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물 위의 흡혈귀
* * *
파탈리테는 황당하다는 듯 따져 물었다.
"한 번도 너를 축복한 적 없다니? 그럼 너의 그 강한 힘은 어디서 나온 건데? 설마 신의 은총도 없이 그런 힘을 가졌다고 우기지는 않을 거지?"
"내가 받은 은총은 불의 신이 내린 게 아니야."
"그러면?"
"약오름의 신에게 받은 것이지."
파탈리테는 생소한 신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곤 되물었다.
"뭐? 약오름의 신? 그런 신도 있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그래. 내가 은총이 없어 고통 받고 절규하고 있을 때, 나한테 상태창과 능력치를 준 은혜로운 여신이시다. 그 뒤로는 기도해도 응답해주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태창이 남아있는 걸 보면 힘으로 이어져있다고 봐야 하겠지."
"이상하네? 그런 권능을 아무 신이나 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신이? 아니, 그것보다 여신이라고? 신의 음성을 들었단 말이야?"
파탈리테는 의문이 들었으나 뭐라 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라고 해서 신의 생태계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니.
"그래."
"그럴 리가, 신의 음성을 듣는 건 사도 쯤 되는 자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그럼 내가 사도로 간택되었나 보네."
"어째서? 아니, 이상한 게 너무 많아. 애초에 불의 신의 은총이 없다면 왜 수인의 모습이 아닌 거야? 설마 귀와 꼬리를 잘라낸 건가? 아니, 수인이 그런 짓을 하면 죽을 텐데?"
몇 번의 아니를 말하는 것인지, 파탈리테는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현재는 누구라도 믿기 힘들 소리를 아주 당당하게 했다. 사실이었지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그래서 은총이 없어도 수인 같은 건 되지 않았어."
파탈리테는 잠시 고민하다 현재의 말을 일단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랬나. 어쩐지 인간 답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싶었어."
"내 사고방식은 여기 와서 배운 건데? 아무튼, 나도 신 마음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상황이 너무 싫어.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싫다. 그러니 아티팩트를 모아 그 힘으로 신에게 다가가려고 한다. 누구도 내 운명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없도록 말이야. 그러려면 역시 아티팩트를 몸에 박아넣는 그 기술이 있는 게 좋겠지. 그런데, 정말 아티팩트를 몸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1만 명의 제물이 필요한 거냐?"
황도 인구가 60만이라니까 몰살하면 60개의 아티팩트 정도는 삼킬 수 있겠군. 현재는 대충 그렇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거야 아티팩트마다 다르고, 주술의 완성도에 따라 또 다르겠지. 솔직히 말해,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무엇도 알 수 없어."
"그럼 그 의식 자체를 일단 너는 할 수 있고?"
"그런 대주술을 나 혼자서 준비하는 건 불가능해. 엘프의 장로회.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할 수 없어."
"복잡해 돌아가시겠네. 쉽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엄청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데려온 녀석이, 까보니까 도움 되는 게 거의 없잖아?"
그리 말하는 현재의 태도는 묘하게 자신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파탈리테는 그리 느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게 싫은 거야?"
"재료 조달부터가 문제니까. 어디서 1만 명을 잡아오냐."
글쎄, 정말로 기꺼이 몸을 바칠 1만 명이 있으면, 힘을 위해 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재는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척을 하고 있지만, 본심은 다르리라는 느낌을 파탈리테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냥 꺼려진다고 말하면 될 텐데, 강한 척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자신이 인정을 가진 인간이란 걸 부정하고 위악적이고 싶은 것일까? 둘은 같은 소리인가?'
위선의 반대, 위악. 보통은 그런 짓으로 얻을 이득이 없기에 저지르는 이가 거의 없는 행동 양식이다. 이상하구나. 파탈리테는 현재를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현재가 몸에 밴 윤리, 도덕, 법과 규칙을 모조리 잘라내야 했던 때의 흔적이란 것을 파탈리테가 알아채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를 일이다.
'1만 명을 바치는 일 따위 꺼리는 게 당연한 일이지.'
파탈리테는 산 제물 1만을 바치던 그날의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모든 절망과 증오와 저주와 원념을 이 작은 몸 안에 새겨넣던 그 날을.
