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1화 (1/119)

아르젠타의 영웅

* * *

"돌아가라고?"

"그래."

남자의 물음에 소녀는 단호히 답했다. 그러나 그 뿐. 설명은 사족이라는 듯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이 났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나는 그냥 돌아가라고?"

"보상이 신경 쓰이는 거야? 그런 건 어련히 챙겨줄 테니까 일단은 바깥에 나가 있어."

챙겨준다라. 뭘 얼마나 챙겨주겠다는 걸까. 백 분의 일? 아니면 천 분의 일? 소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이유는 보상의 독식 외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남자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리 생각하라 가르친 것부터가 소녀였다. '아무도 믿지 마라.'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항상 한 번 더 생각해라.' 그걸 가르친다는 빌미로 얼마나 많은 험한 꼴을 겪어왔던가. 어느 순간부터 세기를 포기했기에 정확한 횟수는 기억할 수 없었다.

이곳은 지하 던전의 끝자락. 남은 것은 최후의 보스룸 하나 뿐. 던전의 주인을 쓰러뜨린 후에 얻을 보상은 눈 앞에 다가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초 던전에 발을 들일 때는 활잡이와 좀도둑까지 총원 4명의 파티였다. 그리고 둘은 죽었다. 활잡이는 고블린의 독화살에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다 죽었고, 좀도둑은 자신이 아는 함정이라며 방심하다 떨어진 천장에 짓눌려 쥐포가 되었다.

그리고 어려운 던전에는 큰 보상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당연한 법칙이고 약속이었다. 허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그 보상을 눈 앞에 두고 반목을 일삼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그 보상마저도 던전의 시련에 포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탐욕, 동료의 유대를 시험하는 시련. 그리고 남자와 소녀는 그 시련에 의해 커다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아니, 실은 갈등이 일어날 여지는 없다. 남자 측은 자격 미달, 제대로 된 파티원이 아니었다. 그의 힘으로는 제대로 된 전투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의 역할은 그저 '짐꾼'. 제대로 된 '동료'가 아니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는 '신의 은총'이 이 남자만은 비껴나가고 있었기에. 그 커다란 체구와 험한 인상과는 달리 남자는 소녀를 상대로 싸울 경우 단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한다. 생사결이라면 그대로 목숨까지 빼앗기겠지.

그러니까 갈등의 여지란 없다. 왜냐하면 반항은 곧 죽음이기 때문. 문명과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이 던전 아래에 그를 수호해줄 '법'과 '도덕'은 없다. 그저 힘의 논리만이 존재할 뿐. 소녀를 거스르면 죽는다. 남자는 그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항상 올바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만은 않는다. 남자는 지쳐있었다. 삶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감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걸 안다. 무력감은 사무치게 느껴보았다. 익숙한 일이다. 이런 부조리 몇 번이나 겪었고 또 참아왔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만은 더 참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참으면 되는데 왠지 오늘따라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왜였을까, 그건. 너무 오랜 고난에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게 하필 오늘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죽어버린 두 사람을 보며 불쌍하다는 연민 대신 삶이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구나 하고 부러움을 느껴버렸기 때문에? 남자 스스로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두 가지가 대충 섞인 것이겠지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다.

"싫어."

싫어서 싫다고 말했다. 그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남자는 여태까지 수많은 싫음을 속으로만 삼키고 그래라고 대답해왔으니까. 소녀가 그렇게 가르쳤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요즘은 좀 조용하다 싶더니, 갑자기 왜 그래? 내 주먹 맛이 그리워졌어?"

소녀는 반항을 용납치 않는다.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에 쥔 검을 확인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검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질 걸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 그것이 지금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보상을 혼자 다 챙길 셈이지? 너 혼자 확인하고 별 거 아니었다고 하면, 나는 뭐라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래서 혼자 열어보려는 거잖아?"

"하아."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계속 말했다.

"아무리 내가 짐꾼에 잡일꾼이라도 목숨 걸고 따라온 거야. 보수는 제대로 챙겨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주는 보수는 너무 짜. 혼자 다 쳐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까지 욕심 부리려는 거냐고."

소녀의 눈빛에 미안함 따위의 감정이 담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서는 아까보다 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보수가 불만이면 도시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자세로 부탁을 했어야지. 이런 던전에서 둘만 있을 때 화를 낸다고 뭐가 될 거라 생각해? 그게 약자로서 올바른 자세야? 현재야.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줬잖아. 약한 주제에 그러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소녀는 느긋하게 검을 겨눴다. 둘 사이에는 기습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 그런데 정면 대치라니 그냥 자살 행위라고 바꿔 써도 틀릴 것이 없었다.

