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마약(1)
* * *
사건이 대충 일단락된 직후.
나는 서지유의 소파에 누운 채 맥주를 홀짝였다.
믿었던 예리엘의 배신.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된 나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앨리스의 집에 가자니, 우리집 바로 아래층이다.
'아예 결혼하기 전처럼 호텔에 갈 수도 없단 말이지.'
내가 호텔에 투숙하면 곧바로 예리엘과의 불화설이 대형 언론사의 1면을 장식할 것이다.
어설픈 거짓말 따위가 아니라, 진실이기에 더더욱 숨겨야 하는 사실.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해프닝으로 끝나야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근데 집 좋네. 횡령한 돈으로 샀어?"
"아, 아니거든요..."
서지유는 설득력 없는 변명을 하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라면 '집에선 옷 벗고 다닌다고 하지 않았느냐' 같은 딴지를 걸며 놀려대야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기력조차 없다.
머리가 혼란스럽고 온몸이 피곤하다.
예리엘은 고의적으로 가짜 그린 더스트를 놓아줬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하면, 절대로 장난 따윈 아니었을 것이다.
뭐... 사실 예리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잡을 수 없었던 놈이다.
어차피 불법 사이트의 운영자는 이미 사망했으니, 놈을 놓친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예리엘이 작전에 앞서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리엘이 왜 나를 속였겠어? 내가 반대할 줄 알았으니까 아무말도 안 했던 거지."
"..."
즉. 이건 그녀가 놈을 놓아준 동기가 불순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 된다.
뭔가 크고 좋은 뜻이 있었다는 것은 알겠지만, 가짜 그린 더스트 본인에게는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결정.
그게 아니라면 내 의견을 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도대체 왜..."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언제나 든든한 아군으로 여겼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돌변하다니.
원래 적으로 돌리면 답도 안 나오는 사람이다.
"그, 그래도 나쁜 뜻으로 하신 건 아닐거예요. 아마도요."
서지유는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주려 애썼다.
딱히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진 않지만...
저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예리엘의 평소 행동과 인품을 말해준다.
나도 그녀에게 뭔가 큰 뜻이 있다고 믿고싶었다.
이제와서 적으로 돌리기엔 너무 크고 강한 상대다.
심지어 그녀는 오라클에 대한 것까지 전부 알고있지 않던가.
내가 끙끙 앓는 꼴을 보다못한 서지유가 맥주캔을 가볍게 부딪혀왔다.
"오늘은 일단 마시죠. 당분간은 저희 집에서 지내셔도 되니까요."
"오오, 역시 내 2번째 아내."
"... 저 진짜 화낼 거예요? 그나저나 현직 수사관이 이래도 되는 건가?"
"괜찮아. 간통죄는 오래전에 폐지됐으니까."
자포자기한 채 아무렇게나 지껄이던 나는 뒤늦게 사과했다.
"미안. 못 할 말이 나왔네."
"아, 아녜요. 자자, 얼른 한 잔 더..."
딩동!
그런데, 영 불쾌한 초인종 소리가 귀를 울려댔다.
서지유는 예리엘이 찾아온 줄 안 듯. 반사적으로 움찔했으나...
예리엘이 그 정도로 경우가 없을 것 같진 않다.
나도 생각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녀가 직접 찾아오면 사실상 강요 내지는 납치나 다름없다.
"뭐야?"
"주인님!"
다행히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것은 다름아닌 티아였다.
지난번 작전에서 주입받은 마력이 좀 덜 빠진 녀석은 상당히 어중간한 사이즈가 되어있었다.
녀석은 꼬리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나를 살짝 올려봤다.
"역시 여기 계셨네요. 주인님이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안 돼. 진심으로 말해."
"저 집에 못 있겠어요..."
티아는 금세 울상이 된 채 내게 애원했다.
"앨리스 언니가 그 정도로 언성을 높이는 건 처음 봤어요. 예리엘 님도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고... 완전 지옥 같은 분위기라구요."
"어차피 너는 아래층에 살잖아."
"밥 얻어먹으러 가야죠."
"근데 진짜 그게 전부야? 예리엘이 따로 별 말은 없었고?"
내가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려는 티아를 밀쳐내자 곧바로 실토하는 녀석.
"주인님이 잘 계신지 보라고만 하셨어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인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살짝 비켜주자 호다닥 들어오는 녀석.
서지유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얼굴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우와, 집 좋네요."
"다들 그 소리네. 나는 도대체 직장에서 어떤 이미지였던 거지?"
"돈 빌려주고 싶지 않은 상대 1위요."
"정확하군."
나와 티아는 그대로 서지유의 집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출근했다.
사무실에서 마주친 앨리스는 살짝 뿔이 난 표정으로 별 말 하지 않았다.
언뜻보면 언제나 열받아있는 것 같은 그녀지만, 오늘은 진짜다.
"서지유랑 샴푸 냄새가 똑같아서 기분나빠."
"거 참 미안하게 됐네. 그, 예리엘은..."
"몰라. 알게 뭐야."
하다하다 앨리스가 예리엘의 이야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하긴. 그녀도 마땅히 분노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후속 조치를 실시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인터넷 박제소 사이트는 당연히 폐쇄.