그것은 집단적 자살이었다. 누구에게 강요 받는 이가 없었음에도 1만이나 되는 엘프가 기꺼이 그 목을 바쳤다. 그냥 견디며 살아가기에는, 신께 저주 받은 종족이 감내해야하는 고통이, 평생 얻을 삶의 기쁨보다 압도적으로 크다고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자살은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는 것인데, 그들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생. 그러나 자기들은 그를 위해 겨우 목숨을 바치는 것 밖에 하지 않을 거면서, 그 모든 과업의 무게를 한 소녀의 어깨에 전부 올려놓았다.
그 무게, 태산과 같다. 짊어진 채로는 한 발 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마치 세계를 그 작은 손 위에 올려놓고, 이제부터 전부 네가 지탱해다오 강요하는 느낌과 같았다. 파탈리테가 그 의식을 치를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0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까. 세계를 전부 들어다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듣고 만다면, 세계를 정말 제 손 안에 들 수 없으니, 차라리, 물구나무 서서 내가 세상을 들어올렸노라 우기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파탈리테는 물구나무 섰다. 완전히 거꾸로 돌아버렸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보아라, 내 손 위에 세계가 있지 않느냐?
'참으로 웃기는 소리다.'
그러나 실은 그녀도 그게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임을 알고 있고, 그녀의 안에 있는 인간성은 그것을 버티지 못했다.
포기하기를 원한 것이 수천 번.
그 수천 번의 포기마다 하나의 목숨이 다가와 이렇게 종용했다.
움직여. 넌 내 목숨을 받았잖아. 가서 싸워. 너는 내 꿈을 대신 받았잖아. 내 목숨과 꿈의 몫 만큼, 네가 가서 싸워.
일만 번의 후회와 체념을 겪으면 그 목숨 값을 다하여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직도 파탈리테는 자신의 종족을 구원하기를 원했다.
그 손에 달린 것은 백만이 넘는 동포의 구원이었으니.
부디, 여왕이시여, 저희를 이끄소서.
그녀는 모든 엘프들을 이끌 여왕이었나?
그들을 위해 대신 싸울 대전사였나?
아니면, 그들의 절망과 절규를 대신 짊어지고 그것을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줄 산제물이었나?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걷는다. 영원히 싸워야 하는 수라의 길을.
"나는 너하고는 짊어진 무게가 달라."
파탈리테는 말했다.
"내가 실패하면 백만을 넘는 동족이 구원 받지 못한 채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 무게에 입이 떨리는 일은 없었다.
"너 자신의 안위, 기껏해야 연인까지 두 사람 분의 안위만 생각하는 너와는 마음가짐이 다르단 거다."
그녀는 다시 새긴다. 자기 마음을 파내가면서 싸움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새긴다.
"그러니까 방해되지 말고, 똑바로 일해."
"내가 할 소리."
이곳에서 엘프의 여왕과 약오름의 신의 사도는 동맹을 맺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면서, 그러나 다른 이유로써.
* * *
아침을 먹는 동안 현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아의 시선을 느꼈다.
"왜 그래?"
"아니야."
현재는 먹던 것이 뭐 묻었나 싶어 입술 위를 엄지로 훔쳐보았으나 아무런 음식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현재의 얼굴에 꽂힌 미아의 시선은 여전했다.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런 건가?"
"응."
너무나 빠른 즉답. 하지만 평소의 꿀 떨어질 것 같은 사랑스러운 시선 대신 묘하게 차가운 시선에 현재는 고민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상처를 씻어줄 때도 뭔가 일부러 아프라고 팍팍 닦은 느낌 같은 게?'
말라붙은 피를 뜯어냈으니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뭔가 상처를 씻어줄 때도 일부러 난폭하게 꾹꾹 눌러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뭐 잘못했어?"
"글쎄?"
이번에도 즉답이 나왔고 글쎄라는 대답은 응이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했을 테니까.
아니라고 대답했어도 응이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일단 글쎄라는 대답은 무조건 응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았다.
'뭘 잘못했지?'
현재는 배에 올라타 벌어진 일을 차근차근 복기해보았다.
운하 바깥쪽 길에서 배를 발견하고 각력을 사용해 크게 도약해 물에 발 한 번 딛지 않고 배 안에 착지했다.
놀라는 선원들과 선장을 무시하고 달라붙는 케이트를 매몰차게 떼어낸 채 곧장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한 뒤 미아가 물을 받으러 간 사이 옷을 갈아입고 파탈리테에게 피를 빨게 했다.
이후 파탈리테에게 아티팩트와 마법에 대해 묻고 주술이라는 답을 얻은 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큰일이다.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현재는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미아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혹시 알려줄 생각은 없니?"
