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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103화 (103/131)

〈 103화 〉 출장(4)

* * *

일본 출장에서의 마지막 강연.

이젠 나도 노하우가 좀 쌓여서 중간중간 농담도 던지며 적당히 여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첫날 이후로 청중들이 던지는 질문이나 지적이 제법 많이 중복돼서, 이젠 대충 예상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이라 그런 것일까.

아직 머리가 덜 굳은 대학생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말해서 좋은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에 꽂히는 구석이 있었다.

"좋은 강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강연에서 소개된 대부분의 헌터 범죄 케이스들은 한국 특유의 사회감시망과 높은 인구밀집도 덕분에 검거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수사관님 께서도 그것을 몇 번이나 강조하셨구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협회에서 붙여준 통역을 놔두곤 직접 대꾸했다.

이쪽도 간단한 일본어 정도는 할 줄 안다.

특히 범죄와 수사 관련 어휘는 자신이 있다.

"다만 그게 꼭 헌터 범죄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아..."

대학생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자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과연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헌터들은 명백히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헌터 범죄에 대비하려면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한 단계 더 진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하셨던 부분들은 역시 인권침해 문제가..."

"그럼 헌터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선 헌터들을 모두 감시하는 것이 최선이란 말씀이신가요?"

"하하. 여러분, 강사님께서는 어디까지나 헌터 범죄 예방 및 검거라는 입장에선 이야기를 드리고 있으니 그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헌터 범죄는 근절할 수 없다.

일반 범죄도 근절이 안 되는데, 헌터 범죄를 잘도 근절하겠다.

그러나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사회는 헌터들을 통제하기엔 너무도 연약하다.

만약 블랑쉬와 회사의 힘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나도 해결을 하지 못한 사건이 더더욱 늘었으리라.

나는 처음부터 이기지 못할 싸움에 뛰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밀려드는 질문들을 어찌어찌 잘 수습해서 강연을 끝내자, 마침내 관광 시간이 됐다.

예리엘과 함께 느긋하게 후쿠오카를 즐기던 나는 때마침 수석 에스콰이어의 보고를 받았다.

[본사로 귀환 완료... 작전 성공입니다.]

"수고했어."

[마스터 쪽은 괜찮습니까?]

"의심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호텔 근처의 카메라까지 확인해봤으니 어쩔 수 없겠지. 초록색 머리는 어때?"

[아주 얌전합니다. 솔직히 조금 걱정될 정도군요.]

"..."

나는 현장에서 블랙 로터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녀석의 말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무척 기분이 나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속으로 마음을 굳힌 나는 수석 에스콰이어에게 당부했다.

"그 녀석, 수상한 정황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어. 부품을 떼어내기 전에 제대로 검사해줘. 알겠지?"

[마스터 매튜께서 폭주하지 않으시도록 주의하죠.]

"역시 말이 통한다니까."

수석 에스콰이어도 위화감을 느꼈다면 다행이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예리엘과 함께 초콜릿 가게로 들어갔다.

내일 귀국인지라 팀원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늦지 않게 호텔로 귀환.

객실에서 적당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본사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초록색 머리에 대해서 조사해본 매튜는 썩 밝지 않은 얼굴이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뭐지?"

[초록색 머리의 자연감응 능력 말인데, 아무래도 사용자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미 연구자 모드가 된 매튜 마누엘은 백의를 걸친 채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개체가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 강한 자극에 시종일관 노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

"그, 그런..."

초록색 머리의 자연감응은 블랑쉬도 가지고 있는 천리안의 특화 버전이라고 한다.

그걸 레이드 보스급의 마력으로 마구 남발해대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티아마트의 머리들은 대부분 자매들과 따로 떨어져서 자유를 얻었다고 느껴졌는데...

이 녀석은 그 반대였다.

자매들과 떨어지며 능력이 제대로 발현된 탓에, 막대한 부하를 견딜 수 없게 됐다.

매튜는 담담히 결정사항을 읊었다.

[만약 초록색 머리가 체력 담당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거나 미쳤을 거다. 자연감응 능력은 이 녀석에게 해가 될 뿐이야. 지금부터 능력의 주축인 양쪽 뿔의 절제 수술을 시행한다.]

"잠깐, 그거 그렇게 막 떼어내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일이 그렇게 쉬웠다면 본인이 직접 뗐을 것 아니냐.]

모자란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열받았지만 그 내용은 구구절절 옳았다.

다행히 매튜는 다 계획이 있었다.

[이 뿔은 신경계와 이어져있는 것 같군. 그린 더스트를 이용해서 능력의 작용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A급 치유사와 함께 절제 수술을 실시하겠다. 나는 마구잡이로 일을 하지 않아.]

"그야 그렇지."

지난번에 블랑쉬의 개조를 강행했던 것을 애써 무시하며 어렵사리 동의해주자 주저없이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초록색 머리는 그야말로 시체 그 자체였는데...

매튜가 그린 더스트를 이용해서 능력을 억제시키자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읏...]

