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지하 투기장(5)
* * *
블루 라이트닝과 나는 상성이 썩 좋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최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크고 단단한 상대는 전혀 두렵지 않다.
어차피 그린 버스트를 쓰면 공격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블루 라이트닝처럼 작고 빠른 상대에겐 공격을 적중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저 녀석은 스스로를 강화하는 식으로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린 더스트의 영향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
물론 전격 공격 같은 건 완전히 무효화 할 수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썩 크지 않다.
"그게 말로만 듣던 무효화 능력인가!"
"마력 공유 결합 해제란 거다."
나는 불필요한 팁으로 녀석의 머리를 어지럽히려 하며 그린 더스트 단검을 만들어냈다.
급조품이라서 품질이 썩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하다못해 원래 장비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잠입 작전이다보니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파밧!
섬광과 같은 일격이 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금까지의 연속 전투로 인한 피로 따윈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단검으로 그것을 어렵사리 쳐내며 방어 자세를 굳혔다.
이동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녀석은 번번이 공격이 튕겨나오는 것을 보곤 살짝 놀랐다.
"워어, 보기보다 제법인데?"
블루 라이트닝의 공격은 확실히 빨랐지만, 빠르다는 것은 곧 직선적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나는 앞선 전투를 지켜보며 녀석의 최고속도를 대충 파악했다.
스쳐지나가듯 비스듬한 자세로 날리는 공격... 게다가 타이밍도 대충 가늠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까불지 마. 내 스파링 상대는 예리엘 프로스트라고.'
그러나 방어와 달리 반격은 여의치 않았다.
저쪽은 내게 붙잡힐까봐 몸을 깊게 들이밀지 않고 있다.
그녀의 검투사 생활은 그저 놀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몬스터와 지구력 싸움을 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다.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파스슷!
내 주변에 휘몰아치던 녹색 불씨가 한층 강해졌다.
나는 회장의 출구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도망치려고?"
망설임 없이 추적해오며 출구를 가로막는 블루 라이트닝.
직후, 녀석의 등 뒤에서 강렬한 섬광과 열기가 터져나왔다.
콰앙!
약화판 그린 버스트.
검은색 머리에게 써먹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위력이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블루 라이트닝은 아슬아슬하게 폭발 범위에서 벗어나 내쪽으로 곧게 달려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기술을 읽어내거나 한 것이 아니다.
저 녀석은 그저 압도적인 반응속도로, 폭발이 터진 직후에 가속한 것이다.
마치 혼자서 시간을 3배는 더 쓰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약화판 그린 버스트는 위력을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설정해놓아서, 잘못하면 나까지 휘말리는 수준이다.
따라서 블루 라이트닝은 내쪽으로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핫! 그린 더스트!"
묘하게 신을 내며 가속하는 녀석은 공격과 회피를 동시에 행할 셈이었다.
나는 단단히 각오를 하곤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냈다.
내 상대는 어느덧 푸른 섬광이 되어있었다.
최대한 안정적인 자세를 갖추자마자 엄청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콰아앙!
"쿨럭!"
녀석의 돌진에 내 왼팔이 완전히 부서졌다.
나도 나름대로 육체강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예 온몸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극심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멀쩡한 오른팔로 녀석을 붙잡았다.
예상 이상의 터프함에 놀란 블루 라이트닝이 씨익 웃었다.
"오오!"
"그아아앗!"
어차피 밖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치료사인 한예진이 대기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김정태가 지원군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설령 온몸이 부서지더라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면 내 승리다.
그러나 회심의 일격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블루 라이트닝은 내 손을 힘으로 쳐내곤 초근접 그린 버스트를 피해냈다.
잘 발달된 그녀의 다리가 나를 뻥 차버려서, 덕분에 나도 그린 버스트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윽!"
"후우. 여기까지 했는데 살아있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괜찮네. 너 내 따까리 할래?"
"... 너도 우리집 티아마트보다 많이 세네."
나는 박살난 안경을 벗어던지며 쓰게 웃었다.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영입 제안이라니.
불행히도 나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었다.
"근데 너 내 와이프가 누군지 알아?"
"... 와이프?"
쿠웅!
내 말이 끝나기 무섭도록 당사자가 등장했다.
굉음과 함께 천장을 부수며 슉 떨어지는 인영.
한국에 남아있던 예리엘이 블루 라이트닝의 목격 소식을 듣자마자 티아를 타고 부랴부랴 날아온 것이다.
직행 비행기를 타고와도 11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티아가 내 예상보다 많이 빨랐다.
'그 녀석... 의외로 굉장히 좋은 탈것이었던 건가?'
평소에 보던 제복 차림도 아니건만.
블루 라이트닝은 곧바로 예리엘을 알아봤다.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예리엘의 눈이 나와 그녀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예... 예리엘 프로스트으읏!!"
"..."
파스슷!
겨우 정신을 되찾은 블루 라이트닝이 발작하듯 급가속.