"지금 무릎 꿇고 빌면 주먹 열 대로 봐줄게. 빌지 않으면 죽일 거야."

"좆까!"

현재는 굳이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하나 빼 중지를 쳐들어보였다. 어차피 그가 검을 한손으로 쥐건 두손으로 쥐건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질 거니까.

더 싸늘해질 수 없을 것 같던 소녀의 눈빛이 한 층 더 차갑게 얼어붙어갔다.

"그게 대답이구나. 그럼 죽어."

둘 사이의 거리는 십 미터 가량, 소녀의 키는 160센치미터 남짓. 보폭을 생각하면 최소한 다섯 걸음 이상은 뛰어야겠지만, 탕! 하고 쏘아진 소녀는 두 걸음에 거리를 좁혀 현재가 검을 쥔 손을 찼다. 칼로 찌를 필요도 없다는 듯, 평소라면 현재는 그것으로 검을 놓쳐 상황이 끝났겠지만,

"그윽!"

현재는 손이 부러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검을 놓치지 않은 채 그대로 찔러들어갔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 발악이 소녀에게 스치는 상처라도 입힐 수 있기를 기도하는 발악.

"커억!"

그러나 기적은 없고 정해진 결과대로. 소녀는 단 한 치의 여유를 두고 검을 피하며 돌려차기로 현재의 가슴을 쳐냈다. 몸이 하늘을 날았다. 날개 없는 이의 비행은 필연적으로 추락이란 최후를 맞이하고, 현재는 천장에 한 번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우우웅!

가슴팍에 받은 충격 탓에 제대로 된 낙법을 펼칠 수 없었다. 신장 190센치 이상, 체중도 세 자리 수에 가까운 그는 그 무게가 낙하하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했다. 즉사까지는 아니었으나 명백한 행동불능.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충격이 몸에 닥쳐들었다.

"윽……, 으윽……, 그으윽……."

곧 숨이 넘어갈 듯이 신음하는 현재. 소녀는 무슨 생각인지 마무리를 짓지는 않고, 여전히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배운 게 없구나. 약한 자에게 살 길이란 바짝 엎드려 강자의 자비를 구걸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3년이나 지나도 배우지 못하는 거야? 등신."

현재는 억울했다. 본래 그가 살던 세계는 이토록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비록 힘 대신 돈의 논리가 지배하고, 바로 옆 나라만 가도 기아와 역병이 창궐한 세계였지만, 그래도 그가 살던 대한민국은 이보단 훨씬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세계에 떨어져서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떠오르는 것도 없어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아마도 곧 죽게 될 이 순간까지도. 억울할 뿐.

'약오름의 신이시여! 제발 저 나불대는 입을 닥치게 할 힘을! 무슨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까 제발!'

다가온 죽음 앞에서 현재는 신에게 기도했다. 어리석은 짓은 아니었다. 지구가 아닌 이 이상한 세계에는 명백하게 기적을 내리는 신이 실존하고 있었고 그 증거가 넘쳐났으니까. 하지만 너무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 세계의 신은 이방인인 현재에게 인간은 당연히 누려야 할 축복조차 내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현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강해지기는 커녕 인간 구실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까.

[정말 무슨 대가를 치러도 좋으냐?]

그런데 이 때, 현재가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한 순간에,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던 신이 응답했다.

[정녕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는 것이냐?]

'예스! 예스! 무슨 대가라도 좋으니까 저 입을 다물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현재는 약오름의 신과 계약했다. 다른 세계로 날아온지 3년 만의 일이었다.

* * *

유현재, 21살, 호텔 주방의 막내.

평소와 같이 좆 같은 날이었다. 주방의 막내란 사랑 받는 가족의 막둥이와는 많이 다른 의미라서 아주 거지 같은 위치였다. 일단 양파 까기 마늘 손질하기 같은 손 많이 가고 귀찮은 일은 모두 독차지였다. 그걸 훌륭히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쉐프의 의미 없는 짜증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다고 선배들은 고마워 했는가? 아니, 그것으론 모자랐는지 자기들끼리 싸워놓고 화풀이를 현재에게 했다.