[괜찮나?]

[그, 그걸로 뭘 하려고?]

수술용 줄톱을 발견한 초록색 머리가 어눌한 말투로 묻자 매튜가 태연히 대꾸했다.

[뿔을 자를 거다. 신경이 연결되어 있으니, 아무리 몬스터라도 수술이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어.]

"매튜, 넌 진짜 최악의 의사야."

[참고로 의사 자격증은 없다.]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의도 따윈 조금도 없는 통보에 경악하고 있자 초록색 머리가 더욱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자르면... 해방될 수 있는 건가?]

[네 자연감응 능력의 주축은 그 뿔이다. 안테나 역할을 하는 뿔이 사라지면 정보를 수신할 수 없게 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마음대로 해줘.]

녀석은 질문을 그만두곤 수술대 위로 머리를 떨궜다.

매튜는 신중하게 지시를 내리며 수술을 시작했다.

스슥...

마취는 무난하게 성공했지만, 몬스터라서 그런지 수면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초록색 머리는 본인의 뿔을 슥슥 자르는 동안 미동도 없었다.

다행히 장시간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 듯 했다.

적어도 수술이 끝나자마자 환자가 죽진 않았다.

양쪽 뿔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초록색 머리는 멍하니 손을 들어올려서 그 자리를 슥슥 만져봤다.

매튜는 겁도 없이 그린 더스트를 치우며 녀석에게 물었다.

[어떻지?]

[... 조용해. 너무 조용해.]

[잘 됐군. 신경이 노출되어 있으니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짜 뿔이라도 달아줄까?]

[아니. 뿔은 이제 지긋지긋해.]

처음으로 우리에게 거부감을 표시하는 초록색 머리.

매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절단부에 작은 보형물만 붙여주지.]

[마음대로 해. 나는... 좀 자야겠어.]

녀석은 다시 수술대 위에 드러눕더니 매튜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마무리 작업을 시작한다.]

그대로 진짜 잠들어버린 초록색 머리는 수술이 끝나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아의 말에 따르면, 아마 10년 정도는 거뜬히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용족들은 원래 잠을 좀 길게 몰아서 자거든요."

"그래? 길게 잠들어주면 우리야 좋지."

"오랜만에 잘 끝났네요."

붉은색 머리와 일본 헌터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초록색 머리와의 합의는 아주 원만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매튜는 정작 블랑쉬의 업그레이드에 대해선 회의적인 반응이 됐다.

[초록색 머리의 능력이 우리의 예상보다 너무 강력하군. 과연 블랑쉬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스터 매튜. 아까처럼 그린 더스트를 이용해서 통제할 수는 없는 건가?]

[능력을 완전히 봉인하지 않는 이상, 어느정도의 악영향은 받게 될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번 업그레이드는 도박이 되겠지.]

[그럼 표결에 붙여야겠군.]

일레네 윌슨이 그렇게 말하며 주저없이 표명했다.

[나는 반대야.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 파괴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

"나도 반대."

일레네에 이어서 나도 반대표를 던지자 매튜가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중립에 투표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보류해야겠군.]

"너무 급하게 굴지 말자고. 어차피 재료는 확보해뒀으니, 언제든지 진행할 수 있어. 추가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남아있고."

[알겠다. 모두 수고했네. 나는 이제부터 해당 능력을 적당한 수준으로 약화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보겠어.]

우리는 간만에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종료했다.

구경하다 진이 다 빠진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침음을 흘렸다.

"으음, 결국 블랙 로터스의 말대로 해버렸네."

"그 목소리, 정말 블랙 로터스 맞아?"

"확실해. 애초에 헌터 범죄 설계사 블랙 로터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도 자체가 거의 없고... 우리가 움직이기 직전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거야."

나는 앨리스의 질문에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엘은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짐작가는 게 아예 없으신 가요?"

"이건 좀 막연한 추측이긴 한데 말야... 혹시 블랙 로터스는 티아마트의 하얀색 머리와 동일인물이 아닐까?"

"뭣?"

나는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나한테 전해졌던 그 텔레파시는 초록색 머리의 특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내용이었어. 놈이 도대체 어디서 오라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초록색 머리 관련 내용은 그래."

"... 블랙 로터스가 초록색 머리의 자매였다면 당연히 그 특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네?"

"그렇지! 티아도 녀석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알고는 있었잖아. 애초에 붉은색 머리가 인간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것 같지도 않았고 말야."

붉은색 머리가 하얀색의 사주를 받고 날아왔다면 대충 말이 된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티아마트라곤 티아와 초록색, 그리고 하얀색 머리밖에 없으니 소거법으로 하얀색 머리가 범인이 된다.

"블랙 로터스라길래 막연히 검은색을 연상했는데... 그거야말로 상대의 노림수였던 거야. 젠장, 난 너무 차별적이었어."

"엑. 그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우리는 밤 늦게까지 의견을 나누며 일본 출장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대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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