녀석은 푸른 번개가 되어서 실내를 종횡무진 누볐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것은 최고 속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눈으로 쫓기도 힘든 상대를, 예리엘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 예리엘이 한층 사납게 눈을 떴다.
그녀는 한 글자씩 잘근잘근 씹듯이 내뱉었다.
"쓰레기가..."
끝도없이 가속하던 블루 라이트닝의 속도가 마침내 정점에 다다른 순간.
돌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녀의 질주가 끝나버렸다.
거의 비행이나 다름없는 이동을 보여주던 그녀는 대량의 선혈을 흩뿌리며 거세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콰드드득! 콰아앙!
"크헉! 아, 아흑?"
기둥에 격돌하고 나서야 겨우 정지한 블루 라이트닝은 멀찍이서 본인의 양 발을 발견했다.
그녀의 양 발은 아주 멀쩡히 땅바닥에 붙어있었다.
발목 위가 흉측하게 뜯겨져나갔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당장이라도 질주를 계속할 것 같은 발목이 무척 공포스럽게 보였다.
그것은 흡사 기괴한 취향의 조형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거의 동시에 진상을 파악했다.
예리엘은 음속을 아득히 돌파했던 상대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양쪽 발만 정지시켜버렸던 것이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블루 라이트닝은 스스로의 발목을 자진해서 찢어낸 것 같은 꼴이 됐다.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그녀가 닿지 않는 손을 뻗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발... 내 발이... 아아아악!"
뒤늦게 찾아온 통각이 처절한 절규를 만들어냈다.
예리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잘린 다리로 어렵사리 물러나던 블루 라이트닝은 금세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아, 안 돼. 겨우 자유가 됐는데 이럴 수는... 크흑!"
무표정하게 거리를 좁힌 예리엘이 상대의 다리를 한 번 더 정지시켰다.
이번에도 무자비하게 찢어내려는 듯, 아예 비명조차 들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나를 가볍게 압도했던 상대가 무슨 장난감처럼 희롱당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보다못해 그녀를 말렸다.
"그... 그냥 끝내."
"알겠어요."
콰득!
보이지 않는 압력이 투명한 상자 속에 갇힌 블루 라이트닝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한예진이 내 상처를 치료해주며 밖으로 부축했다.
"마스터, 얼른 떠나셔야 해요. 지금 당장 안전가옥으로 모실게요."
"가죠."
예리엘은 아예 나를 양팔로 번쩍 안아들어서 밖으로 향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더듬더듬 말했다.
이 또한 가장의 권위가 실추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 굳이 올 필요 없었는데... 내가 이기고 있었단 말야."
"죄송해요. 저도 알고 있었지만 걱정이 돼서요."
"이거 참, 농담이 안 통하네."
"이쪽이에요!"
우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 안으로 몸을 던져넣었다.
서지유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바들바들 떨고있는 모습.
블랑쉬가 교통신호를 교란시켜주는 가운데, 차량이 주저없이 안전가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한참을 달려서 겨우 도착한 곳에는 인간형으로 변한 티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안전합니다."
"주인님! 괜찮으셔요?"
"야, 파란 머리 존나 세더라."
"엑..."
티아에겐 미안하지만 이게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겨우 안전가옥에 들어온 서지유는 더듬더듬 내뱉으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티, 팀장님... 그린 더스트... 였어요? 예리엘 씨는 그걸 다 알고 결혼하신 거구요?"
"맞아요."
예리엘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지유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나는 일단 해가 밝기 전에 예리엘과 티아를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어차피 공항으로 귀국하면 돼서 문제없다.
"예리엘, 티아랑 먼저 돌아가봐. 허락도 없이 여기에 온 거 들키면 난리나잖아."
"서방님도 같이 가시는 게 어때요?"
"나는 괜찮아. 어차피 블랑쉬 덕분에 증거도 안 남았고. 당당하게 공항으로 귀국할 수 있어."
"알았어요. 그럼..."
예리엘은 서지유를 살짝 힐끔거리면서도 티아에게 손짓했다.
창 밖에서 거대한 용이 이륙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안에도, 서지유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정태와 한예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비켜줬다.
"두 사람은 먼저 가서 쉬어."
"예."
"헌터 연쇄 살인마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원래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거야. 지유 씨도 내 경력 잘 알잖아?"
"아..."
조금이나마 냉정을 되찾은 서지유가 겨우 전후사정을 이해했다.
사실 내 동기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만큼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서지유는 아직 질문을 끝내지 못했다.
"그럼 저는 왜 살려주신 건데요? 저, 정말로 안 죽이는 거 맞죠?"
"뭘 멋대로 죽으려고 하냐? 너는 내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니까? 어차피 증거영상도 뭣도 없는데, 누가 네 말을 믿어줄 것 같아?"
"..."
"됐으니까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자. 오늘은 수고했어."
나는 서지유를 방으로 바래다주곤 조금 쉬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닫히기 직전의 문틈에 손을 끼워넣곤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가, 가지 마세요. 같이 있어줘요."
"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서지유는 차마 떼어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같은 방에서 감시하기로 했다.
* * *