하린에게 802호실과 803호실 키를 주었다.
"그럼 풀 짐은 알아서 풀고 30분 뒤에 만나도록 하자."
"웅, 있다 봐."
일행과 이별하고 나는 801호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고 모던한 분위기는 가구들. 나는 대충 가방을 아무 데나 내려놓았다.
지잉.
짐을 내려놓자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지아가 문자를 보냈었다.
시우야 아침 먹을래?
고양이가 물음표를 띄우는 이모티콘
아침이라. 원래의 나는 아침을 안 먹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에 와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침을 챙겨 먹지 않으면 높은 강도의 훈련을 하지 못해 아침을 꼭 챙겨 먹는 쪽으로 바뀌었다.
ㅇㅇ내것도 부탁해. 하린이는 먹는데?
엉. 하린이도 아침 먹는데. 그러면 아침 세 개 주문할게.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챙겨온 케이스를 열었다.
생도 복은 너무 눈에 띄니 적당히 반팔을 주워입고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었다. 그리고 모자까지.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얼굴을 가릴 수 있겠네. 나는 혹시 몰라 마스크까지 챙겨놓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이지아가 톡을 보내놨다.
티켓 세 장이 찍혀있는 사진.
여기 호텔은 뷔페식이라 티켓이 필요하데! 내려오면 문자 보내 줘!
아침이 뷔페식이라고...?
하긴 영웅들의 신진대사량은 일반인과 비교하면 종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높아 식사량이 장난 아니다. 나도 한 번 식사할 때 배고프면 3인분가량 먹을 때가 많다.
나는 이지아에게 내려가고 있다고 문자를 보낸 뒤 내려갔다.
"시우야."
익숙한 미성에 고개를 돌리니 이지아랑 김하린이 있었다.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응. 티켓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거든."
이지아가 그렇게 말하며 티켓 한 장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티켓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화려했다.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레스토랑 같은 느낌. 고급스러운 분위기보다는 깔끔한 분위기에 하얀색 바닥과 검은색의
"안녕하세요. 티켓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식당으로 가자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웨이터 복의 여성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티켓을 제시하니 웨이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VIP 회원이시군요. 테이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VIP?'
일개 학생에게 VIP는 너무 우대해주는 게 아닌가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뭐.
웨이터가 우리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우리는 조용히 따라갔다. 집에서 애물단지 취급당하던 이지아는 이런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고, 나도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쭉쭉 가더니 커다란 창문 바로 옆에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녀의 안내를 받고 테이블에 앉았다.
"마실 것은 어떤 거로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녀가 메뉴판을 건넸다. 메뉴판에는 리쉬티나 홍차, 전통차나 탄산수 등이 있었다.
"저는 물이요."
"저는 아메리카노로 부탁할게요."
"저도..."
"네, 주문 확인했습니다."
그녀가 자리를 떴다. 우리도 음식을 담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릇을 들고 고기를 담았다. 훈제한 오리고기. 돼지 뒷다리로 만든 햄. 소고기 육회를 접시에 담고 그 옆에 있는 배로 단맛을 내었다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소스 그릇도 그릇 위에 올렸다. 그리고 연어 스테이크까지. 탄수화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탄수화물은 밖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까.
"와, 랍스타 까지 있네."
나는 랍스타 집게발을 하나 집었다. 그렇게 접시 하나를 랍스타 집게발 하나랑 고기로 가득 채우고 아까 전, 웨이터에게 안내받은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는 이미 김하린과 이지아가 앉아 있었다.
"우와 완전 고기 밭이네."
"그러게.."
이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김하린이 살짝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왜, 뭐.
"육체를 쓰는 영웅들은 다 많이 먹으니까..."
나는 괜스레 중얼거리면서 포크를 들어 올리며 이지아와 김하린의 그릇을 보았다.
이지아의 그릇 위에는 두툼한 샌드위치 한 개랑 리코타 치즈로 버무린 샐러드, 빵 위에 채소와 크림 같은 게 올려져 있는 음식이 있었고, 김하린의 접시 위에는 에그 타르트와 닭가슴살 샐러드, 베이컨이 올라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요기 근처에 '검주'님이 있다고 해요."
"검주?"
"네."
김하린이 그렇게 말하며 포크로 베이컨을 푹, 하고 찌르고는 작은 입으로 냠하고 물었다. 나도 포크로 오리고기를 찍어 머스터드 소스에 찍어 먹었다.
검주.
32세의 나이로 수십 자루의 검을 그녀의 고유 특성으로 제어함으로써 얻은 별명이었다.
검의 주인이라는 광오한 별명을 가진 그녀는 문자 그대로 검의 주인 같은 능력을 보인다.
그녀의 고유 특성으로 수백 자루의 검을 유성처럼 쏘아 단독으로 천마리의 블랙 야크라 불리는 몬스터들을 토벌한 일화로 그녀는 전설을 써 내렸다.
그 모습에 세계 최강의 영웅들을 모은 '조디악'의 일원 중 하나가 검의 주인 같다. 라는 말로 정착된 그녀의 별명이 바로 검주.
한국에서 가장 기대받는 신인이며, 세계에서 순위를 매겼을 때, 5년 안에 100위 안에 들 거라 평해지는 예비 '최상격'의 영웅이다.
빌런을 증오하며 빌런 사냥에 가장 적극적인 영웅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남동생을 빌런들이 죽였기 때문이다.
'어...?'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검주 공략 파트에서 그녀의 남동생과 그녀가 같이 찍힌 사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일러스트 속 남동생이 나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깨달았다.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다. 고기를 입으로 욱여넣으며 생각을 전환했다. 나는 큼직한 샌드위치를 크게 벌려 냠, 하고 먹는 이지아와 김하린을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이지아가 무럭무럭 크면, 후반부에서도 어마어마한 활약을 하는 대마법사가 되고, 김하린은 이번 사령의 일원, 기린이 한동안 머물렀었던 기린의 둥지와 천둥새 토벌 때 1등으로 활약할 '고기 방패'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중반부에 빌런으로 전직한 김하린이 광익으로 하늘 높이 날아 키히히히힛! 거리며 마법 폭격과 마도 공학 폭탄으로 테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정사'대로 흐른다면 원작의 주인공이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 믿겠지만, 정사는 이미 틀어진 지 오래다. 주인공은 이미 2명이 있으며, 나라는 이레귤러까지 있으니까.
'...잘 해주자.'
그렇다고 너무 친하게는 지내지 말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