현재의 소원은 보통 하나였다. 퇴근하기. 그런데 오늘은 둘로 늘어나려 하고 있었다. 퇴직하기. 하지만 기반 없는 자신이 멋들어진 식당의 주인이 된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요리 경험과 자본금이 필요했다. 그 둘 모두 이 호텔 주방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육체의 고단함은 어떻게든 버틸만 했으나 이 지랄 맞은 인간들은 어떻게 모두 성격이 개좆같은지 하루에도 몇 번 씩 식칼로 찔러 죽이는 상상을 할 정도였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너 충재한테 내 욕했다며?"

"안했습니다."

"안 하기는 지랄. 선우가 다 들었다는데."

현재는 억울했다. 지금 와서 지랄을 하는 현호에 대해 욕을 한 것은 충재였고, 현재는 수긍도 반응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굳이 한 말을 기억해보라면 그랬군요 그러시군요 하는 추임새 정도 뿐. 충재는 10년 선배인 아저씨기에 현재가 뭐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호는 또 8년 선배라 뭐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현호에게는 충재가 2년 선배라 뭐라 할 수 없으니까, 만만한 현재에게 와서 지랄을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화풀이였다.

"하늘 같은 선배가 우습냐?"

퍽! 퍽!

현호는 현재의 가슴팍을 퍽퍽 쳤다. 감정을 실어서, 충분히 강하게. 주방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억센 손에 든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폭행죄로 신고하면 잡혀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정작 다치지 않는 곳을 노려 쳐서 어중간한 벌금만 나올 공산이 컸다. 때리는 데에도 요령이 있다는 것이고, 현호는 그것에 능숙하다는 거다.

현호를 고소한다면 분명 현호는 일자리를 잃겠지만, 그와 동시에 현재도 이 주방에 계속 있긴 힘들 것이었다. 한 명만 미쳤다면 미친 사람이 잘못이지만, 모두가 미쳐있다면 미치지 않은 사람이 잘못이니까. 이 주방은 그렇게나 악폐습이 가득한 곳이었다.

큰 상처는 지지 않게, 가슴팍에 멍이 들 정도로만 때리고서 현호는 가버렸다. 현재는 퇴근할 때까지 오른 열을 식힐 수 없었다. 괜히 어디 화풀이라도 했다간 한 번 더 지랄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스읍."

그는 퇴근길에서야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화를 삭였다.

"씨발새끼. 막상 붙으면 좆도 아닐 새끼가."

현재는 컸다. 키는 190센치를 넘고 체중도 그에 걸맞았으며, 힘든 주방일을 한 덕에 여기저기가 근육질이었다. 현호도 주방일을 오래한 사람 답게 힘은 충분히 좋았으나, 키는 170 중반. 현재에 비하면 덜 자란 아이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기에 현재는 제대로 붙으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자기가 참아주는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비록 자신이 진짜 싸움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문명의 시대. 그래도 선진국인 한국 사람이다.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할 일은 매우 드물며, 그렇기에 현재 또한 제대로 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맞고 나면 확 엎어버릴까 하는 분노가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죽여버리고 싶네, 진짜. 법만 없었어도."

그래서 현재는 상상했다. 법이 지켜주지 않는 세계. 정확히는 현호를 지키는 법만 없는 편리한 세계지만, 이 정도 억지는 부려도 되지 않겠는가? 오늘 그리도 억울하게 맞았는데.

끼이이이익!

커다란 소음과 함께 트럭이 현재를 덮쳐들었다. 현재는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하마터면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할 뻔 했다. 현재는 자신의 놀라운 순발력에 감탄하고 또 건물에 쳐박은 트럭 운전 기사를 걱정하며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119를 부를 요량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던 그는 이상하게 주변이 어둡고 시끄러운 걸 느꼈다. 구름이 해를 가렸나? 올려다본 하늘에서 그는 매우 이상한 것을 봤다.

비행기의 밑면. 일반적으론 볼 일이 없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일을 한다면 모를까.

"여긴 활주로도 아닌데."

현재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한 마디를 뱉어보았으나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그리고 비행기는 크고 빠르다. 즉 피하기가 존나 어렵다는 뜻이다.

"씨발!"

현재는 열심히 달렸으나 사람의 발로써 추락하는 비행기를 피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결국 추락하는 비행기에 깔려 생을 마감했다. 향년 21세. 기대수명 100세가 논해지는 시대에선 지나치게 짧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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