운영진이 사망해버려서, 유사한 사이트 따위도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짜 그린 더스트는 결국 무사히 도주했고, 아직까지 추가 범행은 없다.
경찰이 이송중인 보호 대상을 습격한 것을 보고 공범이 존재한다고 예상했으나...
그 공범들이 바로 사이트 운영진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앨리스는 한참을 삐져있다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가짜 쪽은 당분간 걱정할 필요없어. 놈은 앞으로 블랙 로터스를 추적할 거래."
"그, 그래?"
"확실해."
역시 예리엘이 놈을 그냥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다.
사죄는 이미 몇 번이고 받았지만, 제대로 된 설명 따윈 듣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 걸까.
과연 화해가 가능하긴 한 건가?
복잡한 생각에 괴로워하던 나는 이 울분을 범죄자들에게 풀기로 했다.
마침 오늘은 딱 적당한 사건이 접수됐다.
"팀장님. 경찰 마약반에서 협조 요청입니다."
"마약?"
그러고 보니 특수대의 첫 사건도 마약이 엮여있었던가...
앨리스와 외출했을 때에도 마약 사범을 적발해냈고, 얼마전의 인터넷 박제소 운영자들 중에도 마약 사범이 있었다.
분명 마약을 메인으로 수사한 적은 없는데 그런 것치곤 이래저래 자주 엮였다.
그동안 수사 드라마를 꽤 열심히 본 티아가 마약이라는 소리를 듣곤 두 눈에 불을 켰다.
"이번에는 범죄 조직 소탕이군요?"
"아, 그게... 좀 애매해."
"애매하다뇨?"
나는 이쯤에서 최근 마약 거래의 메타에 대해서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애들이 마약반에게 창피를 당하게 할 수는 없다.
"요즘은 마약 범죄의 대세가 많이 바뀌었어. 최대한 조직 범죄가 아닌 것처럼 저지르는 게 포인트지."
"오오... 어떻게요?"
"일단 공급자와 판매자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같아. 하지만 그들은 서로 만나진 않아."
외국인 위주의 클럽에서 마약을 거래하던 것도 옛말이다.
요즘은 '던지기'라는 수법이 대세.
익명 채팅 앱을 이용해서 구매자와 접선한 다음에 돈을 받고 주소를 알려주는 것이다.
구매자가 해당 주소로 가보면 은밀하게 숨겨져있는 마약을 얻을 수 있다.
남의 집 우체통이나 환풍기, 벽돌 아래 등등. 아무래도 부피가 작다보니까 숨길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식으로 거래를 진행하면 서로의 접촉이 최소화 되어서 굉장히 안전하다.
나중에 누구 한 명이 잡혀도 줄줄이 엮여들어가지 않는다. 왜냐면 진짜로 만난 적이 없으니까.
"법적인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지. 번거롭긴 해도 조직 범죄로 엮여서 처벌받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럼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는 거 아니야?"
"어차피 마약 중독자들 상대로 장사하는 거라서 괜찮아. 놈들은 사소한 불편함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지."
당연하지만 약쟁이가 판매자로 전직하는 경우도 곧잘 있다.
애초에 판매자들 중 마약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 놈이 더 희귀할 정도.
아무래도 고객 출신은 마약범죄를 얕볼 수밖에 없다.
"마약류 사용 및 판매가 중범죄라곤 하지만, 실제로는 징역 2년 이하에 집유까지 뜨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엑. 그 정도였나요?"
"그렇지. 아, 물론 초범 기준이야."
이 정도면 거의 명목만 중범죄인 수준.
어쩌면 마약 쪽도 충분히 보편적 범죄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얌전히 설명을 듣다가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우리 특수대에 협조를 요청했다는 건, 헌터가 엮여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아마 생산업자일 거야."
"아하."
원래 한국의 마약상들은 수입 전문으로 활동했다.
한국은 땅이 너무 좁고 사회감시망도 촘촘해서 도저히 마약을 제조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체내에서 특정 화합물을 제조할 수 있는 헌터들은 거의 걸어다니는 공장 수준이다.
물론 그런 능력은 제법 희귀한 편이지만, 이미 길을 벗어난 무허가 헌터들에게 마약제조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뭐니뭐니해도 엄청난 고수익 직종이니까.
헌터들의 등장 이후, 마약상들도 깨달았다.
수입만 하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서 파는 것이 훨씬 많이 남는 장사다.
"단속반의 입장에서도 항구만 틀어막는 것보다 육로와 항로를 동시에 감시하는 게 훨씬 힘들단 말이지. 단속반 인력이야 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족했고."
"으음..."
"그럼 얼른 가자. 경찰 친구들 기다리겠다."
이 정도면 어디서 창피는 당하지 않겠지.
하지만... 잠시 뒤.
나는 티아가 마약반의 앞에서 신나게 아는 체를 하는 것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마약반은 무척 대견하다는 눈치로 티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얘 엄청 잘 아네. 역시 특수대 소속은 좀 다르군."
"오, 던지기도 알고 있어? 그럼 설명이 빠르겠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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