연애 경험 한 번이 없던 현재는 '오빠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를 실제로 당하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미아는 꽁한 표정으로 현재를 바라보다가 에휴 하고 한숨을 한 번 쉰 뒤에 자신이 토라진 이유를 알려주었다.
"갑자기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나한테는 그렇게 꽁꽁 숨겨놓고선, 새로 들어온 리테한테는 아주 쉽게 술술 불어주네?"
"아."
미아는 3년 넘게 같이한 데다가 연인이 되기까지 한 자신보다 파탈리테가 먼저 현재의 힘의 근원을 들은 게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물론, 미아에게 숨기고 몰래 말한 게 아니라 미아도 있는 곳에서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것이었다.
"미안. 하지만 이 녀석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런 공감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
"나한테는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고?"
"그게 아니라, 타이밍을 놓쳤달까? 괜히 그런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없었잖아? 엄청 중요한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미아가 사랑 고백을 하기 전에는 얘기해줄 생각이 없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뒤에는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다. 현재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미아는 그리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어차피 몸만 있으면 되는 섹스 인형이지. 마음대로 하세요. 오늘은 어딜 갖고 놀래? 가슴? 엉덩이?"
미아의 서운함은 설명만으로는 풀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재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고백하기로 했다. 그러면 아마 그녀의 화도 풀어지리라.
"잠깐 따라와봐."
현재는 미아의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으로 데려왔다.
"미안해. 근데 진짜 별로 말할 필요 없는 얘기라 생각했어."
"아니야. 언제 말해주나 믿고 기다린 내가 잘못했지. 당장 말하라고 꼬치꼬치 캐물었어야 하는데. 묻지 않았던 걸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화내는 내가 이상한 거야. 그치?"
"아니, 알려주기 싫어서 안 알려준 게 아니고 정말 안 알려줘도 될 이야기라 생각했다니까? 내 힘이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강한 건지가 우리 사이에 그렇게 중요한 거야?"
"……."
미아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더니 현재의 가슴팍을 똑똑 노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다른 여자한테 먼저 말해버린 건 서운해."
"내가 쟤를 여자로 보겠냐고. 가슴도 아예 없고 키도 땅딸보만한 꼬맹이인데."
"그렇지? 현재는 내 가슴에 완전 푹 빠졌잖아."
"맞아. 지금도 만지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럼 만져. 언제부터 내 눈치를 봤다고."
미아가 팔짱을 키며 그 커다란 가슴을 위로 불쑥 들어올렸다. 현재는 그 위로 손을 얹어 부드러운 가슴을 주물거렸다.
"최고다! 미아!"
"흐응."
화가 풀린 건지 심해지는 건지 알 수 없는 분위기로 코웃음을 치는 미아. 현재는 미아에게만 말하기로 결심한 비밀을 지금 털어놓기로 했다.
"미아, 이건 나하고 계약한 여신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너도 꼭꼭 숨겨줘야 해."
"뭔데?"
"사실 내 상태창과 능력치는 공짜로 받은 게 아니라 빌린 거야. 그래서 열심히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벌어서 갚지 않으면 안돼. 못 갚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벌어야 하는 양이 엄청나다는 건 알아둬."
"뭐라고?"
미아는 방금 전까지의 오묘한 분위기는 모두 날려버리고 상당히 당황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가, 하긴, 아무 대가 없이 그만한 힘이 생길 리가 없지."
"응."
"얼마나 갚아야 되는데?"
"레벨 210 분량."
"허."
미아는 알았다. 레벨 40까지 올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런데 210이라니, 그건 그냥 터무니 없는 소리처럼 들렸다.
"잘못 엮인 거 아니야? 처음부터 갚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벌을 주려고 함정을 판 걸지도!"
"하지만 그날 나는 그냥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계약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이야기는 끝났겠지."
그리고 거기서 현재를 죽일 뻔 했던 건 미아였다. 갑자기 과거의 죄상이 회고되자 미아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함에 절은 그녀는 시선을 돌리면서 현재가 좋아할 법한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주인님. 이 죄인의 몸을 마음대로 갖고 놀아주세요."
"아니야. 전에 말했잖아. 네가 날 대했던 모든 태도가 내가 이 세계에 잘 적응하길 바래서란 걸 알았다고."
"현재야……."
"그래서 애널 플러그 아직 끼고 있니?"
"……."
현재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미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겨우겨우 입을 떼어 말했다.
"아뇨, 뺐는데."
"그럼 혼나야겠네."
미아는 긴장감에 덜덜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